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삶의 조화와 리듬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148회 작성일 2002-08-03 15:55
♡♥♡ 삶의 조화와 리듬 / 요20:24-29

*** 들어가는 말

살아있는 생명체에는 ‘생체리듬’이 있습니다. 사람을 예로 든다면, 몸의 각 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조절 능력입니다. 이 생체리듬은 온도나 기후, 환경에 따라서 스스로를 맞추어갑니다. 그러나 갑자기 어떤 변화가 생긴다든지 전혀 알지 못하는 환경이나 일이 주어지면 리듬이 깨어지고 생활의 조화가 깨어지게 됩니다. 사람은 생활의 조화나 리듬이 깨어지면 불안해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그만큼 연약한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팡세’에서는 “인간은 오르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생활에서 조화와 리듬을 강조한 것입니다.

조화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자신과의 조화가 있고, 이웃(자연)과의 조화가 있고, 하나님과의 조화가 있습니다. 나 스스로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거나 정직하지 못하면 다른 어떤 것과도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조화를 이루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기본적인 틀입니다.

내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자기인정’이며 ‘자기조화’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1:8-10절에서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조화’에 있어서는 마태복음5:23-24절에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조화’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순복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4:9-10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 세 가지의 조화가 잘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로 향하는 신앙은 든든하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조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이름을 ‘도마’라고 합니다. ‘도마!’ 여러분은 이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많은 성도들이 ‘의심 많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인 것을 요구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오히려 ‘확실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증거를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하는, 체험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도마의 신중한 성격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일단 확신을 갖기만 하면 진심으로 그 진리를 따랐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전도자로서 인도에 갔으며, 그곳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마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조화를 돌아봅시다.

1. 깨닫지 못한 마음과 즉흥적인 행동이 조화를 깨뜨립니다.

요한복음11:1-44절에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이적과 주변정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1-16절에는 죽은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에 도착하기 전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위협을 피하여 요단강 건너편 광야 쪽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가 중병에 들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갈을 받고서도 이틀이나 더 계시다가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선생님,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여 이곳으로 피해 왔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합니까?”라고 만류했습니다. 제자들의 반대가 심하자 예수님은 의도를 밝히셨습니다. “나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자고 있는 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시면서 ‘나사로에게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여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깨운단 말인가!’그때, 도마가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대단히 용감한 도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도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죽으러 가자.’고 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이니까 즉흥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 가운데도 ‘교회를 가지만 왜 가야하는지’를 모르면서 교회에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왜 믿어야 하는지, 왜 헌금하고, 왜 봉사하고, 왜 헌신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그냥 따라하는 경우나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신앙은 결코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신앙은 결코 남을 따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깨닫고, 목적과 의미를 분명히 가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2.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 조화를 깨뜨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한껏 꿈에 부풀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이해시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실 것이라는 꿈에 잠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4:2-4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이며, 처소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조차 확실하게 몰랐던 제자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또 도마가 나섭니까. “선생님,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제자들도 도마도 예수님의 신분과 능력과 하시는 일을 이해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급기야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증명을 요구했습니다.

제자들이나 도마의 의문이 오늘의 많은 성도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도마는 정직했습니다. 도마의 의문은 불신에서가 아니라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도마만 모른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제자들이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가 따르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계신지를 모른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진리를 따르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은 길을 모르면서도 무작정 길을 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진리는 삶을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이 기둥이 없으면 삶이 조화를 이루기는커녕 삶을 지탱할 수조차 없게 됩니다. 여러분이 따르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여러분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3.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함이 조화를 깨뜨립니다.

도마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도마는 실의에 빠져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 나타나셨던 다락방 집회에는 도마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도마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조화를 잃은 삶은 더 이상 인생의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도마가 제자들이 있는 곳에 왔을 때, 그들이 ‘자신들은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전혀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단언합니다.

오늘 많은 교인들이 도마와 같은 불신과 의심에 빠져있습니다. 불신과 의심은 신앙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독초와 같습니다. 야고보서1:6-8절에서 ‘의심은 바람에 출렁이는 물결과 같이 정함이 없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도마보다 더 심각합니다. 도마는 불신을 품었지만 정직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일부는 불신도 의심도 깨닫지 못함도 정직하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안 그런 척, 안 그래도 그런 척. 병자가 의사에게 아픈 곳과 증상을 소상하게 이야기해야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있고 치료를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많은 신앙인들이 변명에 능합니다. 어떤 성도는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로 늘 피곤하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이유는 야구나 축구 중계도 보고 싶고, 어디 다른 곳에 일을 보러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대한 무관심을 너무 피곤하다는 말로 대신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는 통할는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다락방 집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즉 은혜의 자리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만날 기회를 잃었습니다. 이는 삶의 기쁨과 평강의 기회를 잃은 것입니다. 만일 주님을 만났더라면 그는 실의에 빠지거나 낙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않는 것은 조화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변명거리를 늘어놓는 만큼 잃어버리는 것도 많고, 내 소망이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도마는 절망적으로 의심에 잠겨 있었지만 확신을 가지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신앙의 길을 지켜갔던 사람이었습니다.

진리를 깨닫고 알기를 힘쓰며, 깨달은 진리를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신앙과 삶을 조화롭게 하는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바로 알고 지키는 것이 조화를 이루며 삶의 리듬을 최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자신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조화를 이루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조화를 이루어서 고귀한 신분에 걸맞는 신앙과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Total 1,419건 82 페이지 RSS
설교모음 목록
No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204
나를 따라오너라.
  • 배의신
  • 09-01
  • 6704
203
깨닫는 자의 행복
  • 배의신
  • 08-25
  • 6219
202
나의 기쁨 나의 소망
  • 배의신
  • 08-25
  • 7797
201
기회를 잡아라.
  • 배의신
  • 08-18
  • 8278
200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 배의신
  • 08-18
  • 6904
199
좋은 날 보기를 원하십니까?
  • 배의신
  • 08-10
  • 6205
198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십시오.
  • 배의신
  • 08-10
  • 5935
197
마음이 상할 때
  • 배의신
  • 08-03
  • 7650
삶의 조화와 리듬
  • 배의신
  • 08-03
  • 7149
195
최상의 상급
  • 배의신
  • 07-27
  • 7679
194
쓰임 받는 일군들
  • 배의신
  • 07-27
  • 7053
193
이변은 없습니다.
  • 배의신
  • 07-21
  • 6301
192
승리자의 삶
  • 배의신
  • 07-21
  • 7547
191
현실 속에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
  • 배의신
  • 07-13
  • 6215
190
사랑의 열병
  • 배의신
  • 07-13
  • 6968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