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는 자의 행복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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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8-25 21:40
♡♥♡ 깨닫는 자의 행복 / 마태복음 13:10-17
*** 들어가는 말
본문 말씀은 대단히 심각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열려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 닫혀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본문12절에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에 적용하신 법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시편49:20절에서,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깨닫지 못한다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고사성어 중에 ‘부중지어(釜中之魚)’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솥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유래를 보면,
중국 한나라 때에 광능군 태수가 된 ‘장강’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수가 부임해 보니 관내에 백성을 괴롭히는 도적 떼가 말썽이었습니다. 태수는 결심을 하고 도적 떼들이 있는 산채로 찾아가서 두목을 만나 인간의 도리로 설득을 했습니다. 태수의 말에 도적 두목이 깊은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떼를 지어 도적질하므로 목숨을 이어왔지만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솥 안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아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압니다.”
라고 하면서 생활을 청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장차 삶아져서 먹힐 것도 모르고 솥 안에서 헤엄치며 놀고 있는 물고기’처럼, 어리석은 인생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처한 입장이 어떠한지 알지도 못한 채 한가롭게 노니는 어리석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인생의 비극이겠지요.
이런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노아를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더니 결국 홍수로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는 천사들을 헤치려하던 소돔과 고모라도 심판을 전하는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유황불이 비처럼 내려 멸망을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그러합니다. 우리 인생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비웃습니다. 그 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과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로 깨어있어야 함을 권고하지만, 일부 성도들도 늘 들어왔던 이야기 중의 하나쯤으로 여겨버립니다. 주님은 누차 주님의 재림이 도적이 틈을 타듯, 번개가 동에서 서로 번쩍임 같이 순식간에 그리고 은밀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도들마저 감각이 둔하여져서 어제처럼 오늘을 살고, 오늘처럼 내일을 기대하며 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성도라면 모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본문 말씀이 분명하게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무리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그 비유를 풀어서 뜻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느냐?’는 질문에 주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을 구별하셨겠습니까? 군중들이나 제자들 모두가 같은 눈을 가졌고, 같은 귀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보고 똑같이 듣는데 제자들에게는 밝히 알려지고 군중들에게는 숨겨질 수 있단 말입니까?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소수의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더 깊이 알도록 하시면서, 더 많은 군중들에게는 의미를 닫아버리셔서 구원의 길을 막아버리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인류 모두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하신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구별하신 제자들이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군중들은 주님을 따르기는 하지만은 주님을 향한 고백이 없으며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6:26절에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36절에서는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고 무리들의 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깨달음이 허락되지 않은 무리들에 대하여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말씀을 인용하셔서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욕심이 앞서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도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습니다. 설령 깨달아진다고 한들 자기 욕심에 막혀서 삶의 열매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밭’에 해당하는 마음입니다.
가정을 꾸민지 한 달도 채 안되는 신혼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육군 대위이며 나이는 서른 정도였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고, 오직 자신이 성실하게 살면 만사가 다 형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은 꿈을 꾸는데, 자신은 차 운전도 못하는데 차를 의젓이 몰고 가더랍니다. 즐겁게 달리고 있는데 앞에서 커다란 괴물 같은 것이 나와 차와 부딪히는 바람에 놀라서 깼습니다. 꿈이 너무 선명해서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웠습니다. 그런데 아내도 몸부림을 치면서 깼습니다. 꿈 이야기를 하니까 그 아내도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괴물 같은 황소가 남편의 허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 살려라.’고 소리를 치고 있는데, 그 때 남편이 깨워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차 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운전병에게 여러 번 ‘조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날은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시내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사고가 나서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이었는데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중상이었습니다. 그 후에 치료를 받고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 된 후에 강원도 양구로 전근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옆집에 사는 권사님이 교회에 가자고 권했습니다. 그렇잖아도 건강 때문에 불안하고 무엇이든 잡고 싶은 마음에 두말하지 않고 따라갔습니다. 그 후 사단장이 새로 부임했는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단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매주일 부대 교회에 열심히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듣게 되고, 듣다 보니까 깨달음이 오고, 말씀이 깨달아지니까 말씀을 상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령까지 있다가 제대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사고를 통하여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고 이전에도 다섯 번이나 사고를 당했는데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깨달은 후에야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였는데 자신이 깨닫지 못하니까 계속 어려운 일들이 있었음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일찍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빨리 깨닫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에 콩깍지가 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는 자신의 관심이 한 곳으로 집중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빗대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세상적인 마음과 악한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고 있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들리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서두에서 말씀드린 본문12절을 풀어보고 마치겠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왜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되겠습니까?
이 말씀이 동식물의 세계에는 ‘약육강식’이며 ‘적자생존’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성결과 결실의 법칙’입니다. 요한복음15:2절을 봅시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11:17절 이하에서, 선민인 이스라엘이 참 감람나무이지만 열매가 없으므로 꺾임을 당하고,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참 감람나무 줄기에 접붙임을 밭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열매가 없는 가지를 잘라버리십니다. 열매는 없으면서 줄기의 진액을 헛되이 낭비하기 때문에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열매 맺는 가지가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줄기의 진액이 열매로 집중되게 하기 위한 방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19장의 ‘므나 비유’에서 말씀하십니다. 26절입니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도가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지 못하면, 그 놀고 있는 달란트를 빼앗아서 일 잘 하는 사람에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자신의 달란트를 잘 사용하고 있습니까? 혹시 엉뚱한 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만 실천을 게을리 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복을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죄와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말씀 속의 행복을 차지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본문 말씀은 대단히 심각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열려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 닫혀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본문12절에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에 적용하신 법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시편49:20절에서,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깨닫지 못한다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고사성어 중에 ‘부중지어(釜中之魚)’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솥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유래를 보면,
중국 한나라 때에 광능군 태수가 된 ‘장강’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수가 부임해 보니 관내에 백성을 괴롭히는 도적 떼가 말썽이었습니다. 태수는 결심을 하고 도적 떼들이 있는 산채로 찾아가서 두목을 만나 인간의 도리로 설득을 했습니다. 태수의 말에 도적 두목이 깊은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떼를 지어 도적질하므로 목숨을 이어왔지만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솥 안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아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압니다.”
라고 하면서 생활을 청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장차 삶아져서 먹힐 것도 모르고 솥 안에서 헤엄치며 놀고 있는 물고기’처럼, 어리석은 인생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처한 입장이 어떠한지 알지도 못한 채 한가롭게 노니는 어리석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인생의 비극이겠지요.
이런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노아를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더니 결국 홍수로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는 천사들을 헤치려하던 소돔과 고모라도 심판을 전하는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유황불이 비처럼 내려 멸망을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그러합니다. 우리 인생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비웃습니다. 그 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과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로 깨어있어야 함을 권고하지만, 일부 성도들도 늘 들어왔던 이야기 중의 하나쯤으로 여겨버립니다. 주님은 누차 주님의 재림이 도적이 틈을 타듯, 번개가 동에서 서로 번쩍임 같이 순식간에 그리고 은밀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도들마저 감각이 둔하여져서 어제처럼 오늘을 살고, 오늘처럼 내일을 기대하며 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성도라면 모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본문 말씀이 분명하게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무리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그 비유를 풀어서 뜻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느냐?’는 질문에 주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을 구별하셨겠습니까? 군중들이나 제자들 모두가 같은 눈을 가졌고, 같은 귀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보고 똑같이 듣는데 제자들에게는 밝히 알려지고 군중들에게는 숨겨질 수 있단 말입니까?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소수의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더 깊이 알도록 하시면서, 더 많은 군중들에게는 의미를 닫아버리셔서 구원의 길을 막아버리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인류 모두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하신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구별하신 제자들이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군중들은 주님을 따르기는 하지만은 주님을 향한 고백이 없으며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6:26절에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36절에서는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고 무리들의 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깨달음이 허락되지 않은 무리들에 대하여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말씀을 인용하셔서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욕심이 앞서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도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습니다. 설령 깨달아진다고 한들 자기 욕심에 막혀서 삶의 열매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밭’에 해당하는 마음입니다.
가정을 꾸민지 한 달도 채 안되는 신혼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육군 대위이며 나이는 서른 정도였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고, 오직 자신이 성실하게 살면 만사가 다 형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은 꿈을 꾸는데, 자신은 차 운전도 못하는데 차를 의젓이 몰고 가더랍니다. 즐겁게 달리고 있는데 앞에서 커다란 괴물 같은 것이 나와 차와 부딪히는 바람에 놀라서 깼습니다. 꿈이 너무 선명해서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웠습니다. 그런데 아내도 몸부림을 치면서 깼습니다. 꿈 이야기를 하니까 그 아내도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괴물 같은 황소가 남편의 허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 살려라.’고 소리를 치고 있는데, 그 때 남편이 깨워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차 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운전병에게 여러 번 ‘조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날은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시내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사고가 나서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이었는데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중상이었습니다. 그 후에 치료를 받고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 된 후에 강원도 양구로 전근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옆집에 사는 권사님이 교회에 가자고 권했습니다. 그렇잖아도 건강 때문에 불안하고 무엇이든 잡고 싶은 마음에 두말하지 않고 따라갔습니다. 그 후 사단장이 새로 부임했는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단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매주일 부대 교회에 열심히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듣게 되고, 듣다 보니까 깨달음이 오고, 말씀이 깨달아지니까 말씀을 상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령까지 있다가 제대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사고를 통하여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고 이전에도 다섯 번이나 사고를 당했는데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깨달은 후에야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였는데 자신이 깨닫지 못하니까 계속 어려운 일들이 있었음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일찍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빨리 깨닫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에 콩깍지가 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는 자신의 관심이 한 곳으로 집중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빗대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세상적인 마음과 악한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고 있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들리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서두에서 말씀드린 본문12절을 풀어보고 마치겠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왜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되겠습니까?
이 말씀이 동식물의 세계에는 ‘약육강식’이며 ‘적자생존’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성결과 결실의 법칙’입니다. 요한복음15:2절을 봅시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11:17절 이하에서, 선민인 이스라엘이 참 감람나무이지만 열매가 없으므로 꺾임을 당하고,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참 감람나무 줄기에 접붙임을 밭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열매가 없는 가지를 잘라버리십니다. 열매는 없으면서 줄기의 진액을 헛되이 낭비하기 때문에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열매 맺는 가지가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줄기의 진액이 열매로 집중되게 하기 위한 방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19장의 ‘므나 비유’에서 말씀하십니다. 26절입니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도가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지 못하면, 그 놀고 있는 달란트를 빼앗아서 일 잘 하는 사람에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자신의 달란트를 잘 사용하고 있습니까? 혹시 엉뚱한 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만 실천을 게을리 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복을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죄와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말씀 속의 행복을 차지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