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을 삽시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226회
작성일
2002-10-26 15:45
♡♥♡ 사람의 마음을 삽시다. / 마5:13-16
*** 들어가는 말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많은 특징들 중에 공통적인 것 하나를 제시한다면, ‘군락’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같은 종류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도 이 현상은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가족공동체를 비롯하여 신앙, 직장, 지연, 학연, 취미 등. 여러 종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각자의 신분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가족공동체라고 하면, 아버지, 어머니, 자녀, 조부모, 친척 등의 신분들이 있을 것이며, 직장공동체에는 사장을 비롯하여 이사, 부장, 과장, 말단 공장근로자까지 많은 신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신분을 통하여 자신의 일을 합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알맞은 신분의 형성과 각 구성원들이 신분에 걸맞도록 일을 잘 감당해 나갈 때 가능합니다.
이런 전제를 두고 이시간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만, 이 시간에는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방향으로 말씀을 살펴볼까합니다.
본문 말씀은 “너희는”이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어느 특정한 부류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뒤따라오는 말씀들을 볼 때에 “너희”라고 지목된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즉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이니, ‘등불’이니 하는 비유적인 표현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나타내야 할 신분적인 일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3-15절은 소금과 등불이 해야 하는 바른 역할에 대한 설명입니다. 결국 말씀의 해석이 16절에서 나타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현실적인 주제를 하나 뽑아낸다면, ‘너희 삶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라.’는 것입니다.
인터넷 뉴스사이트 가운데 ‘뉴스엔조이(newsnjoy)’라는 곳이 있습니다. 기독교 언론계 기자들이 만드는 인터넷 신문입니다. 이들은 한국 교회의 새로운 갱신을 목표로 삼고 있는 젊은 기자들입니다. 얼마 전에 ‘현재 한국 개신교의 위기’라는 분석 자료를 실었습니다.
개신교가 불교 신도보다 통계상 숫자는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개종자가 많다.’는 통계가 오르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에 들어왔다가 다른 종교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교회에 다니다가 교회에 실망하는 숫자가 많아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교회공동체가 신분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도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외국에서 한국 교회를 볼 때 두 가지에 놀란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의 엄청난 숫자와 급성장에 놀라고, 그 사회적 무책임함에 또 한번 놀란다고 합니다.
결국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산다.’는 말은 세상적인 표현으로는 ‘환심을 산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교회는 엉뚱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해왔습니다.
같은 지체가 된 교회들이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교인 뺏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들이 지금도 보이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큰 교회가 둘로 갈라지면서 세상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싸움질을 해대며 핏대를 올리는 모습이 심심찮게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밝은 빛으로 나타나게 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요청이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걸맞는 행실이며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이 땅에 왜 필요한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공동체에 요청하시는 것과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면서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비추지 않는 빛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에 맛을 주고, 세상을 신선하게 지키지 못하는 소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께 소유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중세의 수도원이나 지금의 기도원 같은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북적대는 삶의 현장 한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요한복음3:16절에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3년의 공생애 기간동안 잠시 기도하기 위하여 찾으신 것 외에는 한적한 곳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죄인들과 병자들과 핍박과 고난과 아픔이 있는 세상 한가운데서 일하셨습니다. 주님은 잠시 쉴 틈조차 없을 정도로 일하셨습니다. 그 사실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신지 불과 6시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보통사람들은 하루에서 길게는 며칠씩 생명이 끊어지지 않고 버티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하여 건강을 아껴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에 쏟으셨습니다. 피와 생명까지도 말입니다.
어느 지역에서나 각 교회가 주님을 본받아 지역 사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사회는 놀랍게 변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 다른 교회 보지 말고 우리 대복교회가 새 힘을 냅시다. 주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활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빛이 되게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인도합시다.
하나님께서 대복교회에 주신 꿈은 세상의 환경에 갇혀서 우울하고 어둡고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에게 빛과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람들의 마음을 밝고 맑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입니다. 교회가 건물이나 재정이나 숫자만 성장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이 주님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 큰 은혜를 우리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의 필요를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꿈은 목회자 한 사람이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을 내어놓을 때 가능합니다.
‘생존(Alive)’이란 책이 1974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실린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1972년 10월13일 ‘우루과이’의 ‘몽떼비데오’를 떠난 전세비행기 폐어챠일드 F227기가 ‘칠레’의 ‘싼디에고’로 가던 중 악천후로 안데스 대 산맥에 기적적인 불시착을 했습니다. 불시착하면서 양쪽 날개와 꼬리가 산봉우리에 부딪혀 달아났지만 간신히 눈에 덮인 산허리에 동체착륙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15명의 아마츄어 럭비 선수들과 응원단으로 따라가는 친구25명 그리고 승무원5명으로 모두 45명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의 몇 명은 불시착 때 죽었고, 몇 명은 부상을 입고 산 위에서 죽어갔습니다. 눈에 덮인 안데스 산맥은 전문가들도 꺼려하는 죽음의 계곡입니다.
정부는 10일간 수색비행을 하고는 구조를 포기했습니다. 비행기에는 전혀 식량이 없었습니다. 청년들의 주머니 속에 몇 개의 과자가 있었을 뿐입니다.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67일간을 끝까지 견디어 구출을 받은 사람은 16명이었습니다. 이들의 생명을 두 달 이상 유지시킨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죽은 친구의 몸이었습니다. 부상으로 여러 주간을 앓다가 산 위에서 죽은 ‘니코리처’ 군이 아버지 앞으로 적은 메모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전연 믿기 어려우실 일이 여기에서 벌어졌습니다. 죽은 친구의 살을 쪼개내는 일입니다. 이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으니까요. 저도 이제 오래 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죽은 뒤 나의 살이 친구들을 구원하게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에 이미 나 자신은 주님께 드려진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사람들을 사서 주님께 드립시다. 고린도후서1:14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로 인도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이제 우리 함께 결심하지 않으시렵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도록 합시다. 갈라디아서2:20절입니다. 함께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들어가는 말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많은 특징들 중에 공통적인 것 하나를 제시한다면, ‘군락’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같은 종류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도 이 현상은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가족공동체를 비롯하여 신앙, 직장, 지연, 학연, 취미 등. 여러 종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각자의 신분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가족공동체라고 하면, 아버지, 어머니, 자녀, 조부모, 친척 등의 신분들이 있을 것이며, 직장공동체에는 사장을 비롯하여 이사, 부장, 과장, 말단 공장근로자까지 많은 신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신분을 통하여 자신의 일을 합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알맞은 신분의 형성과 각 구성원들이 신분에 걸맞도록 일을 잘 감당해 나갈 때 가능합니다.
이런 전제를 두고 이시간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만, 이 시간에는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방향으로 말씀을 살펴볼까합니다.
본문 말씀은 “너희는”이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어느 특정한 부류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뒤따라오는 말씀들을 볼 때에 “너희”라고 지목된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즉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이니, ‘등불’이니 하는 비유적인 표현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나타내야 할 신분적인 일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3-15절은 소금과 등불이 해야 하는 바른 역할에 대한 설명입니다. 결국 말씀의 해석이 16절에서 나타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현실적인 주제를 하나 뽑아낸다면, ‘너희 삶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라.’는 것입니다.
인터넷 뉴스사이트 가운데 ‘뉴스엔조이(newsnjoy)’라는 곳이 있습니다. 기독교 언론계 기자들이 만드는 인터넷 신문입니다. 이들은 한국 교회의 새로운 갱신을 목표로 삼고 있는 젊은 기자들입니다. 얼마 전에 ‘현재 한국 개신교의 위기’라는 분석 자료를 실었습니다.
개신교가 불교 신도보다 통계상 숫자는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개종자가 많다.’는 통계가 오르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에 들어왔다가 다른 종교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교회에 다니다가 교회에 실망하는 숫자가 많아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교회공동체가 신분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도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외국에서 한국 교회를 볼 때 두 가지에 놀란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의 엄청난 숫자와 급성장에 놀라고, 그 사회적 무책임함에 또 한번 놀란다고 합니다.
결국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산다.’는 말은 세상적인 표현으로는 ‘환심을 산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교회는 엉뚱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해왔습니다.
같은 지체가 된 교회들이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교인 뺏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들이 지금도 보이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큰 교회가 둘로 갈라지면서 세상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싸움질을 해대며 핏대를 올리는 모습이 심심찮게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밝은 빛으로 나타나게 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요청이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걸맞는 행실이며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이 땅에 왜 필요한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공동체에 요청하시는 것과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면서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비추지 않는 빛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에 맛을 주고, 세상을 신선하게 지키지 못하는 소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께 소유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중세의 수도원이나 지금의 기도원 같은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북적대는 삶의 현장 한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요한복음3:16절에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3년의 공생애 기간동안 잠시 기도하기 위하여 찾으신 것 외에는 한적한 곳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죄인들과 병자들과 핍박과 고난과 아픔이 있는 세상 한가운데서 일하셨습니다. 주님은 잠시 쉴 틈조차 없을 정도로 일하셨습니다. 그 사실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신지 불과 6시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보통사람들은 하루에서 길게는 며칠씩 생명이 끊어지지 않고 버티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하여 건강을 아껴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에 쏟으셨습니다. 피와 생명까지도 말입니다.
어느 지역에서나 각 교회가 주님을 본받아 지역 사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사회는 놀랍게 변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 다른 교회 보지 말고 우리 대복교회가 새 힘을 냅시다. 주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활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빛이 되게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인도합시다.
하나님께서 대복교회에 주신 꿈은 세상의 환경에 갇혀서 우울하고 어둡고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에게 빛과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람들의 마음을 밝고 맑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입니다. 교회가 건물이나 재정이나 숫자만 성장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이 주님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 큰 은혜를 우리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의 필요를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꿈은 목회자 한 사람이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을 내어놓을 때 가능합니다.
‘생존(Alive)’이란 책이 1974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실린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1972년 10월13일 ‘우루과이’의 ‘몽떼비데오’를 떠난 전세비행기 폐어챠일드 F227기가 ‘칠레’의 ‘싼디에고’로 가던 중 악천후로 안데스 대 산맥에 기적적인 불시착을 했습니다. 불시착하면서 양쪽 날개와 꼬리가 산봉우리에 부딪혀 달아났지만 간신히 눈에 덮인 산허리에 동체착륙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15명의 아마츄어 럭비 선수들과 응원단으로 따라가는 친구25명 그리고 승무원5명으로 모두 45명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의 몇 명은 불시착 때 죽었고, 몇 명은 부상을 입고 산 위에서 죽어갔습니다. 눈에 덮인 안데스 산맥은 전문가들도 꺼려하는 죽음의 계곡입니다.
정부는 10일간 수색비행을 하고는 구조를 포기했습니다. 비행기에는 전혀 식량이 없었습니다. 청년들의 주머니 속에 몇 개의 과자가 있었을 뿐입니다.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67일간을 끝까지 견디어 구출을 받은 사람은 16명이었습니다. 이들의 생명을 두 달 이상 유지시킨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죽은 친구의 몸이었습니다. 부상으로 여러 주간을 앓다가 산 위에서 죽은 ‘니코리처’ 군이 아버지 앞으로 적은 메모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전연 믿기 어려우실 일이 여기에서 벌어졌습니다. 죽은 친구의 살을 쪼개내는 일입니다. 이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으니까요. 저도 이제 오래 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죽은 뒤 나의 살이 친구들을 구원하게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에 이미 나 자신은 주님께 드려진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사람들을 사서 주님께 드립시다. 고린도후서1:14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로 인도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이제 우리 함께 결심하지 않으시렵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도록 합시다. 갈라디아서2:20절입니다. 함께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