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문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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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10-05 22:38
♡♥♡ 인생의 문 / 요한복음10:7-10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일평생을 선택하면서 삽니다. 매일매일 순간순간들이 선택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 누구를 만나고, 교통편은 어떤 것을 이용하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등등. 이렇듯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인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문(門)과 같습니다. 어떤 문을 열고 들어서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마약이라는 문을 들어서면 얻을 것은 인생 파멸이며, 봉사와 헌신의 문을 들어서면 칭찬과 명예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이 들어서는 문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집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문이 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하나님 나라의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며, 또한 인생을 풍성하게 하는 선물입니다. 정말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삶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옛날 어느 마을에 한 거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매일 이 집 저 집 밥을 얻으러 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 거지는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부자들은 너무 욕심이 많아서 탈이야. 그저 돈 돈하면서 더욱 돈만 모으려고 한단 말이야. 어휴, 나는 조금만 있어도 만족할 텐데 …”
이렇게 혼자서 중얼거리는 거지의 말을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천사가 들었습니다.
“아저씨, 지금 돈이 조금만 있어도 만족하겠다고 하셨지요? 제가 돈을 조금 드릴까요?”
그 거지는 너무 기뻤습니다. 천사는 거지에게, “그 자루를 벌리세요.”라고 하고는 번쩍 번쩍 빛나는 금돈을 자루에 몇 개 넣어 주었습니다. “이젠 되셨지요?” 그러자 그 거지는 “아니, 조금만 더”라고 말했습니다. “아저씨, 금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자루가 찢어져 금돈이 땅에 떨어지면 흙으로 변하고 만답니다.” 그러나 거지는 “그래도 이건 너무 적지 않습니까?”하면서 거지는 계속 자루를 벌렸고, 천사는 또 금돈을 넣어 주었습니다. 이미 금돈은 자루의 반을 넘게 찼습니다. 천사는 “자 이제는 됐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거지는 천사의 손목을 잡고 “조금만 더 주세요.”하면서 자꾸만 더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는 순간 자루가 찢어지면서 금돈이 땅에 와르르 쏟아졌습니다. 금돈은 땅에 닿기가 무섭게 모두 흙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의 끝없는 욕심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 거지처럼 없을 때에는 ‘조금만 있어도 만족할 텐데!’ 라고 하지만, 기회만 주어지면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서 있을 때에는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고, 누워 있으면 자고 싶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만족이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진정한 만족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은 영의 삶과 육신의 삶 모두를 풍성하게 하시며 만족을 누리게 하시는 인생의 문이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풍성하고 더 풍성한 인생을 말씀하실까요?
1. 인생의 문이신 주님은 인생의 풍성함을 원하십니다.
우리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은 재앙이나 고난의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금욕’과 ‘고난의 삶’을 강조해온 기독교 이단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으며 항상 경직된 삶을 삽니다.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면서 인간의 모든 욕망을 좇아내는 것이 신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수많은 날을 그렇게 고통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와 갈멜산에서 대결을 벌였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들도 스스로 자기 몸을 상하면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신이 기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미 없는 고난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기쁘고 즐겁게 누리며 풍성한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습니다. 예레미야29:11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셨고, 신명기28:1-14절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섬기는 사람에 대한 인생의 풍성함을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과 풍성함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명백한 증거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답답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희생의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며, 인생의 생명과 풍성함을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풍성함이란 주님으로 인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을 누리는 만족한 삶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생명과 인생의 풍성함을 누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음을 기뻐하면서 삽니까? 자신의 삶이 풍성함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마 많은 성도들이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2. 사람들이 인생의 문이신 주님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믿는 예수님도 한 분이시며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면서 만족하며 풍성하게 살고, 어떤 성도는 동분서주하면서도 늘 ‘죽겠다.’는 소리가 나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습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모든 생활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믿고 순종하는 성도에게는 소유에 상관없이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반면에 주님을 외면하고 있으면 아무리 대궐 같은 집과 많은 재물이 있어도 기쁨도 만족도 느낄 수 없습니다.
지난해 9.11테러 사건이 있은 후로 전 세계가 출입국 관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어떤 사업가가 이태리로 출장을 갔다가 일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하여 시간에 쫓겨 출항시간에 임박하여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공항의 검색이 까다롭기로 유명하여 무려 네 번의 검색을 거친다고 합니다. 세관, 이민국, 외화 반출 검사대, 마지막으로 면역소를 거친다고 합니다.
이 사업가는 비행기를 놓칠까봐 안절부절못하면서 발을 동동 구릅니다. 마음이 조급해 있는데, 그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어깨를 툭툭 치면서 하는 말이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선생님이 탑승하기 전까지는 비행기 문이 절대로 닫히지 않을 것입니다. 원래 이 공항의 수속 시간은 오래 걸립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사업가는 “당신이 무엇을 믿고 그렇게 장담하느냐?”고 쏘아붙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뒤에 서있던 신사가 한 마디 합니다. “내가 바로 당신이 탈 비행기 조종사입니다.”
이 사업가가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바쁘게 삽니다. 그런데도 별 성과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삶이 즐겁거나 만족한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혼자서 바쁘고 조급해서 안절부절 못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육신적인 욕구 충족을 위하여 뛰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평안과 기쁨 그리고 만족과 감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실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5:4-5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은 한계가 있는 존재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과학을 앞세워 우주를 정복할 듯 강한 존재인 것 같지만, 자그마한 자연재난에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약한 존재입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대도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시며 인생의 문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입니다.
3.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답은 이미 다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문으로 삼는 것입니다. 본문9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현대어 성경으로 다시 읽습니다. “나는 문이니, 누구든지 그 문으로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며 좋은 풀을 얻을 것이다.” 또한 10절 후반절에서는, “나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해주기 위해 온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문(門)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문은 출입을 주관하며, 보호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출입은 문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그리고 문은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일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보호하려고 문에 많은 자물쇠들을 설치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성도의 가장 완전한 보호 문이십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문이 되신다고 하는 것은 인생의 모든 일을 주님을 통하여 시행하며 주님의 보호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인생의 문으로 삼으면 “들어가며 나오며 풍성한 꼴을 얻고, 더 풍성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주님이 인생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돈이 필요한지, 건강이 필요한지, 능력이 필요한지 알고 계십니다.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6:8절에서 주님은,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주님을 내 인생의 문으로 삼고 그 안에 머물면 됩니다.
기쁜 일이든지 슬픈 일이든지 아픔이든지 고난이든지 일이 있을 때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항상 문을 통해 출입하듯이 주님과 대화를 나누십시오. 주님을 의지하고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주님의 약속대로 주님이 인도하시고 우리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만족하고 풍성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주님을 우리 인생의 문으로 삼고 그 안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일평생을 선택하면서 삽니다. 매일매일 순간순간들이 선택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 누구를 만나고, 교통편은 어떤 것을 이용하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등등. 이렇듯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인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문(門)과 같습니다. 어떤 문을 열고 들어서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마약이라는 문을 들어서면 얻을 것은 인생 파멸이며, 봉사와 헌신의 문을 들어서면 칭찬과 명예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이 들어서는 문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집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문이 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하나님 나라의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며, 또한 인생을 풍성하게 하는 선물입니다. 정말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삶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옛날 어느 마을에 한 거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매일 이 집 저 집 밥을 얻으러 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 거지는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부자들은 너무 욕심이 많아서 탈이야. 그저 돈 돈하면서 더욱 돈만 모으려고 한단 말이야. 어휴, 나는 조금만 있어도 만족할 텐데 …”
이렇게 혼자서 중얼거리는 거지의 말을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천사가 들었습니다.
“아저씨, 지금 돈이 조금만 있어도 만족하겠다고 하셨지요? 제가 돈을 조금 드릴까요?”
그 거지는 너무 기뻤습니다. 천사는 거지에게, “그 자루를 벌리세요.”라고 하고는 번쩍 번쩍 빛나는 금돈을 자루에 몇 개 넣어 주었습니다. “이젠 되셨지요?” 그러자 그 거지는 “아니, 조금만 더”라고 말했습니다. “아저씨, 금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자루가 찢어져 금돈이 땅에 떨어지면 흙으로 변하고 만답니다.” 그러나 거지는 “그래도 이건 너무 적지 않습니까?”하면서 거지는 계속 자루를 벌렸고, 천사는 또 금돈을 넣어 주었습니다. 이미 금돈은 자루의 반을 넘게 찼습니다. 천사는 “자 이제는 됐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거지는 천사의 손목을 잡고 “조금만 더 주세요.”하면서 자꾸만 더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는 순간 자루가 찢어지면서 금돈이 땅에 와르르 쏟아졌습니다. 금돈은 땅에 닿기가 무섭게 모두 흙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의 끝없는 욕심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 거지처럼 없을 때에는 ‘조금만 있어도 만족할 텐데!’ 라고 하지만, 기회만 주어지면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서 있을 때에는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고, 누워 있으면 자고 싶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만족이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진정한 만족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은 영의 삶과 육신의 삶 모두를 풍성하게 하시며 만족을 누리게 하시는 인생의 문이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풍성하고 더 풍성한 인생을 말씀하실까요?
1. 인생의 문이신 주님은 인생의 풍성함을 원하십니다.
우리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은 재앙이나 고난의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금욕’과 ‘고난의 삶’을 강조해온 기독교 이단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으며 항상 경직된 삶을 삽니다.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면서 인간의 모든 욕망을 좇아내는 것이 신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수많은 날을 그렇게 고통으로 지내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와 갈멜산에서 대결을 벌였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들도 스스로 자기 몸을 상하면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신이 기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미 없는 고난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기쁘고 즐겁게 누리며 풍성한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습니다. 예레미야29:11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셨고, 신명기28:1-14절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섬기는 사람에 대한 인생의 풍성함을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과 풍성함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명백한 증거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답답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희생의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며, 인생의 생명과 풍성함을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풍성함이란 주님으로 인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을 누리는 만족한 삶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생명과 인생의 풍성함을 누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음을 기뻐하면서 삽니까? 자신의 삶이 풍성함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마 많은 성도들이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2. 사람들이 인생의 문이신 주님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믿는 예수님도 한 분이시며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면서 만족하며 풍성하게 살고, 어떤 성도는 동분서주하면서도 늘 ‘죽겠다.’는 소리가 나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습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모든 생활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믿고 순종하는 성도에게는 소유에 상관없이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반면에 주님을 외면하고 있으면 아무리 대궐 같은 집과 많은 재물이 있어도 기쁨도 만족도 느낄 수 없습니다.
지난해 9.11테러 사건이 있은 후로 전 세계가 출입국 관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어떤 사업가가 이태리로 출장을 갔다가 일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하여 시간에 쫓겨 출항시간에 임박하여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공항의 검색이 까다롭기로 유명하여 무려 네 번의 검색을 거친다고 합니다. 세관, 이민국, 외화 반출 검사대, 마지막으로 면역소를 거친다고 합니다.
이 사업가는 비행기를 놓칠까봐 안절부절못하면서 발을 동동 구릅니다. 마음이 조급해 있는데, 그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어깨를 툭툭 치면서 하는 말이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선생님이 탑승하기 전까지는 비행기 문이 절대로 닫히지 않을 것입니다. 원래 이 공항의 수속 시간은 오래 걸립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사업가는 “당신이 무엇을 믿고 그렇게 장담하느냐?”고 쏘아붙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뒤에 서있던 신사가 한 마디 합니다. “내가 바로 당신이 탈 비행기 조종사입니다.”
이 사업가가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바쁘게 삽니다. 그런데도 별 성과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삶이 즐겁거나 만족한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혼자서 바쁘고 조급해서 안절부절 못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육신적인 욕구 충족을 위하여 뛰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평안과 기쁨 그리고 만족과 감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실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5:4-5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은 한계가 있는 존재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과학을 앞세워 우주를 정복할 듯 강한 존재인 것 같지만, 자그마한 자연재난에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약한 존재입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대도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시며 인생의 문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입니다.
3.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답은 이미 다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문으로 삼는 것입니다. 본문9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현대어 성경으로 다시 읽습니다. “나는 문이니, 누구든지 그 문으로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며 좋은 풀을 얻을 것이다.” 또한 10절 후반절에서는, “나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해주기 위해 온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문(門)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문은 출입을 주관하며, 보호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출입은 문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그리고 문은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일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보호하려고 문에 많은 자물쇠들을 설치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성도의 가장 완전한 보호 문이십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문이 되신다고 하는 것은 인생의 모든 일을 주님을 통하여 시행하며 주님의 보호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인생의 문으로 삼으면 “들어가며 나오며 풍성한 꼴을 얻고, 더 풍성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주님이 인생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돈이 필요한지, 건강이 필요한지, 능력이 필요한지 알고 계십니다.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6:8절에서 주님은,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주님을 내 인생의 문으로 삼고 그 안에 머물면 됩니다.
기쁜 일이든지 슬픈 일이든지 아픔이든지 고난이든지 일이 있을 때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항상 문을 통해 출입하듯이 주님과 대화를 나누십시오. 주님을 의지하고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주님의 약속대로 주님이 인도하시고 우리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만족하고 풍성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주님을 우리 인생의 문으로 삼고 그 안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