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쁨 나의 소망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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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8-25 21:38
♡♥♡ 나의 기쁨 나의 소망 / 로마서 5:1-11
*** 들어가는 말
찬송가 82장 1절만 불러봅시다.
우리가 이렇게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세상의 끔찍한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서 영원한 생명이 잉태된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서 죄로 인하여 죽었던 생명이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본문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우리의 전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전부라면 슬픔과 절망뿐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우리에게 십자가와 같은 환난과 고통만 있다면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것이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며 성도를 위한 영광의 보증입니다. 고린도전서15: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하심은 우리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며 예배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믿는다면 이것보다 더 헛된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영원한 생명의 삶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세상에서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인내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면 그에 맞추어 우리의 생각도 생활도 바뀌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사사건건 반대하는 성도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다가 목사님이 ‘안 되겠다. 내가 기도로 저 사람을 고치든지, 아니면 내보내야겠다.’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 날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 성도를 변하게 해주십시오. 아니면 스스로 나가게 해주세요.”
이렇게 몇 날 며칠을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얘야, 그 아무개가 사람 될 것 같으냐? 그 사람 절대로 사람 안 된다. 그 사람 바꾸려다가는 네가 죽는다. 나도 그 사람 못 바꾼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런데 그 사람 내 나라에는 올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목사님은 “천국에는 갈 수 있겠지요. 예수님을 믿었잖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래, 네 말이 맞다. 사람은 못 되었지만 내가 내 피로 씻어서 은혜로 엎고 천국에 데려가겠다. 내가 데리고 갈 사람인데 네가 그냥 두고 좀 봐 주면 안 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참, 나는 아직 너도 못 바꾸었다.”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주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것으로 서로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힘써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기쁨과 소망이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생활이 되겠습니까?
1.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본문1절을 같이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서로의 뜻이 맞아야 하듯이,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내 마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요한복음14:2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평안이 샘물처럼 솟아나게 됩니다. 요14: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평화의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친분을 유지하게 되면 삶에 평안이 넘치게 됩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마음의 평안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합니다. 왜 화해가 필요합니까? 우리 사람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결별하는 죽음이 왔습니다. 하나님과 결별하는 영의 죽음은 세상에서 모든 평화를 빼앗아 갔습니다. 싸움과 전쟁과 고통과 죽음이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사람의 괴로움을 보신 하나님께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에베소서2:16,17절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가 원수지간을 친구로 만드는 화해의 다리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다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은 ‘회개’동반합니다. ‘어거스틴’이 회개한 후 감격에 넘쳐 소리쳤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는 참된 평안이 없나이다.”그렇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는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회개란 어떤 것입니까? 회개란, 우리의 모든 죄악과 담을 쌓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와 습관을 그대로 가진 채, 입술로만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은 결코 회개가 아닙니다. 탕자가 허랑방탕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세상의 헛된 습관과 죄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한 번 화해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평화를 계속적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더러운 습관과 죄악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빼앗지 못하도록 기도하며 영적인 싸움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4:6,7절을 봅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가만히 앉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차지하게 됩니다(마11:12,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그러므로 끊임없는 기도와 영적인 싸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평안을 지켜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통하여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만 참된 평화가 주어집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한 것은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영원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결코 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며 그 평화를 누리는 것이 우리의 기쁨과 소망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2.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기쁨’입니다. 기쁨은 마음의 평안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삶의 기쁨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두 번째가 ‘희락’ 즉 ‘기쁨’이며, 세 번째가 ‘화평’입니다. 이 화평과 기쁨은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며,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4: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고, 15:11절에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평안과 기쁨으로 말미암는 생활의 즐거움이 넘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즐거움은 세상적인 것이 충족되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은 세상의 환경과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루어지는 생의 즐거움은 하나님과의 친근한 관계가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환난’때입니다.
삶이 평온한 평상시에는 모두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알곡 성도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생활에 어려움이 닥치고, 고난과 질병이 닥치면 진실한 신앙과 일시적인 신앙이 구별됩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던 성도는 비록 고통과 환난이 닥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평안과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9절-11절에서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깊은 신앙의 성장과 확실한 소망을 위하여 환난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영의 삶이 즐거움을 누리면 육신도 강건함을 누리게 됩니다. 현대인의 가장 심각한 질병의 원인을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세계 의학계에서도 현대인의 질병의 60-70%가 심리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잡한 세상에서 오는 생존경쟁의 부담이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대인들의 평안하지 못한 마음이 육신의 질병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래서 잠언17:22절에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평안과 기쁨은 육신의 생활과 신앙생활 모두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의 보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영과 육신의 모든 생활에 즐거움과 강건함을 이루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달려갑니까? 그리고 무엇이 여러분의 즐거움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이 세상의 것이라면 결코 영원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추구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세상 것인지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를 아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내가 추구하는 뜻대로 잘 되지 않을 때에도 마음이 평안하고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속상하고, 화가 나고, 불평과 원망이 쌓인다면 그것은 세상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것이 모두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한다면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일해야 합니다. 때로는 아픔과 어두운 그림자가 찾아온다 할지라도 나를 위하여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합시다.
이제 설립 8주년을 맞이하는 대복교회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루며, 하나님 나라를 푯대로 하는 확실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갑시다.
*** 들어가는 말
찬송가 82장 1절만 불러봅시다.
우리가 이렇게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세상의 끔찍한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서 영원한 생명이 잉태된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서 죄로 인하여 죽었던 생명이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본문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우리의 전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전부라면 슬픔과 절망뿐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우리에게 십자가와 같은 환난과 고통만 있다면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것이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며 성도를 위한 영광의 보증입니다. 고린도전서15: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하심은 우리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며 예배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믿는다면 이것보다 더 헛된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영원한 생명의 삶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세상에서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인내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면 그에 맞추어 우리의 생각도 생활도 바뀌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사사건건 반대하는 성도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다가 목사님이 ‘안 되겠다. 내가 기도로 저 사람을 고치든지, 아니면 내보내야겠다.’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 날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 성도를 변하게 해주십시오. 아니면 스스로 나가게 해주세요.”
이렇게 몇 날 며칠을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얘야, 그 아무개가 사람 될 것 같으냐? 그 사람 절대로 사람 안 된다. 그 사람 바꾸려다가는 네가 죽는다. 나도 그 사람 못 바꾼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런데 그 사람 내 나라에는 올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목사님은 “천국에는 갈 수 있겠지요. 예수님을 믿었잖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래, 네 말이 맞다. 사람은 못 되었지만 내가 내 피로 씻어서 은혜로 엎고 천국에 데려가겠다. 내가 데리고 갈 사람인데 네가 그냥 두고 좀 봐 주면 안 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참, 나는 아직 너도 못 바꾸었다.”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주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것으로 서로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힘써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기쁨과 소망이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생활이 되겠습니까?
1.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본문1절을 같이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서로의 뜻이 맞아야 하듯이,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내 마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요한복음14:2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평안이 샘물처럼 솟아나게 됩니다. 요14: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평화의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친분을 유지하게 되면 삶에 평안이 넘치게 됩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마음의 평안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합니다. 왜 화해가 필요합니까? 우리 사람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결별하는 죽음이 왔습니다. 하나님과 결별하는 영의 죽음은 세상에서 모든 평화를 빼앗아 갔습니다. 싸움과 전쟁과 고통과 죽음이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사람의 괴로움을 보신 하나님께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에베소서2:16,17절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가 원수지간을 친구로 만드는 화해의 다리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다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은 ‘회개’동반합니다. ‘어거스틴’이 회개한 후 감격에 넘쳐 소리쳤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는 참된 평안이 없나이다.”그렇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는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회개란 어떤 것입니까? 회개란, 우리의 모든 죄악과 담을 쌓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와 습관을 그대로 가진 채, 입술로만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은 결코 회개가 아닙니다. 탕자가 허랑방탕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세상의 헛된 습관과 죄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한 번 화해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평화를 계속적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더러운 습관과 죄악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빼앗지 못하도록 기도하며 영적인 싸움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4:6,7절을 봅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가만히 앉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차지하게 됩니다(마11:12,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그러므로 끊임없는 기도와 영적인 싸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평안을 지켜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통하여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만 참된 평화가 주어집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한 것은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영원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결코 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며 그 평화를 누리는 것이 우리의 기쁨과 소망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2.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기쁨’입니다. 기쁨은 마음의 평안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삶의 기쁨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두 번째가 ‘희락’ 즉 ‘기쁨’이며, 세 번째가 ‘화평’입니다. 이 화평과 기쁨은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며,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4: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고, 15:11절에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평안과 기쁨으로 말미암는 생활의 즐거움이 넘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즐거움은 세상적인 것이 충족되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은 세상의 환경과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루어지는 생의 즐거움은 하나님과의 친근한 관계가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환난’때입니다.
삶이 평온한 평상시에는 모두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알곡 성도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생활에 어려움이 닥치고, 고난과 질병이 닥치면 진실한 신앙과 일시적인 신앙이 구별됩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던 성도는 비록 고통과 환난이 닥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평안과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9절-11절에서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깊은 신앙의 성장과 확실한 소망을 위하여 환난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영의 삶이 즐거움을 누리면 육신도 강건함을 누리게 됩니다. 현대인의 가장 심각한 질병의 원인을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세계 의학계에서도 현대인의 질병의 60-70%가 심리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잡한 세상에서 오는 생존경쟁의 부담이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대인들의 평안하지 못한 마음이 육신의 질병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래서 잠언17:22절에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평안과 기쁨은 육신의 생활과 신앙생활 모두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의 보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영과 육신의 모든 생활에 즐거움과 강건함을 이루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달려갑니까? 그리고 무엇이 여러분의 즐거움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이 세상의 것이라면 결코 영원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추구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세상 것인지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를 아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내가 추구하는 뜻대로 잘 되지 않을 때에도 마음이 평안하고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속상하고, 화가 나고, 불평과 원망이 쌓인다면 그것은 세상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것이 모두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한다면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일해야 합니다. 때로는 아픔과 어두운 그림자가 찾아온다 할지라도 나를 위하여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합시다.
이제 설립 8주년을 맞이하는 대복교회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루며, 하나님 나라를 푯대로 하는 확실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