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은 없습니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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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7-21 17:17
♡♥♡ 이변은 없습니다. / 계22:10-15
*** 들어가는 말
‘묵시서’ 라고 하면, 대부분의 의미들이 닫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묵시서인 계시록의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요한에게 책을 열어놓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책이 열려 있다함은 누구든지 예언의 말씀을 읽고 깨달을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음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말씀의 길을 열어 놓은 이유는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때란, 곧 예수님의 재림의 때입니다.
루이스(C. S. Lewis)가 쓴 ‘엄청난 이혼’ (The Great Divorce)이라는 제목의 우화적인 작품이 있습니다. 내용은 지옥의 장면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뜨겁고, 날마다 비가오고, 언제나 어두운 거리입니다. 하루도 거기에 살고 싶지 않은 환경입니다. 그러나 빛나는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이 마련하셨습니다. 천국행 정기 버스(Shuttle Bus)를 보내신 것입니다. 매 시간마다 떠나기 때문에 기회는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천국행 버스를 타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버스 정거장에 시간 맞추어 나옵니다. 그러나 버스에 올라타지를 않습니다. 요금은 무료이기 때문에 누구나 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거장에 나와 버스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저쪽으로 가면 못할 일이 많아진다. 남의 흉을 보던 즐거움도 없어지고, 약간의 재주로 어리석은 인간들의 박수를 받고 보스 노릇할 만족도 없어진다. 지위노름(status game)이 거기서는 안 된다. 자랑할 수도 으쓱댈 수도 없는 세상에 무엇 때문에 가는가?…”
그래서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쯤 정거장에만 나왔다가 버스는 타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 가지 예고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정기버스가 운행 중지 되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우화에서처럼, 지금 이 세상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찾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세상의 쾌락과 부귀영화에서 쉽게 돌아서지 못하여 망설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마지막 무렵에 가서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에서는 극적인 반전(反轉)이나 이변(異變)들이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이변들이 일어났습니다. 월드컵 본선에 처음 출전한 ‘세네갈’이 직전 우승국을 꺽은 것이나, 우리나라가 4강에 오른 것이나, 모두 대단한 이변들입니다. 또한 이탈리아 전에서 종료 2분여를 남겨두고 동점골을 넣고, 연장전에서 골든 골을 넣는 것 같은 극적인 반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서는 이런 극적인 반전이나, 전혀 예상을 뒤엎는 이변들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이나 십자가상의 한 강도처럼 영적인 이변이나 극적인 반전이 종말이 가까울수록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11절입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변과 반전이 없을 것임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의 극적인 반전이나 이변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권세가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본문12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일한 대로 받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1. 기회가 있을 때에 두루마기를 빨아야 합니다.
본문14절에서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성도들이 자신의 행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씻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빤다.’는 말은 ‘어떤 환경에서도 예수님을 계속적으로 의지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함’을 말합니다.
이 복은 계시록의 일곱 복 중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의 복입니다. 즉 마지막 때에 깨어 있어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준비한 사람이 영생을 얻으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권세를 얻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렇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기회는 깨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하면서 게으름에 빠져있거나 세상에 젖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이 오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중국 당나라 때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안록산의 군대가 옹구성을 포위했습니다. 이때 옹구성의 수비대장은 ‘장순’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안록산의 반란군이 워낙 거세어서 옹구성이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장순은 묘책을 써서 모든 병사들에게 ‘짚으로 인형을 천개이상 만들어서 검정 옷을 입히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형들을 새끼줄에 엮어서 한밤중에 성 아래로 달아 내렸습니다.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안록산의 반란군은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내려오는 줄 알고 정신없이 활을 쏘았습니다. 한 참 지난 후 장순은 인형을 걷어 올리게 했고, 힘들이지 않고 인형에 꽂힌 수만 개의 화살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밤중에 장순은 500명의 정예군과 함께 줄을 타고 성을 내려갔습니다. 안록산의 반란군은 ‘또 속을 줄 아느냐?’는 듯 활을 쏘지 않고 비웃었습니다. 장순의 정예군은 단번에 안록산의 군대를 전멸시켰습니다.
우리의 대적인 사단의 무리들은 하와를 속이던 때처럼, 주님의 재림에 의심을 품게 만들고 평안하다고 안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지금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기회가 언제 갑자기 지나갈지 모릅니다.
2. 요행을 기대하지 말고 성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 하겠는데 지금은 아니고, 세상을 조금 더 즐기고 돈도 벌어놓은 후에 믿겠다.’고 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재림이 그렇게 여유롭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이나, 우리 인생의 종말은 어느 날 소리도 없고 예고도 없이 다가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준비하러 간 사이에 주님이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실컷 즐기고 하나님의 나라에도 들어가겠다는 요행심리는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11-12절에서 ‘불의한 자는 불의 한 대로, 더러운 자는 더러운 대로, 의로운 자는 의로운 대로, 거룩한 자는 거룩한 대로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심판대에서 그들의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대에서는 극적인 반전도 이변도 없습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의 성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의 죄목이 공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개들’을 제외한 다섯 부류의 사람들은 이미 21:8절에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할 자들’의 명단에 들어있습니다. ‘개들’은 성경에서 ‘더럽고 악한 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특히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낸다.’는 것은 사단의 속성입니다.
이런 것에 물들거나 동조하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스스로를 정결케 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2:20-2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우리 모두 요행을 기다리지 말고 믿음으로 깨어있어, 스스로 정결케 하여 마지막 때에 주님의 쓰심에 합당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묵시서’ 라고 하면, 대부분의 의미들이 닫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묵시서인 계시록의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요한에게 책을 열어놓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책이 열려 있다함은 누구든지 예언의 말씀을 읽고 깨달을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음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말씀의 길을 열어 놓은 이유는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때란, 곧 예수님의 재림의 때입니다.
루이스(C. S. Lewis)가 쓴 ‘엄청난 이혼’ (The Great Divorce)이라는 제목의 우화적인 작품이 있습니다. 내용은 지옥의 장면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뜨겁고, 날마다 비가오고, 언제나 어두운 거리입니다. 하루도 거기에 살고 싶지 않은 환경입니다. 그러나 빛나는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이 마련하셨습니다. 천국행 정기 버스(Shuttle Bus)를 보내신 것입니다. 매 시간마다 떠나기 때문에 기회는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천국행 버스를 타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버스 정거장에 시간 맞추어 나옵니다. 그러나 버스에 올라타지를 않습니다. 요금은 무료이기 때문에 누구나 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거장에 나와 버스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저쪽으로 가면 못할 일이 많아진다. 남의 흉을 보던 즐거움도 없어지고, 약간의 재주로 어리석은 인간들의 박수를 받고 보스 노릇할 만족도 없어진다. 지위노름(status game)이 거기서는 안 된다. 자랑할 수도 으쓱댈 수도 없는 세상에 무엇 때문에 가는가?…”
그래서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쯤 정거장에만 나왔다가 버스는 타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 가지 예고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정기버스가 운행 중지 되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우화에서처럼, 지금 이 세상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찾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세상의 쾌락과 부귀영화에서 쉽게 돌아서지 못하여 망설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마지막 무렵에 가서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에서는 극적인 반전(反轉)이나 이변(異變)들이 심심찮게 일어납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이변들이 일어났습니다. 월드컵 본선에 처음 출전한 ‘세네갈’이 직전 우승국을 꺽은 것이나, 우리나라가 4강에 오른 것이나, 모두 대단한 이변들입니다. 또한 이탈리아 전에서 종료 2분여를 남겨두고 동점골을 넣고, 연장전에서 골든 골을 넣는 것 같은 극적인 반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서는 이런 극적인 반전이나, 전혀 예상을 뒤엎는 이변들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이나 십자가상의 한 강도처럼 영적인 이변이나 극적인 반전이 종말이 가까울수록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11절입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변과 반전이 없을 것임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의 극적인 반전이나 이변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권세가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본문12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일한 대로 받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1. 기회가 있을 때에 두루마기를 빨아야 합니다.
본문14절에서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성도들이 자신의 행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씻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빤다.’는 말은 ‘어떤 환경에서도 예수님을 계속적으로 의지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함’을 말합니다.
이 복은 계시록의 일곱 복 중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의 복입니다. 즉 마지막 때에 깨어 있어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준비한 사람이 영생을 얻으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권세를 얻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렇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기회는 깨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하면서 게으름에 빠져있거나 세상에 젖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이 오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중국 당나라 때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안록산의 군대가 옹구성을 포위했습니다. 이때 옹구성의 수비대장은 ‘장순’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안록산의 반란군이 워낙 거세어서 옹구성이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장순은 묘책을 써서 모든 병사들에게 ‘짚으로 인형을 천개이상 만들어서 검정 옷을 입히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형들을 새끼줄에 엮어서 한밤중에 성 아래로 달아 내렸습니다.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안록산의 반란군은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내려오는 줄 알고 정신없이 활을 쏘았습니다. 한 참 지난 후 장순은 인형을 걷어 올리게 했고, 힘들이지 않고 인형에 꽂힌 수만 개의 화살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밤중에 장순은 500명의 정예군과 함께 줄을 타고 성을 내려갔습니다. 안록산의 반란군은 ‘또 속을 줄 아느냐?’는 듯 활을 쏘지 않고 비웃었습니다. 장순의 정예군은 단번에 안록산의 군대를 전멸시켰습니다.
우리의 대적인 사단의 무리들은 하와를 속이던 때처럼, 주님의 재림에 의심을 품게 만들고 평안하다고 안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지금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기회가 언제 갑자기 지나갈지 모릅니다.
2. 요행을 기대하지 말고 성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 하겠는데 지금은 아니고, 세상을 조금 더 즐기고 돈도 벌어놓은 후에 믿겠다.’고 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재림이 그렇게 여유롭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이나, 우리 인생의 종말은 어느 날 소리도 없고 예고도 없이 다가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준비하러 간 사이에 주님이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실컷 즐기고 하나님의 나라에도 들어가겠다는 요행심리는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11-12절에서 ‘불의한 자는 불의 한 대로, 더러운 자는 더러운 대로, 의로운 자는 의로운 대로, 거룩한 자는 거룩한 대로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심판대에서 그들의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대에서는 극적인 반전도 이변도 없습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의 성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의 죄목이 공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개들’을 제외한 다섯 부류의 사람들은 이미 21:8절에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할 자들’의 명단에 들어있습니다. ‘개들’은 성경에서 ‘더럽고 악한 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특히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낸다.’는 것은 사단의 속성입니다.
이런 것에 물들거나 동조하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스스로를 정결케 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2:20-2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우리 모두 요행을 기다리지 말고 믿음으로 깨어있어, 스스로 정결케 하여 마지막 때에 주님의 쓰심에 합당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