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온전한 믿음의 길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738회 작성일 2002-06-02 22:20
♡♥♡ 온전한 믿음의 길 / 약2:14-26

*** 들어가는 말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과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르다 할지라도 유일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인들은 자신이 추종하는 종교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신앙의 가장 근본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며,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대속의 제물로 오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이 곧 나를 위한 것임을 믿는 것이며, 영원한 삶을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유업으로 주어짐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삶은 아무리 훌륭하고 의롭고 진실하다 할지라도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히브리서11: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로마서14:23절에서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믿음도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보면, 믿음을 온전케 하는 길은 그 믿음을 생활 속에서 실행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에도 살아 있는 믿음과 죽어있는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까?

먼저, 죽어있는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고보를 통하여 죽어있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헐벗고 먹을 양식이 없는 가난한 성도 가정이 있었습니다. 행색이 초라하고 먹지 못하여 수척한 모습입니다. 같은 믿음의 식구들이 그 가난한 성도가 안타까워 보여서, “참 안 좋게 보이네요. 좀 따듯하게 입고 든든하게 잡수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그냥 지나가버립니다. 그 가난한 성도는 말로는 많은 위로를 받아서 든든합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춥고 배고프고 입을 것이 없습니다. 이 가난한 성도에게는 수많은 위로의 말보다는 밥 한 끼, 옷 한 벌이 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3:18절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심을 확실히 믿는다면, 그 믿음에는 사랑의 행동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사랑의 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 곧 죽은 믿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일서4:9-12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에게는 사랑의 행동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는 나 자신의 마음은 메말라 있지 않습니까? 그저 나 하나, 우리 가족만을 생각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썩어가는 사회,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영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의 믿음이 형식만 남은 죽은 믿음이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13: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했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험한 산을 등산하다가 그만 실수로 미끄러져 낭떠러지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본능적으로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바위틈에서 자란 나뭇가지를 붙잡고 간신히 생명을 건졌습니다. 위를 쳐다보니 도저히 오르지 못할 깎아지른 절벽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험한 바위 골짜기였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그는 위를 쳐다보면서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를 도와주세요. 위에 누구 없습니까?” 한참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구름 사이로 자그마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두려워 말라.” 이 위기에 빠진 사람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를 빨리 좀 도와주세요.”라고 다급하게 소리 질렀습니다. 그 때 구름 사이로 다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가 믿는 하나님이다. 너는 나를 믿고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아라. 그리하면 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도저히 손을 놓을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지금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는다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들려 온 그 음성에 결코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설령 하나님의 음성이라 할지라도 이 순간만은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를 향해서 다시 소리 질렀습니다. “그 위에 또 다른 분은 없나요?”

이것이 죽은 믿음의 실상입니다. 삶이 평안하고 안전할 때에는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처럼 보였던 사람도 생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믿음의 본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믿음은 어려울 때에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위의 예화와 같은 환경을 만났을 때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손을 놓을 수 있겠습니까?

다음으로, 살아있는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본문에서는 살아있는 믿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두 가지의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란을 떠난 지 오래되어 헤브론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직 아브람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람에게서 날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과 사라는 나이가 80을 넘어서 이미 자식을 낳을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창세기15:6절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은 실질적인 행동이 따랐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여호수아 2장에 등장하는 여리고의 기생 라합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전에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만 들통이 났습니다. 여리고 성이 발칵 뒤집혀서 두 정탐꾼을 잡으려고 군대가 동원되었습니다. 그 때에 기생 라합은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음을 믿고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여리고를 점령할 때에 자신의 가족을 살려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라합의 믿음과 행동은 가족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라합 자신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했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생명을 건 행동을 수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실례를 들고는 본문은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즉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너무나도 당연히 죽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살아있는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나, 읽을 때에 ‘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라고 느껴지거나, 좀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것을 하라고 하시는구나!’라고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지 않습니다. 그 믿음을 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할 때에 믿음이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말이 홍수를 이루는 세상에서 무엇으로 진실한 믿음을 나타내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속에서 사랑을 담은 행동으로 믿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이론으로만 사랑이 아니라, 굶주린 사람에게는 빵 하나, 물 한 잔이라도 대접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영이 죽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며, 깨닫게 하시는 말씀대로 실천하는 살아있는 믿음을 이루어 갑시다.

러시아의 문호인 ‘톨스토이’가 하루는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며, 또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대하여 한참을 생각하던 톨스토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현재 당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일’입니다.”

투철한 그리스도인이었던 톨스토이의 간단한 이 대답은 ‘현실과 현실적으로 주어진 일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말하고 가르친 내용대로 스스로 실천했다고 평가받는 위인입니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과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정보가 넘쳐납니다. 사람과 기업, 정당, 국가, 종교계까지 자신을 소개하고 나타내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말, 말, 말들이 난무합니다. 어느 것이 거짓인지 또는 진실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거짓도 진짜 이상으로 매끄럽게 꾸미는 때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진실을 나타낼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곧 생활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즉 말과 신앙과 행동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대복교회가 이렇게 진실한 믿음으로 뜻을 모읍시다.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기를 힘쓰고, 봉사하며 전도하기를 힘씁시다. 이제는 교회가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비록 성도의 숫자는 적고 힘은 약하지만 이것도 모으면 큰 힘이 됩니다. 서로 권면하면서 열심을 냅시다. 이 삭막한 땅에 교회를 세우는 기초가 되는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결코 외면하시거나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좌절하지 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끝까지 살아있는 믿음의 경주를 합시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신령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영과 육신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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