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를 지키는 사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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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09-08 21:18
♡♥♡ 신의를 지키는 사람 / 사무엘하15:24-29
***들어가는 말
신실한 신앙을 가지신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슬하에 삼형제가 있고 지금은 모두 장성하여 모두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이 가정이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모이면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였는데, 가족이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운전을 하는 승용차가 한적한 시골길을 지날 때였습니다. 벼가 익어가는 들판이 이어지다가 한편에 넓은 들깨 밭이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어머니가 차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여보! 잠깐만 차를 세워요. 깻잎 좀 따가지고 가서 된장에 넣어 먹읍시다.”
길가에 차를 멈추고 다섯 명이 깨밭에 들어가서 순식간에 한 손 가득 깻잎을 딴 후, 밭을 나가려는 순간에 아버지가 모두를 불러 세웠습니다.
“남이 농사지은 깻잎을 몰래 따가는 것은 도둑질이다. 그러니 사가야 한다.”
라고 하시면서 지갑을 꺼내더니 1000원짜리 한 장을 둘둘 말아 튼튼하게 생긴 깨 나무에 붙들어 맸습니다.
깨밭의 주인이 그 돈을 발견했는지, 발견했다면 무슨 영문인지 알았겠습니까? 하지만 세 아들의 머릿속에는 평생 깨 나무에 매달린 1000원짜리가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이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자란 것은 당연하겠지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 보아주거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의 힘으로 성실하게 하는 사람, 자신의 일로 인하여 불이익이나 위험이 와도 신실하게 일하는 사람, 이들이 하나님 앞에도 신실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 이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커밍아웃(coming ou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밖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숨겨오던 사람이 당당하게 밝히는 것을 ‘커밍아웃’이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커밍아웃’해야 합니다. 즉 정직하고 신실한 생활로 어디에서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자신 있게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은밀하게 해야 할 선행이나 구제나 기도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은밀하게 해야 할 일들은 드러내고, 드러내야 할 자신의 악한 삶은 은밀하게 행함으로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잡히시자 그동안의 신의를 저버리고 죽음이 두려워서 도망했습니다. 반면에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모두가 두려워 도망갔을 때에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이사야26:2-3절을 봅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예할 수 있는 백성들의 자질이 두 가지로 언급됩니다. ‘의로움’과 ‘신실함’입니다. “신을 지킨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확고하게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자신에게는 선함이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붙잡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신실함이 돋보이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사독’이라는 사람입니다. 사독은 ‘아비아달’과 더불어 다윗 왕 시대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초대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의 후손으로써 ‘아히둡’의 아들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통 제사장 가문의 자손이었습니다. ‘사독’이라는 이름은 ‘의롭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독의 의롭고 신실한 성품은 다윗의 위기와 시련 가운데서 더욱 빛이 났습니다. 의롭고 신실한 사람은 세상이 어두울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를 불러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심도 하나님을 향하여 신의를 지키며 빛을 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입니다.
다윗의 총애를 받던 아들 압살롬이 4년간의 모의 끝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아버지를 반역한 것입니다. 다윗은 얼마나 급했던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채, 몇몇 신하들과 허급 지급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왔습니다. 압살롬은 순식간에 예루살렘 성을 점령했습니다. 다윗은 왕위를 아들에게 빼앗기고 생명조차 위태로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다윗의 은택을 입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입신영달을 꿈꾸며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수하에 들어갔습니다. 특히 다윗의 절친한 친구이자 모사였던 ‘아히도벨’배반은 다윗을 더욱 위태롭게 했습니다. 바로 이때, 사독은 자신의 지위와 명예와 목숨까지도 포기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다윗을 수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이는 예수님 곁에 있던 수많은 군중들이나 심지어는 제자들까지도 자신의 입신영달을 꿈꾸며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그러자 자신의 의도를 들켜버린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오늘의 많은 성도들도 자신의 어떤 유익을 생각하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이 온다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룟 유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마태복음7:13-14절을 봅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사독이 언약궤를 메고 다윗을 따른 것은 그 길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독에게 ‘언약궤를 메고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의도는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독의 믿음과 신의도 대단하지만 하나님을 향하는 다윗의 사랑과 믿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자신의 권력과 명예와 모든 재산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생명까지도 위태로운 지경에서 이러한 믿음의 발상을 한다는 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아쉬운 형편에서, 더욱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와 신실한 제사장인데 말입니다. 언약궤와 제사장은 다윗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25-26절을 보십시오. ‘자신의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고 하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이나,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던 에스더의 믿음을 생각나게 합니다. 올바른 믿음의 길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사독’이나,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돌려보내는 ‘다윗’이나, 그 왕의 그 신하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독은 비록 다윗의 권유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의 안전과 안일만을 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들인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시켜서 상황을 전달하며 다윗의 환궁을 도왔습니다. 이처럼 사독은 따라야 할 바른 길과 물리쳐야 할 길을 철저히 구분하고 성실하게 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앞서 보았던 이사야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 한 번은 솔로몬의 즉위 때였습니다.
다윗이 왕위를 회복하고 세월이 흘러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말년에는 왕위를 노리는 많은 음모가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다윗은 아들 솔로몬의 왕위 즉위를 사독에게 맡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독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아비아달’이 다윗을 배신하고, ‘아도니야’의 왕위 찬탈 음모에 가담했습니다. 아비아달은 압살롬이 반역할 때는 제사장으로서 사독과 함께 다윗 편에서 신실하게 행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말년에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독은 아비아달과의 오랜 우정을 버리면서까지 옳은 길을 따랐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생과 함께 여행 중에 나이아가라 폭포 밑을 흐르는 위험스러운 급류를 향해 배를 타고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짙은 안개처럼 물보라가 날리고, 물결은 폭포의 힘 때문에 뒤집힐 듯이 배를 흔들었습니다. 동생은 잔뜩 겁이 나서 안절부절못했습니다. 그것을 바라본 형은 노를 젓고 있는 사공에게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얼마나 자주 이곳을 건넜습니까?”
“지금까지 12년 동안 줄곧 이 일을 계속 했지요.”라고 사공이 대답했습니다.
“그럼 한번이라도 사고가 난 적이 있었습니까?”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배가 뒤집히거나 인명 피해가 전혀 없었단 말입니까?”
“선생님, 그런 일은 한번도 생기지 않았습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자 형은 동생에게,
“저 사공의 말을 들었지? 네가 저 사공보다 노를 더 잘 저을 수 없다면 나처럼 조용히 앉아서 저 사공을 믿고 이 여행을 즐겨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지요?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도 믿습니까? 그렇다면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보다 더 잘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의를 지키고 행하다보면, 세상의 친구도 잃고 때로는 오랜 우정도 저버릴 수밖에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38)
그러나 어떤 환경과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의를 지킨 사람에게는 또 다른 약속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10:29-30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처럼 하나님 앞에 신실했던 사독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대에 이르도록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시37:25-26절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여러분의 생애가 하나님 앞에서 신의를 지키는 신실한 삶을 이루셔서 가문이 복을 받는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는 말
신실한 신앙을 가지신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슬하에 삼형제가 있고 지금은 모두 장성하여 모두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이 가정이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모이면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였는데, 가족이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운전을 하는 승용차가 한적한 시골길을 지날 때였습니다. 벼가 익어가는 들판이 이어지다가 한편에 넓은 들깨 밭이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어머니가 차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여보! 잠깐만 차를 세워요. 깻잎 좀 따가지고 가서 된장에 넣어 먹읍시다.”
길가에 차를 멈추고 다섯 명이 깨밭에 들어가서 순식간에 한 손 가득 깻잎을 딴 후, 밭을 나가려는 순간에 아버지가 모두를 불러 세웠습니다.
“남이 농사지은 깻잎을 몰래 따가는 것은 도둑질이다. 그러니 사가야 한다.”
라고 하시면서 지갑을 꺼내더니 1000원짜리 한 장을 둘둘 말아 튼튼하게 생긴 깨 나무에 붙들어 맸습니다.
깨밭의 주인이 그 돈을 발견했는지, 발견했다면 무슨 영문인지 알았겠습니까? 하지만 세 아들의 머릿속에는 평생 깨 나무에 매달린 1000원짜리가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이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자란 것은 당연하겠지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 보아주거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의 힘으로 성실하게 하는 사람, 자신의 일로 인하여 불이익이나 위험이 와도 신실하게 일하는 사람, 이들이 하나님 앞에도 신실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 이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커밍아웃(coming ou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밖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숨겨오던 사람이 당당하게 밝히는 것을 ‘커밍아웃’이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커밍아웃’해야 합니다. 즉 정직하고 신실한 생활로 어디에서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자신 있게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은밀하게 해야 할 선행이나 구제나 기도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은밀하게 해야 할 일들은 드러내고, 드러내야 할 자신의 악한 삶은 은밀하게 행함으로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잡히시자 그동안의 신의를 저버리고 죽음이 두려워서 도망했습니다. 반면에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모두가 두려워 도망갔을 때에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이사야26:2-3절을 봅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예할 수 있는 백성들의 자질이 두 가지로 언급됩니다. ‘의로움’과 ‘신실함’입니다. “신을 지킨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확고하게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자신에게는 선함이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붙잡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신실함이 돋보이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사독’이라는 사람입니다. 사독은 ‘아비아달’과 더불어 다윗 왕 시대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초대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의 후손으로써 ‘아히둡’의 아들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통 제사장 가문의 자손이었습니다. ‘사독’이라는 이름은 ‘의롭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독의 의롭고 신실한 성품은 다윗의 위기와 시련 가운데서 더욱 빛이 났습니다. 의롭고 신실한 사람은 세상이 어두울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를 불러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심도 하나님을 향하여 신의를 지키며 빛을 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입니다.
다윗의 총애를 받던 아들 압살롬이 4년간의 모의 끝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아버지를 반역한 것입니다. 다윗은 얼마나 급했던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채, 몇몇 신하들과 허급 지급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왔습니다. 압살롬은 순식간에 예루살렘 성을 점령했습니다. 다윗은 왕위를 아들에게 빼앗기고 생명조차 위태로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다윗의 은택을 입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입신영달을 꿈꾸며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수하에 들어갔습니다. 특히 다윗의 절친한 친구이자 모사였던 ‘아히도벨’배반은 다윗을 더욱 위태롭게 했습니다. 바로 이때, 사독은 자신의 지위와 명예와 목숨까지도 포기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다윗을 수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이는 예수님 곁에 있던 수많은 군중들이나 심지어는 제자들까지도 자신의 입신영달을 꿈꾸며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그러자 자신의 의도를 들켜버린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오늘의 많은 성도들도 자신의 어떤 유익을 생각하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이 온다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룟 유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마태복음7:13-14절을 봅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사독이 언약궤를 메고 다윗을 따른 것은 그 길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독에게 ‘언약궤를 메고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의도는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독의 믿음과 신의도 대단하지만 하나님을 향하는 다윗의 사랑과 믿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자신의 권력과 명예와 모든 재산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생명까지도 위태로운 지경에서 이러한 믿음의 발상을 한다는 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아쉬운 형편에서, 더욱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와 신실한 제사장인데 말입니다. 언약궤와 제사장은 다윗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25-26절을 보십시오. ‘자신의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고 하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이나,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던 에스더의 믿음을 생각나게 합니다. 올바른 믿음의 길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사독’이나,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돌려보내는 ‘다윗’이나, 그 왕의 그 신하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독은 비록 다윗의 권유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의 안전과 안일만을 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들인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시켜서 상황을 전달하며 다윗의 환궁을 도왔습니다. 이처럼 사독은 따라야 할 바른 길과 물리쳐야 할 길을 철저히 구분하고 성실하게 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앞서 보았던 이사야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 한 번은 솔로몬의 즉위 때였습니다.
다윗이 왕위를 회복하고 세월이 흘러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말년에는 왕위를 노리는 많은 음모가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다윗은 아들 솔로몬의 왕위 즉위를 사독에게 맡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독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아비아달’이 다윗을 배신하고, ‘아도니야’의 왕위 찬탈 음모에 가담했습니다. 아비아달은 압살롬이 반역할 때는 제사장으로서 사독과 함께 다윗 편에서 신실하게 행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말년에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독은 아비아달과의 오랜 우정을 버리면서까지 옳은 길을 따랐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생과 함께 여행 중에 나이아가라 폭포 밑을 흐르는 위험스러운 급류를 향해 배를 타고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짙은 안개처럼 물보라가 날리고, 물결은 폭포의 힘 때문에 뒤집힐 듯이 배를 흔들었습니다. 동생은 잔뜩 겁이 나서 안절부절못했습니다. 그것을 바라본 형은 노를 젓고 있는 사공에게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얼마나 자주 이곳을 건넜습니까?”
“지금까지 12년 동안 줄곧 이 일을 계속 했지요.”라고 사공이 대답했습니다.
“그럼 한번이라도 사고가 난 적이 있었습니까?”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배가 뒤집히거나 인명 피해가 전혀 없었단 말입니까?”
“선생님, 그런 일은 한번도 생기지 않았습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자 형은 동생에게,
“저 사공의 말을 들었지? 네가 저 사공보다 노를 더 잘 저을 수 없다면 나처럼 조용히 앉아서 저 사공을 믿고 이 여행을 즐겨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지요?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도 믿습니까? 그렇다면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보다 더 잘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의를 지키고 행하다보면, 세상의 친구도 잃고 때로는 오랜 우정도 저버릴 수밖에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38)
그러나 어떤 환경과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의를 지킨 사람에게는 또 다른 약속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10:29-30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처럼 하나님 앞에 신실했던 사독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대에 이르도록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시37:25-26절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여러분의 생애가 하나님 앞에서 신의를 지키는 신실한 삶을 이루셔서 가문이 복을 받는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