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는 분과 쓰임 받는 사람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483회
작성일
2002-09-21 22:17
♡♥♡ 쓰시는 분과 쓰임 받는 사람 / 렘18:1-11
***들어가는 말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쓴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은 한 인간의 집념과 끈기, 수고로움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인생의 황혼에 선 노인은 거친 바다에서 고기 한 마리를 잡기 위하여 온갖 고생을 합니다. 노인이 죽도록 고생하며 고기를 잡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글 속에는 노인의 고생하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기가 낚시에 걸렸기 때문에 잡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큰 청새치가 낚시에 걸렸습니다. 노인은 있는 힘을 다하여 오랜 시간을 청새치와 씨름을 합니다. 결국 물고기는 잡혔습니다. 노인은 잡은 청새치를 배 옆에 매달고 지친 몸을 이끌고 배를 저어 뭍을 향합니다. 그러나 귀항하는 과정도 순탄하지 않아서 상어 떼에게 잡은 청새치를 빼앗기고 뼈만 매단 채 돌아오지만 노인은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노인이 힘쓰고 애쓴 결과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솔로몬의 고백을 연상케 하는 인생입니다.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라고 인생의 허무함을 고백합니다. 솔로몬은 인생에게서 하나님의 자리를 빼버리면 이와 같이 허무한 것뿐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열심히 살고 부귀영화를 누려도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모르면 결과는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전도서3:1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모든 일에는 정해진 때가 있고, 모든 목적은 다 이룰 기한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창조주가 부여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우리 사람들에게 목적이 없겠습니까? 바로 이시간의 본문 말씀에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의 눈에 비친 인생의 모습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만물을 모두 만드신 후에,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영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특별한 동산에 두시고 마치 친구처럼 여기셨습니다. 인간을 가장 고귀한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사물을 만들 때는 그것을 어떤 용도로 쓸 것인가 하는 목적을 가지고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각자에게 특별한 사명을 맡겨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분에 넘치는 존귀함을 너무 소홀히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창조물일 뿐만 아니라, 특별하신 사랑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 쾌락에 젖어서 우상 숭배와 물질적인 부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존귀하게 만드신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권면과 경고를 되풀이했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형편을 시편49:20절에서 시인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눈에 비친 인간은 짐승이었습니다.
짐승은 오로지 육체의 본능에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일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8:5-7절을 봅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 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이러한 상태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6:51절에서 주님은 외치십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에게 내리신 아홉 번의 심판에 대한 예언 중 마지막 아홉 번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경고로써 강력한 주권적인 이미지를 담은 토기장이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져 버린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2. 사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시고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토기장이가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토기장이는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놓고, 그 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흙으로 다시 다른 그릇을 만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 교훈의 내용은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이시며, 주인이시고, 모든 권한을 가지신 주권자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기도 하시며 버리기도 하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사울은 겸손함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권력의 힘이 강해지면서 자신의 교만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림으로서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신약에 등장하는 교만한 바리새인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환상 중에 주님을 뵙고는 겸손하고 순종하는 사도가 되어,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약의 성경을 13권이나 남기는 신실한 주님의 일군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조니 이렉슨 타다’는 수백만의 사람을 전도한 위대한 전도자입니다. 그러나 ‘조니’는 온 몸이 마비된 불구자입니다.
‘조니’가 아직 어린 10대 청소년이었던 어느 여름 오후에 생애가 완전히 뒤바뀌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조니는 얕은 수영장에 뛰어들다가 눈 깜짝할 짧은 순간에 전신 마비라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수개월 동안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조니에게는 희망이 거의 없었습니다. 조니는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을까?”라는 끝없는 의문으로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이 점점 그러한 고통과 쓰라린 의문들을 극복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조니는 이빨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놀라운 능력을 개발했습니다. 이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책과 영화와 특별 강의를 통하여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향하는 조니의 마음은 껑충껑충 성장하여 수백만의 사람을 전도하는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버리기도 하시고 쓰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은 쓰임 받겠지만,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못하는 사람은 버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 사람의 모든 생애에 역사하시는 섭리입니다.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 중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고,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서 가장 볼품없고 어린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다윗을 택하시는 광경을 봅시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이르러서 장자인 엘리압을 보고는 당장에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상16:6-7절입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즉 외적인 순종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기뻐하고 순종하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3.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
토기장이는 진흙의 사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진흙으로 무엇을 만들든지 그것은 만드는 토기장이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남 유다의 백성들은 스스로를 의지하면서 방자히 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답답하여 싫어서 버리고 떠나는 인생에게 애원하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까지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이사야10:1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을 책망하라고 요구하는 바리새인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19:40절입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즉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다른 것으로 대치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본문10-11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백성이 내 마음에 아픈 짓만을 하고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면 내가 비록 그들에게 번영과 행복을 약속했을지라도 누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너는 이제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의 모든 시민에게 분명히 알려 주어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전하신 말씀이다. 나는 지금 너희를 칠 계획도 마련하였고, 이미 너희에게 내릴 재앙도 준비하여 놓았다. 나는 이미 토기장이와 같이 재앙을 준비하며 물레를 돌리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속히 인생길을 바꾸어 내게로 돌아오며 행실을 고치기만 하면 내가 준비하던 재앙의 진흙덩이로 번영과 행복을 만들어 주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심을 선언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마음에 드는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사람을 사용하기도 하시며 버리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쓰임 받는 길입니다. 디모데후서2:20-21절입니다.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만들어진 그릇을 사용하는 이는 주인입니다. 그릇이 주인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필요한 대로 소용되는 그릇을 고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귀한 그릇이라고 뽐내 봐야 주인이 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그릇은 각자가 쓰이는 곳이 다릅니다. 차를 담아 대접하는 자리에 뚝배기가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전자렌지용이 있고, 냉장고용이 있고, 야외용 식기가 따로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적시 적소에 배치하시고 사용하시는 이는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사용되는 그릇인 우리는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순종입니다. 순종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이미 기회가 지나가 버린 후의 순종은 오히려 더 깊은 거역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합당하게 살고 있습니까? 남 유다는 하나님의 호의를 끝내 거절하다가 결국 패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 말씀을 거울로 삼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서 영광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는 말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쓴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은 한 인간의 집념과 끈기, 수고로움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인생의 황혼에 선 노인은 거친 바다에서 고기 한 마리를 잡기 위하여 온갖 고생을 합니다. 노인이 죽도록 고생하며 고기를 잡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글 속에는 노인의 고생하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기가 낚시에 걸렸기 때문에 잡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큰 청새치가 낚시에 걸렸습니다. 노인은 있는 힘을 다하여 오랜 시간을 청새치와 씨름을 합니다. 결국 물고기는 잡혔습니다. 노인은 잡은 청새치를 배 옆에 매달고 지친 몸을 이끌고 배를 저어 뭍을 향합니다. 그러나 귀항하는 과정도 순탄하지 않아서 상어 떼에게 잡은 청새치를 빼앗기고 뼈만 매단 채 돌아오지만 노인은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노인이 힘쓰고 애쓴 결과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솔로몬의 고백을 연상케 하는 인생입니다.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라고 인생의 허무함을 고백합니다. 솔로몬은 인생에게서 하나님의 자리를 빼버리면 이와 같이 허무한 것뿐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열심히 살고 부귀영화를 누려도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모르면 결과는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전도서3:1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모든 일에는 정해진 때가 있고, 모든 목적은 다 이룰 기한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창조주가 부여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우리 사람들에게 목적이 없겠습니까? 바로 이시간의 본문 말씀에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의 눈에 비친 인생의 모습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만물을 모두 만드신 후에,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영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특별한 동산에 두시고 마치 친구처럼 여기셨습니다. 인간을 가장 고귀한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사물을 만들 때는 그것을 어떤 용도로 쓸 것인가 하는 목적을 가지고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각자에게 특별한 사명을 맡겨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분에 넘치는 존귀함을 너무 소홀히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창조물일 뿐만 아니라, 특별하신 사랑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 쾌락에 젖어서 우상 숭배와 물질적인 부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존귀하게 만드신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권면과 경고를 되풀이했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형편을 시편49:20절에서 시인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눈에 비친 인간은 짐승이었습니다.
짐승은 오로지 육체의 본능에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일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8:5-7절을 봅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 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이러한 상태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6:51절에서 주님은 외치십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에게 내리신 아홉 번의 심판에 대한 예언 중 마지막 아홉 번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경고로써 강력한 주권적인 이미지를 담은 토기장이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져 버린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2. 사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시고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토기장이가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토기장이는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놓고, 그 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흙으로 다시 다른 그릇을 만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 교훈의 내용은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이시며, 주인이시고, 모든 권한을 가지신 주권자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기도 하시며 버리기도 하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사울은 겸손함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권력의 힘이 강해지면서 자신의 교만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림으로서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신약에 등장하는 교만한 바리새인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환상 중에 주님을 뵙고는 겸손하고 순종하는 사도가 되어,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약의 성경을 13권이나 남기는 신실한 주님의 일군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조니 이렉슨 타다’는 수백만의 사람을 전도한 위대한 전도자입니다. 그러나 ‘조니’는 온 몸이 마비된 불구자입니다.
‘조니’가 아직 어린 10대 청소년이었던 어느 여름 오후에 생애가 완전히 뒤바뀌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조니는 얕은 수영장에 뛰어들다가 눈 깜짝할 짧은 순간에 전신 마비라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수개월 동안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조니에게는 희망이 거의 없었습니다. 조니는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을까?”라는 끝없는 의문으로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이 점점 그러한 고통과 쓰라린 의문들을 극복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조니는 이빨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놀라운 능력을 개발했습니다. 이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책과 영화와 특별 강의를 통하여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향하는 조니의 마음은 껑충껑충 성장하여 수백만의 사람을 전도하는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버리기도 하시고 쓰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은 쓰임 받겠지만,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못하는 사람은 버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 사람의 모든 생애에 역사하시는 섭리입니다.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 중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고,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서 가장 볼품없고 어린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다윗을 택하시는 광경을 봅시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이르러서 장자인 엘리압을 보고는 당장에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상16:6-7절입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즉 외적인 순종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기뻐하고 순종하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3.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
토기장이는 진흙의 사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진흙으로 무엇을 만들든지 그것은 만드는 토기장이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남 유다의 백성들은 스스로를 의지하면서 방자히 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답답하여 싫어서 버리고 떠나는 인생에게 애원하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까지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이사야10:1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을 책망하라고 요구하는 바리새인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19:40절입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즉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다른 것으로 대치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본문10-11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백성이 내 마음에 아픈 짓만을 하고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면 내가 비록 그들에게 번영과 행복을 약속했을지라도 누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너는 이제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의 모든 시민에게 분명히 알려 주어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전하신 말씀이다. 나는 지금 너희를 칠 계획도 마련하였고, 이미 너희에게 내릴 재앙도 준비하여 놓았다. 나는 이미 토기장이와 같이 재앙을 준비하며 물레를 돌리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속히 인생길을 바꾸어 내게로 돌아오며 행실을 고치기만 하면 내가 준비하던 재앙의 진흙덩이로 번영과 행복을 만들어 주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심을 선언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마음에 드는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사람을 사용하기도 하시며 버리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쓰임 받는 길입니다. 디모데후서2:20-21절입니다.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만들어진 그릇을 사용하는 이는 주인입니다. 그릇이 주인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필요한 대로 소용되는 그릇을 고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귀한 그릇이라고 뽐내 봐야 주인이 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그릇은 각자가 쓰이는 곳이 다릅니다. 차를 담아 대접하는 자리에 뚝배기가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전자렌지용이 있고, 냉장고용이 있고, 야외용 식기가 따로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적시 적소에 배치하시고 사용하시는 이는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사용되는 그릇인 우리는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순종입니다. 순종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이미 기회가 지나가 버린 후의 순종은 오히려 더 깊은 거역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합당하게 살고 있습니까? 남 유다는 하나님의 호의를 끝내 거절하다가 결국 패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 말씀을 거울로 삼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서 영광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