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따르는 결과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959회
작성일
2002-06-02 22:22
♡♥♡ 욕망을 따르는 결과 / 왕하5:20-27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점점 위선과 거짓으로 짙게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종말이 가까우면 사랑도 식어지고 믿음도 희귀해지리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위기이며 진리의 위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주님의 말씀대로 위기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암담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위선 된 삶에 자연스럽게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위선 된 행동을 하며, 거짓을 말합니다. 그러나 위선과 거짓은 하나님께서 철저히 배격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거짓의 근원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8:4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거짓의 근원은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행하는 사람의 결말이 지옥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21:27절에서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하셨으며, 22:15절에서는,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삶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성경 말씀을 통하여 보여주고 계십니다. 신약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와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의 거짓되고 위선된 삶을 통하여 심각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이 시간의 본문에도 탐욕과 거짓으로 화를 자초한 ‘게하시’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의 사환으로서 가장 복된 자리에서 탐욕과 거짓된 삶을 버리지 못하여 저주를 자청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삶의 자리를 돌아봅시다.
게하시는 어떤 사람입니까?
게하시는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선지자를 보필하는 사환으로 일하면서 많은 기적과 이적들을 목격하고 체험하는 은혜의 자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육신적인 삶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음을 짐작케 합니다. 그의 주인인 엘리사가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청빈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게하시는 아직 영적인 삶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신앙이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물질적인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값진 삶의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사건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나라의 국왕이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에 옷을 찢는다는 것은 회개를 하거나 비통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엘리사가 자초지종을 알아본 결과, 이웃 나라인 아람의 국왕이 자기 나라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달라는 글을 보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에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는 유대 계집종의 말을 듣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그 사실을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려는 핑계거리를 찾는 것으로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왕에게 그 사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전갈을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동행들을 거느리고 엘리사 선지자가 사는 ‘길갈’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는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어라’고 전했습니다. 대국의 2인자가 왔음에도 환대는커녕 얼굴도 내밀지 않고 사환을 시켜 말을 전한 것에 나아만은 화가 났습니다. 나아만은 그대로 본국으로 돌아가는 중에 종들의 권유를 받고, 마음을 돌이켜 요단강으로 가서 일곱 번 몸을 씻고는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감격한 나아만이 엘리사에게로 돌아와서 사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아무 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그곳의 흙을 조금 가져가기를 청하고는 이제부터는 자신도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약속하고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게하시는 주인인 엘리사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 많은 금은보화들을 거절하다니, 조금만 받았더라도 생활이 나아질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걸 받았다고 누가 나무라겠습니까? 게하시는 궁리 끝에 나아만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는 나아만에게 자신의 주인이 ‘제자 둘이 와서 그들에게 줄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달라.’고 하더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더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게하시는 그 물건들을 몰래 숨겨두고는 태연스럽게 주인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물질에 눈이 멀어서 자기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탐욕에 눈이 멀어버리면 신앙도 생명도 천국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눈앞의 이익과 물질만 보이게 됩니다.
중국의 여씨 춘추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백주 대낮, 시장 한 복판에 벌려놓은 금은방에 놓인 황금덩어리를 넋 빠진 듯이 쳐다보고 있던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 사내는 느닷없이 그것을 집어 들고 도망을 쳤습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시장바닥에서 도망을 가면 어디까지 갈 수가 있겠습니까? 물건을 훔친 사내는 마침내 붙들려서 재판관 앞에 섰습니다. 기가 막힌 재판관이 사내에게 묻습니다.
“시장 바닥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그것을 도둑질 할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이 말을 들은 사내는,
“그때 제 눈엔 황금만 보였지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인간이 지닌 탐욕의 특성을 잘 설명해 주는 중국 우화입니다. 게하시가 꼭 그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현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이에 못지않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나는 결코 도적이 아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말라기3:8절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게하시는 탐욕의 대가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동시에 나아만의 문둥병을 대신 가지게 되었습니다. 게하시는 마치 교회당을 짓는 목수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처럼 거짓과 탐욕은 그리스도인에게 치명적인 독입니다. 골로새서3:5절에서는, “…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거짓은 앞서 본 대로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한꺼번에 발동을 했으니 어찌 더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게하시의 마음에 탐욕이 일어나자 신앙의 양심이 무뎌졌습니다. 나아만에게 얼마를 받는 것이 죄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짓말을 하고는 얼마의 물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엘리사 앞에서 위선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게하시가 나아만에게 물질을 요구한 것이 죄가 아니라 거짓말 한 것이 죄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었다면, 물질을 취하는 것 자체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에 성도들이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일이 많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신의 땅을 팔아서 하나님께 바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땅을 팔고나서 돈을 보니 탐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땅값 중의 얼마를 숨기고 나머지를 베드로 앞에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은 땅값의 일부를 자신들이 가졌다고 하지 않고 전부인 것처럼 했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행전5:3-4절에서,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을 속인 죄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도가 물질에 깨끗하지 않으면 신앙이 자랄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게하시에게 탐욕이 제거되지 않은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탐욕이 남아 있지 않은지 돌아봅시다.
에베소 교회는 신앙의 수준이 높았습니다. 에베소서를 읽어보면, 그 교회의 교인들의 신앙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들에게 문제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탐욕이 아직도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4:22절 이하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쫒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25절에서,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어서 가장 먼저 나타나야 할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보았던 요한복음8:44절에서처럼 거짓의 아비는 사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어떤 생활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신령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일주일에 몇 번씩 거룩한 예배에 참석하고, 때마다 기도하는 생활을 합니다. 가급적이면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며, 목사요, 집사요, 성도로서 여러 직분을 맡았습니다.
게하시의 마음을 보시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을 읽으시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읽고 계십니다. 26절을 한번 읽고 마치겠습니다. 엘리사가 불꽃 튀는 눈으로 게하시를 응시하면서, 그야말로 서릿발로 꾸중 하는 말입니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여러분!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기도해야 할 때이며, 우리의 믿음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육신의 생활과 세상의 탐욕으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며 모이기를 힘쓰며 믿음의 그릇을 준비합시다.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점점 위선과 거짓으로 짙게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종말이 가까우면 사랑도 식어지고 믿음도 희귀해지리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위기이며 진리의 위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주님의 말씀대로 위기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암담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위선 된 삶에 자연스럽게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위선 된 행동을 하며, 거짓을 말합니다. 그러나 위선과 거짓은 하나님께서 철저히 배격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거짓의 근원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8:4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거짓의 근원은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행하는 사람의 결말이 지옥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21:27절에서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하셨으며, 22:15절에서는,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삶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성경 말씀을 통하여 보여주고 계십니다. 신약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와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의 거짓되고 위선된 삶을 통하여 심각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이 시간의 본문에도 탐욕과 거짓으로 화를 자초한 ‘게하시’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의 사환으로서 가장 복된 자리에서 탐욕과 거짓된 삶을 버리지 못하여 저주를 자청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삶의 자리를 돌아봅시다.
게하시는 어떤 사람입니까?
게하시는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선지자를 보필하는 사환으로 일하면서 많은 기적과 이적들을 목격하고 체험하는 은혜의 자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육신적인 삶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음을 짐작케 합니다. 그의 주인인 엘리사가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청빈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게하시는 아직 영적인 삶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신앙이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물질적인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값진 삶의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사건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나라의 국왕이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에 옷을 찢는다는 것은 회개를 하거나 비통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엘리사가 자초지종을 알아본 결과, 이웃 나라인 아람의 국왕이 자기 나라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달라는 글을 보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에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는 유대 계집종의 말을 듣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그 사실을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려는 핑계거리를 찾는 것으로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왕에게 그 사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전갈을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동행들을 거느리고 엘리사 선지자가 사는 ‘길갈’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는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어라’고 전했습니다. 대국의 2인자가 왔음에도 환대는커녕 얼굴도 내밀지 않고 사환을 시켜 말을 전한 것에 나아만은 화가 났습니다. 나아만은 그대로 본국으로 돌아가는 중에 종들의 권유를 받고, 마음을 돌이켜 요단강으로 가서 일곱 번 몸을 씻고는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감격한 나아만이 엘리사에게로 돌아와서 사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아무 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그곳의 흙을 조금 가져가기를 청하고는 이제부터는 자신도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약속하고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게하시는 주인인 엘리사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 많은 금은보화들을 거절하다니, 조금만 받았더라도 생활이 나아질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걸 받았다고 누가 나무라겠습니까? 게하시는 궁리 끝에 나아만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는 나아만에게 자신의 주인이 ‘제자 둘이 와서 그들에게 줄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달라.’고 하더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더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게하시는 그 물건들을 몰래 숨겨두고는 태연스럽게 주인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물질에 눈이 멀어서 자기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탐욕에 눈이 멀어버리면 신앙도 생명도 천국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눈앞의 이익과 물질만 보이게 됩니다.
중국의 여씨 춘추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백주 대낮, 시장 한 복판에 벌려놓은 금은방에 놓인 황금덩어리를 넋 빠진 듯이 쳐다보고 있던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 사내는 느닷없이 그것을 집어 들고 도망을 쳤습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시장바닥에서 도망을 가면 어디까지 갈 수가 있겠습니까? 물건을 훔친 사내는 마침내 붙들려서 재판관 앞에 섰습니다. 기가 막힌 재판관이 사내에게 묻습니다.
“시장 바닥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그것을 도둑질 할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이 말을 들은 사내는,
“그때 제 눈엔 황금만 보였지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인간이 지닌 탐욕의 특성을 잘 설명해 주는 중국 우화입니다. 게하시가 꼭 그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현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이에 못지않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나는 결코 도적이 아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말라기3:8절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게하시는 탐욕의 대가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동시에 나아만의 문둥병을 대신 가지게 되었습니다. 게하시는 마치 교회당을 짓는 목수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처럼 거짓과 탐욕은 그리스도인에게 치명적인 독입니다. 골로새서3:5절에서는, “…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거짓은 앞서 본 대로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한꺼번에 발동을 했으니 어찌 더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게하시의 마음에 탐욕이 일어나자 신앙의 양심이 무뎌졌습니다. 나아만에게 얼마를 받는 것이 죄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짓말을 하고는 얼마의 물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엘리사 앞에서 위선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게하시가 나아만에게 물질을 요구한 것이 죄가 아니라 거짓말 한 것이 죄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었다면, 물질을 취하는 것 자체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에 성도들이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일이 많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신의 땅을 팔아서 하나님께 바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땅을 팔고나서 돈을 보니 탐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땅값 중의 얼마를 숨기고 나머지를 베드로 앞에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은 땅값의 일부를 자신들이 가졌다고 하지 않고 전부인 것처럼 했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행전5:3-4절에서,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을 속인 죄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도가 물질에 깨끗하지 않으면 신앙이 자랄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게하시에게 탐욕이 제거되지 않은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탐욕이 남아 있지 않은지 돌아봅시다.
에베소 교회는 신앙의 수준이 높았습니다. 에베소서를 읽어보면, 그 교회의 교인들의 신앙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들에게 문제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탐욕이 아직도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4:22절 이하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쫒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25절에서,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어서 가장 먼저 나타나야 할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보았던 요한복음8:44절에서처럼 거짓의 아비는 사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어떤 생활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신령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일주일에 몇 번씩 거룩한 예배에 참석하고, 때마다 기도하는 생활을 합니다. 가급적이면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며, 목사요, 집사요, 성도로서 여러 직분을 맡았습니다.
게하시의 마음을 보시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을 읽으시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읽고 계십니다. 26절을 한번 읽고 마치겠습니다. 엘리사가 불꽃 튀는 눈으로 게하시를 응시하면서, 그야말로 서릿발로 꾸중 하는 말입니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여러분!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기도해야 할 때이며, 우리의 믿음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육신의 생활과 세상의 탐욕으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며 모이기를 힘쓰며 믿음의 그릇을 준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