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331회
작성일
2002-12-21 14:58
♡♥♡ 낮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 누가복음2:8-14
*** 들어가는 말
성탄절이 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절을 많이 지나와서 그런지, 아니면 나이 탓인지, 세상의 환경 때문인지,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여튼 성탄에 대한 의미도 감격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저께는 가게에서 틀어놓은 christmas carol에 무척 기분이 상했습니다. 분명히 찬송가에 들어 있는 곡인데 상스러운 편곡에다가 개그맨들의 장난 섞인 가사와 창법이 너무나 저속하게 들렸습니다. 기쁜 성탄이어야 함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이 상하고 아픕니다.
세상은 성탄절을 X-mas로 만들어 놓고, 그야말로 성탄의 의미는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흥겨움을 위한 ‘미지수의 날’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물론 X-mas의 X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헬라어의 첫 알파벳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수학에서의 ‘미지수 X’처럼, 의미도 모르는 크리스마스로, 또는 상술과 쾌락에 젖은 성탄절로 만들었습니다.
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마저 성탄절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생일만큼도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행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의 사건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 지상 최대의 사건이며,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최고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 성탄의 의미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1.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세계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의 성탄절 이브였습니다. 독일과 벨기에의 국경 부근에 있는 ‘휴르트겐’ 숲 속 오두막집에서였습니다. 이 오두막집에는 엄마와 어린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탄절을 열흘 정도 앞두고 독일 군이 필사적인 막판 공세를 취하고 있었던 때에 이곳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성탄절 이브에도 전투는 치열했습니다. 대포소리가 밤의 숲을 뒤흔들었고 비행기들이 끊임없이 머리 위로 날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밤에 오두막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의 엄마가 문을 열었는데, 그곳에는 부상자를 부축한 채 지친 두 명의 미군이 서 있었습니다. 엄마는 미군을 숨겨놓았다가 독일 군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들어오게 했습니다. 엄마는 아들을 시켜 군인들이 몸을 녹일 수 있도록 해주라고 부탁하고는 이내 수탉 한 마리를 잡아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부상자를 보살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또 노크 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가 문을 열자 독일 병사 넷이 서 있었습니다. 아이는 겁이 났습니다. 미군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죽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아이의 엄마는 “프뢸리에 바이나하텐(froeliche Weihnachten, 메리 크리스마스)” 하며 인사를 했고, 독일 군인도 “프뢸리에 바이나하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독일 군인들은 자신들이 길을 잃고 오두막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엄숙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다른 손님 셋이 계신데, 아마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에요. 이곳에서 총질을 하면 안돼요.”라고 했습니다. 독일 병사가 물었습니다. “안에 누가 있습니까?” “미군입니다.” 순간 긴장이 흘렀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여러분은 내 아들 같고 안에 있는 사람들 역시 그래요. 부상을 입은 소년 하나가 죽음과 싸우고 있고, 그의 두 친구도 여러분처럼 길을 잃고 배고파 지쳐 있어요. 오늘 밤만은… 이 크리스마스이브만은 서로 죽이는 일을 잊읍시다.” 독일 군 하사는 잠시 멍하게 있었고, 아이의 엄마는 그들의 무기를 장작더미에 올려놓게 하고 들어오게 했습니다. 이어서 아이의 엄마는 미군에게 가서 자초지정을 이야기하고 역시 총을 받아 장작더미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군인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의자를 준비했고 먹을 것을 계속해서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대화할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밤새워 서로 먹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군인들은 서로에게 있던 포도주와 빵 덩어리를 꺼내었고 함께 먹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적의와 의심으로 살얼음판 같았던 분위기는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독일 하사가 미군 병사에게 지도를 보이더니 독일 군이 있는 곳을 피해 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죽일 수밖에 없던 적군이 성탄절로 인하여 화해를 한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악수를 나누고 자신들의 부대가 있는 방향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화해’를 위함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인류에게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14절처럼 메시아 탄생을 알리던 천사들이 평화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요한일서4:10절을 봅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도 메시아를 예언하면서 그 분을 “평화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화해’이며, ‘화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원수 된 관계를 청산하고 화목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영생입니다. 이 큰 은혜와 사랑을 받은 우리는 성탄을 생각하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고린도후서5:18-20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화목하는 직책을 받은 사람들로서 세상에 하나님이 이루신 화목을 전하고 또한 그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2. 성탄의 소식은 모두에게 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평화의 소식, 화해의 소식이 모든 인류에게 전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 놀라운 소식이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보다 앞서 이방인들이었던 동방의 박사들에게 메시아 탄생의 징조를 보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경건한 사람들인 ‘시므온’과 여선지자 ‘안나’에게 아기 예수님을 뵙는 큰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이 놀라운 소식은 정말 의외의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보이셨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메시아를 기다리는 소망은 모든 유대인들의 공동적인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과 율법사들, 열심당, 경건파,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대인들이 열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아였습니다. 특히 제사장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율법사 등 당시의 종교지도자 그룹들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메시아 탄생의 소식은 무식하고, 소외되고, 세인의 관심을 받지 못하거나, 경건함을 지켜오던 소수의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들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순전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산상수훈은 ‘팔복’이라 불리는 선포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 여덟 가지의 행복에 대한 말씀은 모두 자신의 욕망이 비어진 깨끗하고 순전한 마음들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겸손하고 깨끗한 자들에게 열려지는 것입니다. 계시록19:8절입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본문1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나님의 평화가 선포된 사람들은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평화는 제한적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고 평화가 선포된 사람들에게는 깨달아지고 알려집니다. 아무리 들어도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말씀으로만 주어졌지만 깨닫게 하시고 알려진 바가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3. 이 성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어 화목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부여받았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 내가 하나님과 화목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며,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계속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가까운 가족과 일가친척과 성도들과 이웃들과의 화목을 이루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자신의 마음을 낮출 때 가능합니다.
성탄의 평화가 선포되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한밤중에 양들을 지키는 자신들의 일에 충실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도 나이 많아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최선의 헌신과 충성을 다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그 먼 거리를 위대한 분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나아갔습니다. 세상적인 일이나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난 높은 곳에 마음을 두고 있으면 성실하지도 마음을 비우지도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면 평화가 아니라 깊은 갈등과 고통스러움이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신실하게 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목을 우리도 누리며 이루어갑시다.
성탄의 평화와 기쁨은 마음이 가난하며, 가치를 깨닫고 헌신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시므온이나 안나, 목자들처럼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 전해집니다. 서로 죽여야만 했던 미군과 독일 군이 성탄절에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탄생은 도저히 화해를 이룰 수 없는 관계까지도 화해케 하며 생명을 얻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어갑시다.
여러분과 서로 갈등으로 불편하게 된 가족과 이웃이 있습니까? 성도들 간에 보이지 않는 골이 파여 있지는 않습니까? 아내와 남편, 그리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서운 일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나를 위한 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하면서 담을 무너뜨립시다. 마구간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처럼, 내가 마음을 비우고, 내가 자리를 낮추면 화해를 이루고 평화를 이루고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2002년 성탄절에는 이 주님의 오심을 진정으로 느끼고 실천하고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성탄절이 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절을 많이 지나와서 그런지, 아니면 나이 탓인지, 세상의 환경 때문인지,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여튼 성탄에 대한 의미도 감격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저께는 가게에서 틀어놓은 christmas carol에 무척 기분이 상했습니다. 분명히 찬송가에 들어 있는 곡인데 상스러운 편곡에다가 개그맨들의 장난 섞인 가사와 창법이 너무나 저속하게 들렸습니다. 기쁜 성탄이어야 함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이 상하고 아픕니다.
세상은 성탄절을 X-mas로 만들어 놓고, 그야말로 성탄의 의미는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흥겨움을 위한 ‘미지수의 날’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물론 X-mas의 X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헬라어의 첫 알파벳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수학에서의 ‘미지수 X’처럼, 의미도 모르는 크리스마스로, 또는 상술과 쾌락에 젖은 성탄절로 만들었습니다.
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마저 성탄절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생일만큼도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행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의 사건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 지상 최대의 사건이며,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최고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 성탄의 의미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1.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세계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의 성탄절 이브였습니다. 독일과 벨기에의 국경 부근에 있는 ‘휴르트겐’ 숲 속 오두막집에서였습니다. 이 오두막집에는 엄마와 어린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탄절을 열흘 정도 앞두고 독일 군이 필사적인 막판 공세를 취하고 있었던 때에 이곳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성탄절 이브에도 전투는 치열했습니다. 대포소리가 밤의 숲을 뒤흔들었고 비행기들이 끊임없이 머리 위로 날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밤에 오두막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의 엄마가 문을 열었는데, 그곳에는 부상자를 부축한 채 지친 두 명의 미군이 서 있었습니다. 엄마는 미군을 숨겨놓았다가 독일 군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들어오게 했습니다. 엄마는 아들을 시켜 군인들이 몸을 녹일 수 있도록 해주라고 부탁하고는 이내 수탉 한 마리를 잡아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부상자를 보살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또 노크 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가 문을 열자 독일 병사 넷이 서 있었습니다. 아이는 겁이 났습니다. 미군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죽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아이의 엄마는 “프뢸리에 바이나하텐(froeliche Weihnachten, 메리 크리스마스)” 하며 인사를 했고, 독일 군인도 “프뢸리에 바이나하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독일 군인들은 자신들이 길을 잃고 오두막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엄숙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다른 손님 셋이 계신데, 아마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에요. 이곳에서 총질을 하면 안돼요.”라고 했습니다. 독일 병사가 물었습니다. “안에 누가 있습니까?” “미군입니다.” 순간 긴장이 흘렀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여러분은 내 아들 같고 안에 있는 사람들 역시 그래요. 부상을 입은 소년 하나가 죽음과 싸우고 있고, 그의 두 친구도 여러분처럼 길을 잃고 배고파 지쳐 있어요. 오늘 밤만은… 이 크리스마스이브만은 서로 죽이는 일을 잊읍시다.” 독일 군 하사는 잠시 멍하게 있었고, 아이의 엄마는 그들의 무기를 장작더미에 올려놓게 하고 들어오게 했습니다. 이어서 아이의 엄마는 미군에게 가서 자초지정을 이야기하고 역시 총을 받아 장작더미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군인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의자를 준비했고 먹을 것을 계속해서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대화할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밤새워 서로 먹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군인들은 서로에게 있던 포도주와 빵 덩어리를 꺼내었고 함께 먹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적의와 의심으로 살얼음판 같았던 분위기는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독일 하사가 미군 병사에게 지도를 보이더니 독일 군이 있는 곳을 피해 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죽일 수밖에 없던 적군이 성탄절로 인하여 화해를 한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악수를 나누고 자신들의 부대가 있는 방향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화해’를 위함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인류에게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14절처럼 메시아 탄생을 알리던 천사들이 평화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요한일서4:10절을 봅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도 메시아를 예언하면서 그 분을 “평화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화해’이며, ‘화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원수 된 관계를 청산하고 화목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영생입니다. 이 큰 은혜와 사랑을 받은 우리는 성탄을 생각하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고린도후서5:18-20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화목하는 직책을 받은 사람들로서 세상에 하나님이 이루신 화목을 전하고 또한 그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2. 성탄의 소식은 모두에게 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평화의 소식, 화해의 소식이 모든 인류에게 전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 놀라운 소식이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보다 앞서 이방인들이었던 동방의 박사들에게 메시아 탄생의 징조를 보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경건한 사람들인 ‘시므온’과 여선지자 ‘안나’에게 아기 예수님을 뵙는 큰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이 놀라운 소식은 정말 의외의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보이셨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메시아를 기다리는 소망은 모든 유대인들의 공동적인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과 율법사들, 열심당, 경건파,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대인들이 열망하고 기다리던 메시아였습니다. 특히 제사장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율법사 등 당시의 종교지도자 그룹들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메시아 탄생의 소식은 무식하고, 소외되고, 세인의 관심을 받지 못하거나, 경건함을 지켜오던 소수의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들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순전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산상수훈은 ‘팔복’이라 불리는 선포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 여덟 가지의 행복에 대한 말씀은 모두 자신의 욕망이 비어진 깨끗하고 순전한 마음들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겸손하고 깨끗한 자들에게 열려지는 것입니다. 계시록19:8절입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본문1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나님의 평화가 선포된 사람들은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평화는 제한적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고 평화가 선포된 사람들에게는 깨달아지고 알려집니다. 아무리 들어도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말씀으로만 주어졌지만 깨닫게 하시고 알려진 바가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3. 이 성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어 화목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부여받았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 내가 하나님과 화목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며,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계속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가까운 가족과 일가친척과 성도들과 이웃들과의 화목을 이루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자신의 마음을 낮출 때 가능합니다.
성탄의 평화가 선포되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한밤중에 양들을 지키는 자신들의 일에 충실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도 나이 많아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최선의 헌신과 충성을 다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그 먼 거리를 위대한 분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나아갔습니다. 세상적인 일이나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난 높은 곳에 마음을 두고 있으면 성실하지도 마음을 비우지도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면 평화가 아니라 깊은 갈등과 고통스러움이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신실하게 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목을 우리도 누리며 이루어갑시다.
성탄의 평화와 기쁨은 마음이 가난하며, 가치를 깨닫고 헌신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시므온이나 안나, 목자들처럼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 전해집니다. 서로 죽여야만 했던 미군과 독일 군이 성탄절에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탄생은 도저히 화해를 이룰 수 없는 관계까지도 화해케 하며 생명을 얻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어갑시다.
여러분과 서로 갈등으로 불편하게 된 가족과 이웃이 있습니까? 성도들 간에 보이지 않는 골이 파여 있지는 않습니까? 아내와 남편, 그리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서운 일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나를 위한 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하면서 담을 무너뜨립시다. 마구간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처럼, 내가 마음을 비우고, 내가 자리를 낮추면 화해를 이루고 평화를 이루고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2002년 성탄절에는 이 주님의 오심을 진정으로 느끼고 실천하고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