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결실을 위하여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863회
작성일
2002-10-19 16:20
♡♥♡ 더 많은 결실을 위하여 / 요15:1-8
***들어가는 말
사람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목적에 맞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는 계획을 따라서 사람이든지 재료든지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실행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책상이 필요하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판자조각을 가져다가 책상으로 삼거나, 책상을 만들 수 있는 재료만 사다놓고 책상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책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먼저 어떤 종류의 책상을 만들지 결정하고 적절한 계획을 세웁니다. 재료를 구입하고 그 재료를 자신의 계획에 맞도록 자르고, 깎고, 다듬고, 붙이고, 칠을 해서 책상을 만들어 냅니다. 여러 재료들이 적절하게 배치되고 조립되어서 책상이 되었을 때 비로소 쓰임 받게 됩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고는 저절로 자라고 포도가 열리라고 버려두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 품질 좋은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하여 거름도 많이 넣고, 가지자르기도 하고, 농약 살포도 합니다.
책상이든 포도나무든 이 모든 것은 사용하는 주인이 자신의 뜻에 합당하도록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책상이 되기 위한 재료들이나, 포도나무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잘리고, 깎이고, 다듬어지는 과정이 고통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목적대로 쓰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긴 시간과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당신께서 사용하시기 위하여 이 모든 일들을 계획하시고 적절하게 인도하시고 섭리하셨습니다.
제가 목회자로서의 소명이 있음을 깨달은 것은 군대를 제대하고 난 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사람을 통하여 목회자의 길을 가야함을 깨우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목회자였던 아버님의 고통과 어려움을 보아왔기 때문에 결코 가고 싶은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형이 먼저 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 길을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변명도 그럴듯하게 ‘다른 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나의 길을 막고 서셨습니다. 정말 ‘안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철저하게 안 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 하나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어진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애써 그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고 변명하면서 조여 오는 고통스러움을 고집스럽게 견디며 몇 년을 도망 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을 동원시키셨습니다. 지금은 그 분도 목회자가 되었고, 김해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부산의 대저교회 집사님이었습니다. 그 분에게 여러 은사가 있었는데, 나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할 때면 답답하기 그지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쭉 뻗은 도로가 중단되면서 그 앞이 텔레비전 방송이 끝나고 ‘치익’하는 잡음만 발생하는 그런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동안을 버티다가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좀 더 빨리 순종했더라면, 시간 낭비도 하지 않았을 터이고 더 나은 사역의 자리를 주셨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결국 1986년에 신학교를 입학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나를 훈련시키시고 변화시키십니다. 도망 다니던 당시에는 그런 고통스러운 일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깨뜨리고 계시는 것임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획에 잡혀 있는 사람은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아니라’고 애써 부인하고 도망을 다니면 더욱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거역하게 만드는 세상적인 불필요한 부분들을 여지없이 도려내시기 때문입니다. 필요 없는 가지를 과감하게 잘라버리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께 나아와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1:5-6절에서 탄식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 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더 나은 삶을 누리면서 더 많은 결실을 할 수 있도록 불필요한 삶의 부분을 가지치기 하십니다. 이 가지치기는 여러 가지 고통과 갈등과 어려움을 동반하게 됩니다. 우리의 결실과 행복을 위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살펴봅시다.
1. 하나님은 쓰임새에 맞추는 작업을 하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시는 과정을 여러 모양으로 보여주십니다. 예레미야18장의 ‘토기장이 비유’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필요한 그릇을 직접 만드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런가 하면, 디모데후서2:20-21절에서는 여러 재료로 만들어진 여러 모양의 많은 그릇 중에서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을 사용한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일한 많은 일군들을 통하여 보이신 방법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모세는 입술이 둔하여 언변이 좋지 못하다고 거듭 부르심을 사양하는 것을 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거절하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4: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이는 쓰임새에 맞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고 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데 열성이었고 앞장을 섰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 위하여 모양새를 바꾸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환상을 보게 하시고, 눈이 멀게 하시고, 광야에서 만나시고 변화시키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사람을 당신의 일의 쓰임새에 합당한 그릇이 되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이 과정이 본문2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쓰임새에 맞추는 작업을 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하게 느끼도록 하십니다. 무언가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뛰고 노력하지만 결과가 없습니다. 세상의 장벽이 너무나 높게 보입니다. 결국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과 분노와 좌절을 느끼게 됩니다.
두 번째는 세상의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함을 느끼도록 하십니다. 물질도, 권력도, 친구도, 가족도 의지해 보지만 그들로부터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혼자가 되었다는 외로움이 엄습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 외의 모든 방향이 막힌 것을 느끼게 하십니다. 요나를 아시지요? 요나 선지자는 적국의 수도인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거역의 길 끝은 물고기 뱃속이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무시하고 계속 자신의 길을 고집한다면, 고통은 배가될 것이고 결국 만신창이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을 수도 있으며, 금전적인 큰 손실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육신이 중한 질병에 들 수도 있고, 사업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쓰임새에 맞추어지도록 하시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은 하나님 안에 들어옴으로서 끝이 나게 됩니다. 여러분의 생이 불안합니까? 아직 하나님 안에 완전히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쓰임새에 합당한 도구로 더 많은 결실을 얻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지는 일은 육신이 즐기는 세상의 것들을 버려야 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유되고 난 후에 주어질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쓰임새에 합당하게 다듬어진 후에는 모든 제한들이 풀려지게 됩니다. 본문7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만족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의 삶의 환경이나 여건이 여의치 못하고 때로는 주님으로 인한 고통이 있을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기쁨과 평화가 가득하게 됩니다. 요한복음10:28절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으며, 16:22절에서는,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잘 깎여지고 다듬어진 가지나 그릇은 많은 결실을 얻을 것이며, 많은 결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대기업의 중견 간부인 그리스도인이 격무에 시달리다가 바쁜 생활에서 벗어나 한 주간 동안의 휴가를 얻었습니다. 그는 식구들에게도 양해를 구하고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조그만 집을 하나 빌려 쉬게 되었습니다.
복잡하고 공해 심한 도시를 떠나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가슴이 시원할 정도로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십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들어 시간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열 시간 이상 잠잘 수도 있습니다. 문만 열면 아름다운 대자연을 만끽하며 도취해 버립니다. 회사의 일도 가정의 일도 신앙의 고민도 다 접어두었습니다. 전화 받을 일도 없으며, 신문도 배달되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늘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꿈같은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잠이 잘 오지를 않고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숲 속을 걸으며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동요가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무언가 다른 것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외로운 생각까지 들고 고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일주일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세상을 즐기라고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당신의 뜻을 이루시며, 함께 일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 받는 장면을 봅시다. 이사야6:8절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탄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세우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3:14-15절입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하십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어두워가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있습니다. 나 하나, 또는 내 가족이 평안하고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만을 위하여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하여 생명에 관한 중요한 일을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크고 위대한 일에 동참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이 쓰임새에 맞추어져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어떤 열매를 맺었습니까? 여러분으로 인하여 생명을 얻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주님은 우리 생애를 결산하시면서 열매를 요구하실 것입니다. 모세처럼, 또는 요나처럼 하나님이 화를 내시고서야 순종하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주님의 탄식을 들을 때, 또는 우리 앞에 많은 일을 보이실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자원하여 응답하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많은 열매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는 말
사람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목적에 맞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는 계획을 따라서 사람이든지 재료든지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실행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책상이 필요하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판자조각을 가져다가 책상으로 삼거나, 책상을 만들 수 있는 재료만 사다놓고 책상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책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먼저 어떤 종류의 책상을 만들지 결정하고 적절한 계획을 세웁니다. 재료를 구입하고 그 재료를 자신의 계획에 맞도록 자르고, 깎고, 다듬고, 붙이고, 칠을 해서 책상을 만들어 냅니다. 여러 재료들이 적절하게 배치되고 조립되어서 책상이 되었을 때 비로소 쓰임 받게 됩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고는 저절로 자라고 포도가 열리라고 버려두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 품질 좋은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하여 거름도 많이 넣고, 가지자르기도 하고, 농약 살포도 합니다.
책상이든 포도나무든 이 모든 것은 사용하는 주인이 자신의 뜻에 합당하도록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책상이 되기 위한 재료들이나, 포도나무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잘리고, 깎이고, 다듬어지는 과정이 고통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목적대로 쓰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긴 시간과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당신께서 사용하시기 위하여 이 모든 일들을 계획하시고 적절하게 인도하시고 섭리하셨습니다.
제가 목회자로서의 소명이 있음을 깨달은 것은 군대를 제대하고 난 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사람을 통하여 목회자의 길을 가야함을 깨우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목회자였던 아버님의 고통과 어려움을 보아왔기 때문에 결코 가고 싶은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형이 먼저 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 길을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변명도 그럴듯하게 ‘다른 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나의 길을 막고 서셨습니다. 정말 ‘안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철저하게 안 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 하나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어진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애써 그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고 변명하면서 조여 오는 고통스러움을 고집스럽게 견디며 몇 년을 도망 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을 동원시키셨습니다. 지금은 그 분도 목회자가 되었고, 김해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부산의 대저교회 집사님이었습니다. 그 분에게 여러 은사가 있었는데, 나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할 때면 답답하기 그지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쭉 뻗은 도로가 중단되면서 그 앞이 텔레비전 방송이 끝나고 ‘치익’하는 잡음만 발생하는 그런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동안을 버티다가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좀 더 빨리 순종했더라면, 시간 낭비도 하지 않았을 터이고 더 나은 사역의 자리를 주셨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결국 1986년에 신학교를 입학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나를 훈련시키시고 변화시키십니다. 도망 다니던 당시에는 그런 고통스러운 일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깨뜨리고 계시는 것임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획에 잡혀 있는 사람은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아니라’고 애써 부인하고 도망을 다니면 더욱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거역하게 만드는 세상적인 불필요한 부분들을 여지없이 도려내시기 때문입니다. 필요 없는 가지를 과감하게 잘라버리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께 나아와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1:5-6절에서 탄식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 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더 나은 삶을 누리면서 더 많은 결실을 할 수 있도록 불필요한 삶의 부분을 가지치기 하십니다. 이 가지치기는 여러 가지 고통과 갈등과 어려움을 동반하게 됩니다. 우리의 결실과 행복을 위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살펴봅시다.
1. 하나님은 쓰임새에 맞추는 작업을 하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시는 과정을 여러 모양으로 보여주십니다. 예레미야18장의 ‘토기장이 비유’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필요한 그릇을 직접 만드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런가 하면, 디모데후서2:20-21절에서는 여러 재료로 만들어진 여러 모양의 많은 그릇 중에서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을 사용한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일한 많은 일군들을 통하여 보이신 방법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모세는 입술이 둔하여 언변이 좋지 못하다고 거듭 부르심을 사양하는 것을 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거절하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4: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이는 쓰임새에 맞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고 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데 열성이었고 앞장을 섰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 위하여 모양새를 바꾸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환상을 보게 하시고, 눈이 멀게 하시고, 광야에서 만나시고 변화시키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사람을 당신의 일의 쓰임새에 합당한 그릇이 되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이 과정이 본문2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쓰임새에 맞추는 작업을 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하게 느끼도록 하십니다. 무언가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뛰고 노력하지만 결과가 없습니다. 세상의 장벽이 너무나 높게 보입니다. 결국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과 분노와 좌절을 느끼게 됩니다.
두 번째는 세상의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함을 느끼도록 하십니다. 물질도, 권력도, 친구도, 가족도 의지해 보지만 그들로부터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혼자가 되었다는 외로움이 엄습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 외의 모든 방향이 막힌 것을 느끼게 하십니다. 요나를 아시지요? 요나 선지자는 적국의 수도인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거역의 길 끝은 물고기 뱃속이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무시하고 계속 자신의 길을 고집한다면, 고통은 배가될 것이고 결국 만신창이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을 수도 있으며, 금전적인 큰 손실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육신이 중한 질병에 들 수도 있고, 사업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쓰임새에 맞추어지도록 하시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은 하나님 안에 들어옴으로서 끝이 나게 됩니다. 여러분의 생이 불안합니까? 아직 하나님 안에 완전히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쓰임새에 합당한 도구로 더 많은 결실을 얻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지는 일은 육신이 즐기는 세상의 것들을 버려야 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유되고 난 후에 주어질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쓰임새에 합당하게 다듬어진 후에는 모든 제한들이 풀려지게 됩니다. 본문7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만족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의 삶의 환경이나 여건이 여의치 못하고 때로는 주님으로 인한 고통이 있을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기쁨과 평화가 가득하게 됩니다. 요한복음10:28절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으며, 16:22절에서는,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잘 깎여지고 다듬어진 가지나 그릇은 많은 결실을 얻을 것이며, 많은 결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대기업의 중견 간부인 그리스도인이 격무에 시달리다가 바쁜 생활에서 벗어나 한 주간 동안의 휴가를 얻었습니다. 그는 식구들에게도 양해를 구하고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조그만 집을 하나 빌려 쉬게 되었습니다.
복잡하고 공해 심한 도시를 떠나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가슴이 시원할 정도로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십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들어 시간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열 시간 이상 잠잘 수도 있습니다. 문만 열면 아름다운 대자연을 만끽하며 도취해 버립니다. 회사의 일도 가정의 일도 신앙의 고민도 다 접어두었습니다. 전화 받을 일도 없으며, 신문도 배달되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늘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꿈같은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잠이 잘 오지를 않고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숲 속을 걸으며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동요가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무언가 다른 것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외로운 생각까지 들고 고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일주일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세상을 즐기라고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당신의 뜻을 이루시며, 함께 일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 받는 장면을 봅시다. 이사야6:8절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탄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세우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3:14-15절입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하십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어두워가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있습니다. 나 하나, 또는 내 가족이 평안하고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만을 위하여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하여 생명에 관한 중요한 일을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크고 위대한 일에 동참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이 쓰임새에 맞추어져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어떤 열매를 맺었습니까? 여러분으로 인하여 생명을 얻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주님은 우리 생애를 결산하시면서 열매를 요구하실 것입니다. 모세처럼, 또는 요나처럼 하나님이 화를 내시고서야 순종하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주님의 탄식을 들을 때, 또는 우리 앞에 많은 일을 보이실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자원하여 응답하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많은 열매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