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믿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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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6-09 09:47
♡♥♡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믿음 / 눅7:9-19
*** 들어가는 말
생활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적용되는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에 그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입니까? 자신의 믿음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은혜와 믿음이 동시에 필요합니까?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등산을 하던 중에 깊은 산 속에서 폭설을 만나 길을 잃고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추위에서 자신이 가진 장비나 음식이나 모든 면에서 삼일을 넘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믿음으로 길을 찾아 나서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만일, 마냥 주저앉아서 하나님의 은혜만 기다리고 있다면, 사람들은 믿음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출발해야지!’이렇게 말입니다. 반면에, 위험하지만 믿음으로 길을 찾아 나선다면 역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하거나 무모한 만용을 부렸다.’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는 항상 이와 같은 상황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신앙의 갈등이 깊어지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좌절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설령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믿음이 어떤 관계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본문에는 세 가지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두 가지 이적과 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2-10절까지는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이적’이며, 11-17절까지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적’입니다. 그리고 18-28절까지는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 가지의 내용을 통하여 주님의 가르치심을 생각해 봅시다.
1.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이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적을 통하여 ‘백부장의 믿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인 백부장이 선민인 유대인들보다 더 나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유대는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가 파송한 총독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큰 성읍들마다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의 백부장 중에 병들어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하인을 안타까워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예수님께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간청을 듣고 그 백부장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또 친구를 보내어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다만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옵소서.”라고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그의 훌륭한 믿음에 경탄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의 어떤 면이 예수님을 그토록 놀라게 했을까요?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수많은 이적들을 체험하고서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지도자들인 제사장 그룹과 바리새인, 율법사와 서기관 등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단으로 몰아붙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백부장은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삶의 모습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 앞쪽의 4,5절에 보냄을 받은 장로들이 예수님께 간청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생활 속에서 행함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깨닫고 믿는 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의 하인은 즉시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이적은 백부장의 살아있는 믿음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졌습니다.
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종류의 행렬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마을로부터 나오는 장례 행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을로 들어가는 생명의 행렬인 예수님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이 두 행렬이 마을 어귀에서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주검을 살려 내셨고 어미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이 이적의 근본 된 바탕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본문13절에서,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라고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과부의 슬픔을 보신 것입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적을 행하셨고, 과부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이적을 위하여 죽은 청년은 물론이거니와 과부나 주변 인물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 이적은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가 바탕이었습니다. 이는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지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왔고, 살고 있고, 또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5:10절에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합니다. 이 이적은 에베소서2:8-9절에서 말씀하듯이 사람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두 이적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믿음이 바탕이 되었고, 또 다른 하나는 인생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전적인 바탕이 되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믿음, 이 둘 중에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까? 이제 세 번째 이야기를 봅시다.
3.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봅시다.
세례 요한은 유대지역의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의 좇지 못한 행실을 책망했다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눅3:19-20,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 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안디바는 전처를 버리고, 동생인 ‘헤롯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빼앗아 아내로 삼았다가 책망을 받음.).
이 때는 이미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물로 세례를 베푼 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옥에 갇혀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는지, 아니면 아직도 메시아를 만나지 못한 것인지에 대하여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앞의 두 이적을 직접 목격한 요한의 제자들이 그 사실을 요한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요한은 제자들을 시켜서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묻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구약에서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된 것이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시면서, 요한에게 보고 들은 대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을 보내신 후, 무리들에게 세례 요한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불확신에 대하여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의 신실함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끝까지 성실하게 완수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닦는 역할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죽기까지 오직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일에만 쓰임 받았습니다. 즉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예비하는 도구였습니다.
이제, 세 가지 이야기를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종의 병을 고침 받은 백부장,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죽은 아들을 돌려받은 나인성의 과부,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믿음을 걸지 못했으나 신실함을 인정받은 세례요한까지.
4. 결론입니다
에베소서 2:8-9절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강조점이 무엇인지를 찾았습니까?
믿음도 중요하고 행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구원을 위한 가장 위대한 업적은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의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즉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가치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비록 감옥에 갇혀서 불안한 가운데 믿음 없는 행위를 했지만, 그를 메시아 앞서 보내시고 뜻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값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바꾸어 표현하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깨닫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반응이 경외와 감사입니다. 그러면 앞에 시작할 때의 주제로 돌아가서 결론을 내립시다. 은혜가 먼저입니까 믿음이 먼저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은혜만 기다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사람은 세례요한처럼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하게 가게 됩니다. 즉 자신의 삶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생명이 다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믿음이 깊어지는 실제적인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믿음이 깊어지는 네 단계의 상태를 말씀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첫째 단계는, 주일성수의식이 뚜렷해지고, 십일조에 대한 막연함이 확신으로, 전도의 사명이 절실하지 않던 내가 하나님의 지상명령임을 절감합니다. 자꾸 자꾸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꼬 하고 연구하게 됩니다. 내가 택함을 받았다는 그것 하나로 무슨 일이든 순수하게 봉사하고 따르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갈등’입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주일성수, 십일조, 전도, 봉사하는 것이 마냥 기쁩니다. 그러다가도 문득 열심 하던 마음이 어떤 생각에 이끌려 동작을 멈추고 맙니다. 세상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입니다. 이 때, 자칫하면 외식하는 바리새인이 되기 쉽습니다. 신앙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세상을 통해 다른 안정과 만족을 누리려 살짝 곁눈질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주보의 목회자칼럼 / ‘마음을 지키는 것’을 볼 것).
세 번째 단계는 두 가지로 다시 나뉩니다. 나태한 신앙생활을 회개하고, 그런 나약한 자신을 고백하고 주께 도움을 청하는 순종 형이며, 다른 하나는 계속 어긋난 길로 가다가 시험을 당해 넘어지고서야 비로소 다시 첫사랑으로 돌아오는 반항 형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단단한 땅에 물이 고이듯,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하여 마음이 겸손하여 지고 믿음의 흔들림이 별로 없이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성장의 네 단계에 들어와 있습니까? 이왕에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소망한다면 세상에서의 방황을 빨리 끝낼수록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나인성 과부처럼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의 은혜를 값없이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지금 주신 길을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갑시다.
*** 들어가는 말
생활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적용되는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에 그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입니까? 자신의 믿음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은혜와 믿음이 동시에 필요합니까?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등산을 하던 중에 깊은 산 속에서 폭설을 만나 길을 잃고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추위에서 자신이 가진 장비나 음식이나 모든 면에서 삼일을 넘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믿음으로 길을 찾아 나서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만일, 마냥 주저앉아서 하나님의 은혜만 기다리고 있다면, 사람들은 믿음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출발해야지!’이렇게 말입니다. 반면에, 위험하지만 믿음으로 길을 찾아 나선다면 역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하거나 무모한 만용을 부렸다.’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는 항상 이와 같은 상황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신앙의 갈등이 깊어지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좌절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설령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믿음이 어떤 관계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본문에는 세 가지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두 가지 이적과 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2-10절까지는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이적’이며, 11-17절까지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적’입니다. 그리고 18-28절까지는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 가지의 내용을 통하여 주님의 가르치심을 생각해 봅시다.
1.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이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적을 통하여 ‘백부장의 믿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인 백부장이 선민인 유대인들보다 더 나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유대는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가 파송한 총독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큰 성읍들마다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의 백부장 중에 병들어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하인을 안타까워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예수님께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간청을 듣고 그 백부장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또 친구를 보내어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다만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옵소서.”라고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그의 훌륭한 믿음에 경탄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의 어떤 면이 예수님을 그토록 놀라게 했을까요?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수많은 이적들을 체험하고서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지도자들인 제사장 그룹과 바리새인, 율법사와 서기관 등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단으로 몰아붙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백부장은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삶의 모습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 앞쪽의 4,5절에 보냄을 받은 장로들이 예수님께 간청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생활 속에서 행함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깨닫고 믿는 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의 하인은 즉시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이적은 백부장의 살아있는 믿음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졌습니다.
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종류의 행렬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마을로부터 나오는 장례 행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을로 들어가는 생명의 행렬인 예수님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이 두 행렬이 마을 어귀에서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주검을 살려 내셨고 어미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이 이적의 근본 된 바탕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본문13절에서,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라고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과부의 슬픔을 보신 것입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적을 행하셨고, 과부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이적을 위하여 죽은 청년은 물론이거니와 과부나 주변 인물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 이적은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가 바탕이었습니다. 이는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지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왔고, 살고 있고, 또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5:10절에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합니다. 이 이적은 에베소서2:8-9절에서 말씀하듯이 사람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두 이적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믿음이 바탕이 되었고, 또 다른 하나는 인생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전적인 바탕이 되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믿음, 이 둘 중에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까? 이제 세 번째 이야기를 봅시다.
3.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봅시다.
세례 요한은 유대지역의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의 좇지 못한 행실을 책망했다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눅3:19-20,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 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안디바는 전처를 버리고, 동생인 ‘헤롯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빼앗아 아내로 삼았다가 책망을 받음.).
이 때는 이미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물로 세례를 베푼 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옥에 갇혀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는지, 아니면 아직도 메시아를 만나지 못한 것인지에 대하여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앞의 두 이적을 직접 목격한 요한의 제자들이 그 사실을 요한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요한은 제자들을 시켜서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묻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구약에서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된 것이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시면서, 요한에게 보고 들은 대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을 보내신 후, 무리들에게 세례 요한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불확신에 대하여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의 신실함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끝까지 성실하게 완수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닦는 역할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죽기까지 오직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일에만 쓰임 받았습니다. 즉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예비하는 도구였습니다.
이제, 세 가지 이야기를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종의 병을 고침 받은 백부장,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죽은 아들을 돌려받은 나인성의 과부,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믿음을 걸지 못했으나 신실함을 인정받은 세례요한까지.
4. 결론입니다
에베소서 2:8-9절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강조점이 무엇인지를 찾았습니까?
믿음도 중요하고 행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구원을 위한 가장 위대한 업적은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의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즉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가치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비록 감옥에 갇혀서 불안한 가운데 믿음 없는 행위를 했지만, 그를 메시아 앞서 보내시고 뜻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값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바꾸어 표현하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깨닫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반응이 경외와 감사입니다. 그러면 앞에 시작할 때의 주제로 돌아가서 결론을 내립시다. 은혜가 먼저입니까 믿음이 먼저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은혜만 기다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사람은 세례요한처럼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하게 가게 됩니다. 즉 자신의 삶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생명이 다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믿음이 깊어지는 실제적인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믿음이 깊어지는 네 단계의 상태를 말씀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첫째 단계는, 주일성수의식이 뚜렷해지고, 십일조에 대한 막연함이 확신으로, 전도의 사명이 절실하지 않던 내가 하나님의 지상명령임을 절감합니다. 자꾸 자꾸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꼬 하고 연구하게 됩니다. 내가 택함을 받았다는 그것 하나로 무슨 일이든 순수하게 봉사하고 따르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갈등’입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주일성수, 십일조, 전도, 봉사하는 것이 마냥 기쁩니다. 그러다가도 문득 열심 하던 마음이 어떤 생각에 이끌려 동작을 멈추고 맙니다. 세상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입니다. 이 때, 자칫하면 외식하는 바리새인이 되기 쉽습니다. 신앙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세상을 통해 다른 안정과 만족을 누리려 살짝 곁눈질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주보의 목회자칼럼 / ‘마음을 지키는 것’을 볼 것).
세 번째 단계는 두 가지로 다시 나뉩니다. 나태한 신앙생활을 회개하고, 그런 나약한 자신을 고백하고 주께 도움을 청하는 순종 형이며, 다른 하나는 계속 어긋난 길로 가다가 시험을 당해 넘어지고서야 비로소 다시 첫사랑으로 돌아오는 반항 형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단단한 땅에 물이 고이듯,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하여 마음이 겸손하여 지고 믿음의 흔들림이 별로 없이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성장의 네 단계에 들어와 있습니까? 이왕에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소망한다면 세상에서의 방황을 빨리 끝낼수록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나인성 과부처럼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의 은혜를 값없이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지금 주신 길을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