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날 보기를 원하십니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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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8-10 21:54
♡♥♡ 좋은 날 보기를 원하십니까? / 벧전3:8-12
*** 들어가는 말
이 저녁의 말씀도 오전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삶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8,9절은 오전의 말씀과 내용이 같습니다. 10,11절은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선악 간에 살피고 계신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중해에 있는 ‘키프로스’(성경지명은 ‘구브로’) 기지는 군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이 섬만 뺏으면 지중해를 장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키프로스를 장악하기 위하여 공격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날씨가 흐리고 폭우가 쏟아지면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도록 안개가 낀 날을 택하여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잠수정을 타고 해안으로 잠입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도 분간할 수 없도록 어둡고 흐렸습니다. 아무리 철통같이 수비를 한다고 해도 침투하는 적을 분간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그런 날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격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침투하는 바로 코앞에서 키프로스 수비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사로잡히고 난 후에야 왜 그렇게 일찍 사로잡혔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키프로스 기지에 있는 레이더 때문이었습니다. 최신형인 그 레이더에는 침투하는 적들의 양말 줄무늬까지 환히 보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눈과 귀와 얼굴이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만든 기계에도 밝고 어두움에 관계없이 사람의 행위가 드러나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생각하는 것까지 말입니다.
이렇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역시 본문에서는 ‘복을 유업으로 받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시는 복은 ‘생명’과 ‘좋은 날’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생명과 좋은 날’이란, 인간의 현세적인 축복, 즉 장수와 번영과 명성, 재해로부터의 해방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확실한 현재와 미래의 삶을 가지고 있는 성도가 현재의 삶을 형편없이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세상에 밀려다니는 그런 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한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본문에서는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혀를 금하여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10절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이 복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한다면, 무엇보다도 혀를 조심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교묘하게 속이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혀의 위력에 대하여 성경은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3:6절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不義)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했으며, 8절에서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잠언18:21절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몸에서 아주 작은 부분인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믿음을 지켜서 생명과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혀를 통제하여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12:36-37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는 우리의 모든 말까지 기록되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4:29절에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짧은 날 동안 감사의 말과 격려와 위로와 도움을 베푸는 말을 합시다. 한 우물에서 단물과 쓴물이 날 수 없듯이, 한 입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과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는 더러운 말이 함께 나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2.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합니다.
‘악에서 떠나’라고 하는 말은 ‘악에서 돌아서라.’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를 대적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악한 사람들에게 그들과 똑같이 악으로 대하지 말고, 그 곳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9절에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12:21절에서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적극적인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삶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로마 총독에게 넘겨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유대인들과 채찍질하고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군병들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날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제자가 랍비에게 질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이 기도하고 바른 행동을 하도록 주위 사람들을 강하게 이끌지 않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랍비가 반문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행하며 바로 살도록 권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자 제자가 따지듯이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악한 일로 끌어들이는 힘이 훨씬 강하며, 또 사람을 자기들의 패거리로 만들어 악한 힘을 키우려 할 때는 우리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랍비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른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은 혼자 걷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혼자 걷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이든 하나님의 심판이든 어두움이든 빛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합니다. 이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없다면 좋은 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3.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화평을 구하고 따라야 합니다.
‘화평을 구하고 좇으라.’는 말은 생활 속에서 화평을 추구하고 적극적으로 실행하라는 말씀입니다. 화평을 추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팔복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는다.’고 하셨으며, 고린도후서5:18,19절에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이시며, ‘평화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가는 곳에는 불화가 아니라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머무는 곳에는 화목이 있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12: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성도가 하나를 이루기를 원하시며,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부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이룹시다.
*** 들어가는 말
이 저녁의 말씀도 오전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삶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8,9절은 오전의 말씀과 내용이 같습니다. 10,11절은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선악 간에 살피고 계신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중해에 있는 ‘키프로스’(성경지명은 ‘구브로’) 기지는 군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이 섬만 뺏으면 지중해를 장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키프로스를 장악하기 위하여 공격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날씨가 흐리고 폭우가 쏟아지면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도록 안개가 낀 날을 택하여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잠수정을 타고 해안으로 잠입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도 분간할 수 없도록 어둡고 흐렸습니다. 아무리 철통같이 수비를 한다고 해도 침투하는 적을 분간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그런 날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격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침투하는 바로 코앞에서 키프로스 수비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사로잡히고 난 후에야 왜 그렇게 일찍 사로잡혔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키프로스 기지에 있는 레이더 때문이었습니다. 최신형인 그 레이더에는 침투하는 적들의 양말 줄무늬까지 환히 보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눈과 귀와 얼굴이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만든 기계에도 밝고 어두움에 관계없이 사람의 행위가 드러나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생각하는 것까지 말입니다.
이렇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역시 본문에서는 ‘복을 유업으로 받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시는 복은 ‘생명’과 ‘좋은 날’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생명과 좋은 날’이란, 인간의 현세적인 축복, 즉 장수와 번영과 명성, 재해로부터의 해방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확실한 현재와 미래의 삶을 가지고 있는 성도가 현재의 삶을 형편없이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세상에 밀려다니는 그런 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한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본문에서는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혀를 금하여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10절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이 복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한다면, 무엇보다도 혀를 조심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교묘하게 속이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혀의 위력에 대하여 성경은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3:6절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不義)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했으며, 8절에서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잠언18:21절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몸에서 아주 작은 부분인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믿음을 지켜서 생명과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혀를 통제하여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12:36-37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는 우리의 모든 말까지 기록되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4:29절에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짧은 날 동안 감사의 말과 격려와 위로와 도움을 베푸는 말을 합시다. 한 우물에서 단물과 쓴물이 날 수 없듯이, 한 입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과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는 더러운 말이 함께 나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2.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합니다.
‘악에서 떠나’라고 하는 말은 ‘악에서 돌아서라.’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를 대적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악한 사람들에게 그들과 똑같이 악으로 대하지 말고, 그 곳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9절에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12:21절에서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적극적인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삶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로마 총독에게 넘겨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유대인들과 채찍질하고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군병들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날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제자가 랍비에게 질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이 기도하고 바른 행동을 하도록 주위 사람들을 강하게 이끌지 않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랍비가 반문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행하며 바로 살도록 권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자 제자가 따지듯이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악한 일로 끌어들이는 힘이 훨씬 강하며, 또 사람을 자기들의 패거리로 만들어 악한 힘을 키우려 할 때는 우리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랍비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른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은 혼자 걷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혼자 걷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이든 하나님의 심판이든 어두움이든 빛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합니다. 이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없다면 좋은 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3.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화평을 구하고 따라야 합니다.
‘화평을 구하고 좇으라.’는 말은 생활 속에서 화평을 추구하고 적극적으로 실행하라는 말씀입니다. 화평을 추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팔복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는다.’고 하셨으며, 고린도후서5:18,19절에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이시며, ‘평화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가는 곳에는 불화가 아니라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머무는 곳에는 화목이 있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12: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성도가 하나를 이루기를 원하시며,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부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이룹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