하나님의 요구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222회
작성일
2002-06-15 16:11
♡♥♡ 하나님의 요구 / 암5:21-24
*** 들어가는 말
어느 회사에서 영업부 신입사원을 채용했습니다. 한 신입사원이 며칠 근무를 하고 난 후 처음으로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보고서를 본 영업부장은 기절할 뻔 했습니다. 그 보고서는 최소한의 격식도 갖추지 못했고, 철자법과 띄어쓰기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이었습니다. 보고서의 내용입니다.
“돈두 한푼 없는것가튼 사람에게 물거늘 파랏습니다.”
이게 첫 보고서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보고서는 더욱 가관이었습니다.
“물거늘 마니파는 방버블 차자내쓰므니다.”
부장은 너무나 어처구니없어서 신입사원의 보고서를 사장에게 가지고 가서 그를 당장 해고시킬 것을 건의했습니다. 다음날 사장으로부터 결재 서류가 내려왔습니다. 사장의 결재 서류에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우리 회사에 정말 필요한 인재가 들어왔소. 그의 보고서의 철자에만 너무 신경을 쓰지 말고, 그가 쓴 보고서를 잘 일거보고 당신들도 그대로 따라서 물거늘 파는 방버블 연구하시오. -사장- ”
이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원에 그 사장입니다. 사장은 무엇이 먼저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영업사원이니 당연히 물건을 잘 팔고 많이 파는 것이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양식에 잘 맞춘 멋진 보고서라 할지라도 물건을 전혀 팔지 못했다는 보고서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일을 진행하다가 때때로 그 일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방법론에 매여 재물과 시간과 힘을 헛되이 낭비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적을 분명히 알고 그 목적을 향하여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알았고, 그 목표를 향하여 전력 질주했습니다. 빌립보서3:13,14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남 유다는 10대 왕인 ‘웃시야’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북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이 예고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불과 20여년 후면 완전히 멸망당하게 될 그런 위기의 때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목적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돌이킬 것을 권고하고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해묵은 습관에서 돌아서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악독했고, 타락했습니다. 아모스2:6-8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증언하십니다. 현대어 성경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짓고 또 죄를 지었으니 내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내가 더 이상 그들을 처벌하지 않고 놓아 둘 수가 없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며, 빚을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을 노예로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죽신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사람을 팔아먹는다. 그들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머리를 짓밟아 흙 속에 처박고, 불쌍한 사람들의 살길을 막아 놓는다. 아비와 아들이 같은 창기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 그들은 저당물로 잡은 옷들을 펼쳐 놓고 그 위에 누워 종교 행사들을 즐기며, 훔친 돈으로 산 포도주를 나의 성전에서 제물로 바치고 마신다. (저당물을 밤까지 잡아 두는 것은 율법 위반이다(출22:26))”
그들은 생활뿐만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도 망나니들이었습니다. 선지자들에게는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잘못과 죄를 들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안식일에나 절기에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사를 역겨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형식적인 예배보다는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먼저 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시대에 주신 이 하나님의 요구는 신약의 은혜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더욱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형식과 법이 주를 이루던 때에도 삶을 이처럼 소중하게 여겼다면, 지금 은혜의 시대에는 얼마나 더 중요하겠습니까? 구약 시대에는 간음을 해야만 간음죄였고, 사람을 죽여야 살인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음욕만 품어도 간음을 한 것이요,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 율법사들을 얼마나 책망하셨습니까? 그들이 마음에도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시고 무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온갖 악기로 아름다운 찬양을 하고, 멋진 옷으로 황홀한 워십 댄싱을 하고, 주일 예배에,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고, 여러 부서에서 봉사를 합니다. 그런데 사회로 돌아가면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을 잊고 삽니다. 사업상의 이유로 거짓말도 쉽게 하고, 술 취하고 방탕하고, 남의 입장이나 남을 돕는 일은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산다면 그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예배보다 공의와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을 더 중요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진실성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긴다면 예배만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도 거룩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4:20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하나님께 거룩하게 예배하는 것만큼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나타내는 그런 삶을 요구하십니다.
남을 비판하면서 자신은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공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면 또한 의로운 삶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효자로 소문난 왕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 왕은 의를 소중히 여기는 의로운 왕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법을 정해 놓고, 이러한 죄를 짓는 자는 태형으로 다스리겠노라고 선포했습니다. 법을 어긴 사람은 기둥에 묶어 놓고 옷을 벗긴 다음 채찍으로 40대를 때리는 것입니다. 왕은 이렇듯 공의를 실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필이면 왕의 어머니가 그 죄 중에 하나를 범했습니다. 백성들은 효자인 왕이 과연 자신의 어머니를 때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왕은 담담하게 어머니를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그 옷을 벗기고 기둥에 묶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놀랬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왕이 느닷없이 자기 옷을 벗고 어머니를 끌어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할 수 없이 관리는 왕의 볼기에 40대의 매를 쳤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본 백성들은 숙연해 졌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백성들은 왕의 뜻을 깨닫고 두려워하며 법을 지키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먼저 본을 보이셨습니다. 곧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천국을 잃은 사람들에게 다시 천국을 주기 위하여 사람의 죄에 대하여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죄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공의이며, 사람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에서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본을 보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일에 감사하면서, 우리도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공의를 이루어갑시다.
*** 들어가는 말
어느 회사에서 영업부 신입사원을 채용했습니다. 한 신입사원이 며칠 근무를 하고 난 후 처음으로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보고서를 본 영업부장은 기절할 뻔 했습니다. 그 보고서는 최소한의 격식도 갖추지 못했고, 철자법과 띄어쓰기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이었습니다. 보고서의 내용입니다.
“돈두 한푼 없는것가튼 사람에게 물거늘 파랏습니다.”
이게 첫 보고서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보고서는 더욱 가관이었습니다.
“물거늘 마니파는 방버블 차자내쓰므니다.”
부장은 너무나 어처구니없어서 신입사원의 보고서를 사장에게 가지고 가서 그를 당장 해고시킬 것을 건의했습니다. 다음날 사장으로부터 결재 서류가 내려왔습니다. 사장의 결재 서류에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우리 회사에 정말 필요한 인재가 들어왔소. 그의 보고서의 철자에만 너무 신경을 쓰지 말고, 그가 쓴 보고서를 잘 일거보고 당신들도 그대로 따라서 물거늘 파는 방버블 연구하시오. -사장- ”
이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원에 그 사장입니다. 사장은 무엇이 먼저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영업사원이니 당연히 물건을 잘 팔고 많이 파는 것이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양식에 잘 맞춘 멋진 보고서라 할지라도 물건을 전혀 팔지 못했다는 보고서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일을 진행하다가 때때로 그 일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방법론에 매여 재물과 시간과 힘을 헛되이 낭비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적을 분명히 알고 그 목적을 향하여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알았고, 그 목표를 향하여 전력 질주했습니다. 빌립보서3:13,14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남 유다는 10대 왕인 ‘웃시야’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북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이 예고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불과 20여년 후면 완전히 멸망당하게 될 그런 위기의 때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목적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돌이킬 것을 권고하고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해묵은 습관에서 돌아서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악독했고, 타락했습니다. 아모스2:6-8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증언하십니다. 현대어 성경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짓고 또 죄를 지었으니 내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내가 더 이상 그들을 처벌하지 않고 놓아 둘 수가 없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며, 빚을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을 노예로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죽신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사람을 팔아먹는다. 그들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머리를 짓밟아 흙 속에 처박고, 불쌍한 사람들의 살길을 막아 놓는다. 아비와 아들이 같은 창기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 그들은 저당물로 잡은 옷들을 펼쳐 놓고 그 위에 누워 종교 행사들을 즐기며, 훔친 돈으로 산 포도주를 나의 성전에서 제물로 바치고 마신다. (저당물을 밤까지 잡아 두는 것은 율법 위반이다(출22:26))”
그들은 생활뿐만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도 망나니들이었습니다. 선지자들에게는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잘못과 죄를 들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안식일에나 절기에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사를 역겨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형식적인 예배보다는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먼저 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시대에 주신 이 하나님의 요구는 신약의 은혜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더욱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형식과 법이 주를 이루던 때에도 삶을 이처럼 소중하게 여겼다면, 지금 은혜의 시대에는 얼마나 더 중요하겠습니까? 구약 시대에는 간음을 해야만 간음죄였고, 사람을 죽여야 살인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음욕만 품어도 간음을 한 것이요,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 율법사들을 얼마나 책망하셨습니까? 그들이 마음에도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시고 무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온갖 악기로 아름다운 찬양을 하고, 멋진 옷으로 황홀한 워십 댄싱을 하고, 주일 예배에,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고, 여러 부서에서 봉사를 합니다. 그런데 사회로 돌아가면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을 잊고 삽니다. 사업상의 이유로 거짓말도 쉽게 하고, 술 취하고 방탕하고, 남의 입장이나 남을 돕는 일은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산다면 그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예배보다 공의와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을 더 중요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진실성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긴다면 예배만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도 거룩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4:20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하나님께 거룩하게 예배하는 것만큼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나타내는 그런 삶을 요구하십니다.
남을 비판하면서 자신은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공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면 또한 의로운 삶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효자로 소문난 왕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 왕은 의를 소중히 여기는 의로운 왕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법을 정해 놓고, 이러한 죄를 짓는 자는 태형으로 다스리겠노라고 선포했습니다. 법을 어긴 사람은 기둥에 묶어 놓고 옷을 벗긴 다음 채찍으로 40대를 때리는 것입니다. 왕은 이렇듯 공의를 실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필이면 왕의 어머니가 그 죄 중에 하나를 범했습니다. 백성들은 효자인 왕이 과연 자신의 어머니를 때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왕은 담담하게 어머니를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그 옷을 벗기고 기둥에 묶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놀랬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왕이 느닷없이 자기 옷을 벗고 어머니를 끌어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할 수 없이 관리는 왕의 볼기에 40대의 매를 쳤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본 백성들은 숙연해 졌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백성들은 왕의 뜻을 깨닫고 두려워하며 법을 지키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먼저 본을 보이셨습니다. 곧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천국을 잃은 사람들에게 다시 천국을 주기 위하여 사람의 죄에 대하여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죄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공의이며, 사람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에서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본을 보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일에 감사하면서, 우리도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공의를 이루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