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감각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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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10-05 22:40
♡♥♡ 생명과 감각 / 이사야55:1-7
***들어가는 말
삶과 죽음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 가장 큰 차이는 ‘생명’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생명이 있다고 모두 삶을 영위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죽지 못해 사는 생명도 있고, 식물인간처럼 아무런 의식도 없이 목숨만 부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육신과 영의 삶 모두를 따져볼 때 ‘감각’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육신이든 영이든 ‘감각’이 활성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슬픔도 기쁨도 느끼며 감격하고 분노할 줄을 압니다. 죽은 육신이나 영은 깨달음도 감격도 분노도 없습니다. 특히 영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영의 감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육신의 삶에 매어 살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는 영의 생명이며 영적인 감각입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할 때, 우리 부대를 지원해 주던 통신병이 있었습니다. 이 통신병은 우리 부대가 작전을 수행할 때, 통신 설비를 담당하는 사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통신병이 통신 선로 가설 작업을 하기 위하여 전신주에 올라갔다가 실수로 고압선을 만져서 감전사고로 그만 생명이 위독할 지경이 되어 국군통합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나서 저는 전역하기 위하여 사단 보충대로 전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 통신병을 만났습니다. 그는 다행히도 전기가 몸의 약한 부분을 파열시키면서 빠져나갔기 때문에 생명이 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부대로 복귀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른 팔의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겨드랑이쪽이 파열되면서 감각선이 회복불능으로 손상되었다는 것입니다. 팔은 달려 있지만 자신은 전혀 팔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오른팔이나 손이 어디에 부딪쳐서 상처가 나도 눈으로 보기 전에는 전혀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일부가 감각을 상실한 예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에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애틋한 사랑의 외침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외침은 한 때는 생명이 있어서 기쁨의 감격을 누렸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떠나서 죄악을 일삼으며 영의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즉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회복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영의 감각이 사라지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원망과 짜증입니다. 이는 육신의 현상만 보이고 느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음으로 인하여, 길이 험함을 인하여 모세를 원망하고, 음식이 박함을 인하여 짜증이 극에 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현상만을 보는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진노하셨고,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고전10장 참조). 반대로 영의 생명이 있을 때, 특히 생명력이 강력할 때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스데반이 그러했습니다. 비록 돌에 맞아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에는 밝은 광채와 주를 뵙는 기쁨으로 환하게 밝았습니다. 이처럼 영의 감각은 주님으로 인한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본문2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름으로 인한 감각의 회복이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영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나를 청종하면 너희 마음이 즐거움을 얻을 것이며, 내게 나아와 들으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따르면 영의 생명과 영적인 감각이 회복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본문에서는 ‘청종하라.’, ‘찾으라.’, ‘부르라.’, ‘돌아오라.’등의 강력한 명령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을 향하시는 하나님의 간곡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확실한 의지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이러한 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회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6절에서 “만날 만한 때”, “가까이 계실 때”라고 하셨습니다.
미국 격언에 ‘햇볕이 쨍쨍 났을 때 건초더미를 만들라.’(Make hay while the sun shines.)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일이든지 그 일을 할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좋은 기회가 찾아 왔을 때 그 기회를 잘 선용할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특히 영의 생명에 관한 일에는 더욱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본문6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현대어성경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만나러 오셨을 때에 너희도 주님을 만나러 나오너라! 주께서 가까이 와 계실 때에 너희도 주님을 부르며 찾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 또는 가까이 와 계실 때는 언제입니까? 이러한 때는 영적인 감각이, 혹은 영의 생명이 위기를 만나고 있을 때일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인생의 위기의 때임이 분명합니다. 시편50:15절에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십니다. 또 하나는 자신의 죄악을 슬퍼하고 아파할 때입니다. 시편34:18절에서,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하셨고, 이사야57:15절에서는,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와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결단하고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생명을 회복하고 감각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생명이 회복되는 증상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함으로서 주어지는 변화는 생명이 회복되며 기쁨과 즐거움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본문2절에서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의 현상은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한 것입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통곡할 때였습니다. 느혜미야8:9-10절입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기쁨입니다. 오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억지로나, 쓸데없는 고통을 자초하면서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5:2-3절입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결국 인생의 모든 일들이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삶은 어떠합니까? 마음이 평안을 누리며 감사가 넘치고 모든 일이 즐겁습니까? 이는 영의 생명력이 풍성하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생활이 계속된다면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아무런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항상 영의 생명이 충만하고 영적인 감각이 활성화 되어 주님이 이루시는 즐거움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는 말
삶과 죽음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 가장 큰 차이는 ‘생명’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생명이 있다고 모두 삶을 영위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죽지 못해 사는 생명도 있고, 식물인간처럼 아무런 의식도 없이 목숨만 부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육신과 영의 삶 모두를 따져볼 때 ‘감각’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육신이든 영이든 ‘감각’이 활성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슬픔도 기쁨도 느끼며 감격하고 분노할 줄을 압니다. 죽은 육신이나 영은 깨달음도 감격도 분노도 없습니다. 특히 영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영의 감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육신의 삶에 매어 살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는 영의 생명이며 영적인 감각입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할 때, 우리 부대를 지원해 주던 통신병이 있었습니다. 이 통신병은 우리 부대가 작전을 수행할 때, 통신 설비를 담당하는 사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통신병이 통신 선로 가설 작업을 하기 위하여 전신주에 올라갔다가 실수로 고압선을 만져서 감전사고로 그만 생명이 위독할 지경이 되어 국군통합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나서 저는 전역하기 위하여 사단 보충대로 전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 통신병을 만났습니다. 그는 다행히도 전기가 몸의 약한 부분을 파열시키면서 빠져나갔기 때문에 생명이 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부대로 복귀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른 팔의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겨드랑이쪽이 파열되면서 감각선이 회복불능으로 손상되었다는 것입니다. 팔은 달려 있지만 자신은 전혀 팔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오른팔이나 손이 어디에 부딪쳐서 상처가 나도 눈으로 보기 전에는 전혀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일부가 감각을 상실한 예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에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애틋한 사랑의 외침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외침은 한 때는 생명이 있어서 기쁨의 감격을 누렸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떠나서 죄악을 일삼으며 영의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즉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회복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영의 감각이 사라지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원망과 짜증입니다. 이는 육신의 현상만 보이고 느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음으로 인하여, 길이 험함을 인하여 모세를 원망하고, 음식이 박함을 인하여 짜증이 극에 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현상만을 보는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진노하셨고,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고전10장 참조). 반대로 영의 생명이 있을 때, 특히 생명력이 강력할 때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스데반이 그러했습니다. 비록 돌에 맞아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에는 밝은 광채와 주를 뵙는 기쁨으로 환하게 밝았습니다. 이처럼 영의 감각은 주님으로 인한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본문2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름으로 인한 감각의 회복이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영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나를 청종하면 너희 마음이 즐거움을 얻을 것이며, 내게 나아와 들으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따르면 영의 생명과 영적인 감각이 회복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본문에서는 ‘청종하라.’, ‘찾으라.’, ‘부르라.’, ‘돌아오라.’등의 강력한 명령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을 향하시는 하나님의 간곡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확실한 의지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이러한 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회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6절에서 “만날 만한 때”, “가까이 계실 때”라고 하셨습니다.
미국 격언에 ‘햇볕이 쨍쨍 났을 때 건초더미를 만들라.’(Make hay while the sun shines.)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일이든지 그 일을 할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좋은 기회가 찾아 왔을 때 그 기회를 잘 선용할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특히 영의 생명에 관한 일에는 더욱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본문6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현대어성경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만나러 오셨을 때에 너희도 주님을 만나러 나오너라! 주께서 가까이 와 계실 때에 너희도 주님을 부르며 찾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 또는 가까이 와 계실 때는 언제입니까? 이러한 때는 영적인 감각이, 혹은 영의 생명이 위기를 만나고 있을 때일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인생의 위기의 때임이 분명합니다. 시편50:15절에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십니다. 또 하나는 자신의 죄악을 슬퍼하고 아파할 때입니다. 시편34:18절에서,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하셨고, 이사야57:15절에서는,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와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결단하고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생명을 회복하고 감각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생명이 회복되는 증상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함으로서 주어지는 변화는 생명이 회복되며 기쁨과 즐거움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본문2절에서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의 현상은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한 것입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통곡할 때였습니다. 느혜미야8:9-10절입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기쁨입니다. 오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억지로나, 쓸데없는 고통을 자초하면서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5:2-3절입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결국 인생의 모든 일들이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삶은 어떠합니까? 마음이 평안을 누리며 감사가 넘치고 모든 일이 즐겁습니까? 이는 영의 생명력이 풍성하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생활이 계속된다면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아무런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항상 영의 생명이 충만하고 영적인 감각이 활성화 되어 주님이 이루시는 즐거움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