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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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8-18 20:48
♡♥♡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 예레미야 9:23-24
*** 들어가는 말
2002년 교회의 표어를 ‘주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라고 정하고 8개월여를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하여 힘써 왔던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알아야 하겠지요.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또는 어떤 것을 기뻐하시는지 주의 깊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기뻐하시는지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고 다만 나 자신의 필요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이솝의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숲에 왕 노릇하는 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자에게 늘 당하기만 하는 여우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저 사자를 숲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하고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꾀를 생각해내고는 사자에게 도전장을 보냈습니다.
“너 사자는 들어라! 이제부터 이 숲의 동물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나니까 사자는 그만 왕좌에서 내려오기를 바란다.”
사자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미심쩍어서 ‘동물들이 무서워하는 증거를 대라.’고 했습니다. 여우는 ‘나를 하루만 따라 다녀 보면 알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사자는 당장 여우의 뒤를 따라 숲을 다녀 보았습니다. 아, 그랬더니 정말 동물들이 여우를 보고 줄행랑을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토끼며 노루는 물론이고, 곰과 멧돼지도 도망을 쳤습니다. 여우보다 힘도 세고 덩치도 큰 동물들이 모두 슬금슬금 도망을 쳤습니다. 이것을 본 사자는 저 여우에게 뭔가 막강한 힘이 생겼다고 생각을 하고는 그만 짐을 사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이 도망간 것은 여우 때문이 아니라, 여우 뒤를 따라 다니는 사자를 보고 도망간 것이지요. 즉 여우가 다른 맹수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사자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힘과 능력과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잘 사는 줄로 생각하고 교만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아니면 여우가 사자를 이용한 것처럼, 사람들이 꾀를 내어 하나님을 교묘히 이용하려 들기도 합니다. ‘믿음’을 빌미로 하여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 하거나, ‘신앙’을 이익의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1. 본문의 배경을 봅시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이 들어있는 예레미야9장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남 유다의 죄악을 고발하며,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는 남 유다의 죄악상을 열거하면서 바벨론에 의하여 비참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당시의 남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방의 온갖 우상들을 끌어들여 숭배했습니다. 그러기에 당연히 하나님께 대한 제사는 외식과 거짓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민으로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힘들고 어려움을 당할 때나 이방의 침략을 당할 때에는 곧잘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구원과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숱한 배반에도 불구하고 거듭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하여 유다에 위기가 닥쳤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기는커녕 평안한 현실에 빠져 자기들의 지혜와 힘과 부를 자랑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없이도 평안하고 부를 누리는데 하나님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이용한 것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징벌을 선언하셨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제 남은 유다까지 멸망해버리면 이스라엘은 역사상에서 그 존재가 끊어질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과 기뻐하시는 일을 눈물로 선포하면서 유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주 짧게 기록된 본문에서 비록 일부분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세상 자랑을 싫어하십니다.
자랑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망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랑하고 싶은 것은 사람의 심리입니다. 남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든지, 새로운 것을 샀을 때에 자랑하고 싶어서 은근 슬쩍 내비치지 않습니까?
선교원 아이들이 아침에 등원해서 교회에 막 도착했을 때입니다. 한 남자 꼬마가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몸을 꼬면서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녀석 빨리 안 들어가!’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이의 몸짓이 좀 수상쩍어서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아이는 자꾸만 한 쪽 발을 땅바닥에 비벼대며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신발이 새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발 새로 샀어?’라고 물었더니, 표정이 밝아지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입니다.
새로 산 자기 운동화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랑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습니다. 세상의 자랑에는 별의 별 것이 다 있습니다. 자랑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입니다. 성도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신앙간증’이라는 명목으로 공공연하게 자랑하기도 하며, 감사헌금의 봉투에 ‘감사 명목’으로 적어서 은근히 자랑하기도 합니다. 명함에 더 쓸 곳이 없도록 감투로 빼곡히 채워놓은 목회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인 자랑을 싫어하십니다. 왜 자랑을 싫어하십니까? 요한일서2:16절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자랑이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4:7절입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처럼 자랑하는 것은 ‘위선’이고, ‘교만’입니다.
우리가 자랑하지 않아야 할 이유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27:1절입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1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세상의 대표적인 자랑거리로 지혜와 용맹과 부함을 꼽았습니다. 특히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끄는 재물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요주의 대상입니다. 부자는 항상 재물을 힘으로 삼습니다. 오죽했으면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재물이 자신을 지켜주고 보호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철학자 베이컨의 말을 인용하면, “돈은 좋은 하인도 되지만 나쁜 주인도 된다.”고 했고, 러시아 격언 중에는 “돈이 말할 때 진리는 침묵한다.”고 했습니다. 돈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이 확실합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지혜와 힘과 부함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리지 못합니다. 시편50:10-12절입니다.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사람이 능력 있는 것 같아도 식물인간이 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3.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본문24절에서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 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행하시는 분이신지를 깨달아 아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의 신분을 아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나 자신의 주인이시며 구원자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이며, 하나님으로 인하여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을 때에는 자기 자랑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사역 초기부터 자신에 대하여‘사도’라는 명칭을 자연스럽게 사용했습니다. 그때 ‘바울 너는 사도가 아니지 않느냐?’라는 주변 사람들의 의혹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도 분명히 사도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사역초기의 서신(55-57년)인 고린도전서9:2절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 했으며, 고린도후서12:11절에서는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 자신의 사도됨을 항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복음으로 인하여 투옥된 후에 기록(61-63년)한 에베소서3:8절에서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라고 했으며, 사역이 끝나가던 때에 기록한 디모데전서1:15절에서는 “…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큰 소리 잘치고 잘난 척 잘하던 베드로도 주님을 깊이 알아가면서 겸손해지고 낮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나에게 있어서 어떤 분이심을 깨닫게 될 때에 사람은 겸손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깨닫게 되면 겸손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자하신 사랑과 공평과 정직을 인간 세상에 행하신다.’는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그 일을 행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행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성도들을 만나게 되고 성도들의 생활을 보게 됩니다. 성도들의 사랑과 공평과 정직한 생활을 보고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5: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생활 속에서 그렇게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유다가 멸망당하던 시대보다 결코 더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멸망의 길에서 돌아서라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음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부질없는 세상의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알고 그 길로 순종하며 따라가는 복된 생명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2002년 교회의 표어를 ‘주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라고 정하고 8개월여를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하여 힘써 왔던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알아야 하겠지요.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또는 어떤 것을 기뻐하시는지 주의 깊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기뻐하시는지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고 다만 나 자신의 필요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이솝의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숲에 왕 노릇하는 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자에게 늘 당하기만 하는 여우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저 사자를 숲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하고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꾀를 생각해내고는 사자에게 도전장을 보냈습니다.
“너 사자는 들어라! 이제부터 이 숲의 동물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나니까 사자는 그만 왕좌에서 내려오기를 바란다.”
사자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미심쩍어서 ‘동물들이 무서워하는 증거를 대라.’고 했습니다. 여우는 ‘나를 하루만 따라 다녀 보면 알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사자는 당장 여우의 뒤를 따라 숲을 다녀 보았습니다. 아, 그랬더니 정말 동물들이 여우를 보고 줄행랑을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토끼며 노루는 물론이고, 곰과 멧돼지도 도망을 쳤습니다. 여우보다 힘도 세고 덩치도 큰 동물들이 모두 슬금슬금 도망을 쳤습니다. 이것을 본 사자는 저 여우에게 뭔가 막강한 힘이 생겼다고 생각을 하고는 그만 짐을 사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이 도망간 것은 여우 때문이 아니라, 여우 뒤를 따라 다니는 사자를 보고 도망간 것이지요. 즉 여우가 다른 맹수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사자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힘과 능력과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잘 사는 줄로 생각하고 교만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아니면 여우가 사자를 이용한 것처럼, 사람들이 꾀를 내어 하나님을 교묘히 이용하려 들기도 합니다. ‘믿음’을 빌미로 하여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 하거나, ‘신앙’을 이익의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1. 본문의 배경을 봅시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이 들어있는 예레미야9장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남 유다의 죄악을 고발하며,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는 남 유다의 죄악상을 열거하면서 바벨론에 의하여 비참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당시의 남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방의 온갖 우상들을 끌어들여 숭배했습니다. 그러기에 당연히 하나님께 대한 제사는 외식과 거짓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민으로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힘들고 어려움을 당할 때나 이방의 침략을 당할 때에는 곧잘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구원과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숱한 배반에도 불구하고 거듭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하여 유다에 위기가 닥쳤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기는커녕 평안한 현실에 빠져 자기들의 지혜와 힘과 부를 자랑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없이도 평안하고 부를 누리는데 하나님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이용한 것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징벌을 선언하셨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제 남은 유다까지 멸망해버리면 이스라엘은 역사상에서 그 존재가 끊어질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과 기뻐하시는 일을 눈물로 선포하면서 유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주 짧게 기록된 본문에서 비록 일부분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세상 자랑을 싫어하십니다.
자랑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망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랑하고 싶은 것은 사람의 심리입니다. 남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든지, 새로운 것을 샀을 때에 자랑하고 싶어서 은근 슬쩍 내비치지 않습니까?
선교원 아이들이 아침에 등원해서 교회에 막 도착했을 때입니다. 한 남자 꼬마가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몸을 꼬면서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녀석 빨리 안 들어가!’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이의 몸짓이 좀 수상쩍어서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아이는 자꾸만 한 쪽 발을 땅바닥에 비벼대며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신발이 새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발 새로 샀어?’라고 물었더니, 표정이 밝아지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입니다.
새로 산 자기 운동화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랑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습니다. 세상의 자랑에는 별의 별 것이 다 있습니다. 자랑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입니다. 성도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신앙간증’이라는 명목으로 공공연하게 자랑하기도 하며, 감사헌금의 봉투에 ‘감사 명목’으로 적어서 은근히 자랑하기도 합니다. 명함에 더 쓸 곳이 없도록 감투로 빼곡히 채워놓은 목회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인 자랑을 싫어하십니다. 왜 자랑을 싫어하십니까? 요한일서2:16절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자랑이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4:7절입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처럼 자랑하는 것은 ‘위선’이고, ‘교만’입니다.
우리가 자랑하지 않아야 할 이유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27:1절입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1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세상의 대표적인 자랑거리로 지혜와 용맹과 부함을 꼽았습니다. 특히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끄는 재물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요주의 대상입니다. 부자는 항상 재물을 힘으로 삼습니다. 오죽했으면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재물이 자신을 지켜주고 보호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철학자 베이컨의 말을 인용하면, “돈은 좋은 하인도 되지만 나쁜 주인도 된다.”고 했고, 러시아 격언 중에는 “돈이 말할 때 진리는 침묵한다.”고 했습니다. 돈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이 확실합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지혜와 힘과 부함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리지 못합니다. 시편50:10-12절입니다.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사람이 능력 있는 것 같아도 식물인간이 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3.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본문24절에서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 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행하시는 분이신지를 깨달아 아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의 신분을 아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나 자신의 주인이시며 구원자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이며, 하나님으로 인하여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을 때에는 자기 자랑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사역 초기부터 자신에 대하여‘사도’라는 명칭을 자연스럽게 사용했습니다. 그때 ‘바울 너는 사도가 아니지 않느냐?’라는 주변 사람들의 의혹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도 분명히 사도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사역초기의 서신(55-57년)인 고린도전서9:2절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 했으며, 고린도후서12:11절에서는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 자신의 사도됨을 항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복음으로 인하여 투옥된 후에 기록(61-63년)한 에베소서3:8절에서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라고 했으며, 사역이 끝나가던 때에 기록한 디모데전서1:15절에서는 “…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큰 소리 잘치고 잘난 척 잘하던 베드로도 주님을 깊이 알아가면서 겸손해지고 낮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나에게 있어서 어떤 분이심을 깨닫게 될 때에 사람은 겸손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깨닫게 되면 겸손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자하신 사랑과 공평과 정직을 인간 세상에 행하신다.’는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그 일을 행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행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성도들을 만나게 되고 성도들의 생활을 보게 됩니다. 성도들의 사랑과 공평과 정직한 생활을 보고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5: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생활 속에서 그렇게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유다가 멸망당하던 시대보다 결코 더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멸망의 길에서 돌아서라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음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부질없는 세상의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알고 그 길로 순종하며 따라가는 복된 생명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