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을 위로하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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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12-07 12:38
♡♥♡ 내 백성을 위로하라. / 이사야40:1-11
***들어가는 말
사람의 행복에 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관심의 역사는 창조 때부터 시작합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세상의 만물과 모든 환경을 창조하신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셔서 하나님의 세계를 마음껏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관심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찾아다녔습니다. 즉 주어진 환경 속에서 만족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전도서7:29절에서는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꾀를 낸 결과는 ‘피곤한 생애’였습니다. 왜냐고요? 사람의 꾀는 ‘죄’를 불러들였고, 죄는 인간의 평안을 빼앗아갔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평안도 멀어지고, 관계가 끊어지면 평안도 끊어집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것’입니다. 좀 더 평안하고 좀 더 즐겁고자 한 것이 오히려 모든 것을 잃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살길을 주셨습니다. 곧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입니다. 하나님과 처음 사람 아담이 선악과에 대하여 약속을 세웠듯이,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이 맺은 또 하나의 약속이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지키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율법에 충실했으나 갈수록 법은 많아져 갔고 사람들은 그 많은 율법을 모두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외식적인 인간이 되어갔고, 오히려 율법 때문에 죄를 알게 되고, 죄를 해결하지 못한 채 죽어갔습니다. 로마서3:20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인생을 위하여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며, 하나님의 뜻을 전함으로서 백성들이 방황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백성들이 고집스럽게 잘못된 길을 갈 때에는 권면과 징계와 심판에 대한 경고로 인도했으며,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으로 절망할 때에는 회복에 대한 소망을 제시하며 위로와 격려로 인도했습니다. 본문 말씀이 후자에 속한 예가 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시면서,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고 외치라 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로 받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났음을 알리라는 말씀입니다. 노예생활 중인 이스라엘에게는 분명히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곧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것이고, 율법에 메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빅 카드를 내 놓으셨습니다. 본문3-5절의 말씀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1장에서 ‘세례요한’의 출생예고로 인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42장에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등장하고, 53장에서는 인류의 죄를 위하여 고난당하시는 메시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인류의 완전한 위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한 서곡으로 본문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대강절 2주를 맞이하면서 온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1. 위로의 시작은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입니다.
본문6-8절을 봅시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하나님께서는 외치는 자에게 ‘허무하고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과 피조 세계를 주관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창조주이시며, 피조 세계를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봅시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수없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듯하기도 했지만 전혀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1:2-4절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또한 호세아4:1절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라고 탄식하시면서 6절에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인생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죄에 매어있는 상태로는 하나님의 위로를 알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기 위하여 먼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자신들이 범죄한 자들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 구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시편91: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2. 하나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로라고 합니까? 국어사전에서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느끼는 고달픔이나 괴로움을 풀도록 따뜻이 대하여 줌.”, “수고함을 어루만져 치사함”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삶에 대한 위로도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는 이러한 세상적인 삶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위로는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위로를 깨달을 수 있는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작가인 ‘케이트 밀러’라는 분이 자신의 아버지의 장례식을 회고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장례식 예배가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위로하기 위하여 우리 집에 왔습니다. 그 방문자들 중에는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백발을 지닌 키가 큰 사람’이 한 분 있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카우보이모자를 들고 저녁 내내 소파 한쪽 끝에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갔을 때 마침내 그분이 자신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너의 아버지를 안단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는 밀러를 똑바로 쳐다보고 악수를 한 후 돌아서서 떠났습니다. 밀러는 그분에 대하여,
“나는 결코 그 사람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조문 왔던 사람들 중 다른 사람은 아무도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가 와서 슬픔에 잠긴 우리와 아무런 말도 없이 저녁 내내 앉아 있다가 마침내 아버지에 대해 한마디 말을 남기고 떠난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아버지와 우리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나는 그 분의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분이 그때 나와 함께 있어 준 것은 나에게 굉장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밀러는 친구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 애써서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깨달았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있어줄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이 아픈 사람이나 심지어는 감옥에 갇힌 사람을 위문할 때 적용되는 기본적인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입으로 위로를 표현하고 설득력 있는 말을 하는 것이 그냥 와서 염려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함께 있어준다는 것’은 병자나 슬픔 당한 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함께 해 주시는 분이 나의 형편을 이해하시며,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실 때에 그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옛말에 “과부가 홀아비 사정을 안다.”고 했습니다. 비슷한 처지에 있거나, 같은 것을 경험한 사람의 위로가 가장 큰 것은 그 형편을 알기 때문에 가장 적절한 위로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되셔서 가장 비천한 것에서부터 최악의 경우까지 친히 담당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능력의 주님이시니 그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사실에 대하여 히브리서2:18절에서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많은 환난 속에서 산 사람이라고 할 만큼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환난이 많았던 만큼 때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로 유대인들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23:11절에서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고 위로하시며 격려하셨습니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폭풍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며 죽음이 문턱에 왔을 때에도 주님은 바울 곁에 계셨습니다. 사도행전27:23-24절입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이처럼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는 현실적인 삶에서 역사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인생에게 행하신 가장 큰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생의 보장이 되셨으니 이보다 더한 위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3. 하나님의 위로는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이 큰 하나님의 위로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본문2절에서,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겸손하게 순종한 사실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아직 시행되지 않은 예고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미 시행된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계획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과 하나님을 배반한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이 예고되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멍에를 만들어 목에 걸도록 한 예레미야 선지자를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모든 것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주었으니 너희가 그 다스림에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바벨론의 침공은 유다를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므로 순하게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적국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가두었으며, 하나님의 뜻에 불복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결국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하여 함락되었으며, 마지막까지 남겨진 사람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들은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풀릴 때까지 70년을 노예로 살았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본문3,4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산은 낮아져야 되고, 골짜기는 높아져야 되고, 첩경을 곧게 해야’합니다. 바리새주의적인 교만, 자기 의를 의지하는 교만, 잘났다고 하는 교만, 뭔가 자기가 이룬 것같이 생각하는 교만, 다 낮아져야합니다. 그리고 원망과 미움과 멸시로 깊어진 골은 주님의 사랑으로 매워져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하신 은혜입니다. 즉 비록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징계라 할지라도 순종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다가오는 대강절의 기간은 가장 큰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는 때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삶에 찌들어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생각합시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죄 사함과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이 위로를 전합시다. 아직 세상의 삶에 매어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받은 위로와 격려로 전합시다. 위로와 격려는 베풀수록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리하여 이 대강절 기간이 주님을 기리며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되는 사랑과 평화의 계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는 말
사람의 행복에 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관심의 역사는 창조 때부터 시작합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세상의 만물과 모든 환경을 창조하신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셔서 하나님의 세계를 마음껏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관심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찾아다녔습니다. 즉 주어진 환경 속에서 만족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전도서7:29절에서는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꾀를 낸 결과는 ‘피곤한 생애’였습니다. 왜냐고요? 사람의 꾀는 ‘죄’를 불러들였고, 죄는 인간의 평안을 빼앗아갔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평안도 멀어지고, 관계가 끊어지면 평안도 끊어집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것’입니다. 좀 더 평안하고 좀 더 즐겁고자 한 것이 오히려 모든 것을 잃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살길을 주셨습니다. 곧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입니다. 하나님과 처음 사람 아담이 선악과에 대하여 약속을 세웠듯이,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이 맺은 또 하나의 약속이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지키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율법에 충실했으나 갈수록 법은 많아져 갔고 사람들은 그 많은 율법을 모두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외식적인 인간이 되어갔고, 오히려 율법 때문에 죄를 알게 되고, 죄를 해결하지 못한 채 죽어갔습니다. 로마서3:20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인생을 위하여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며, 하나님의 뜻을 전함으로서 백성들이 방황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백성들이 고집스럽게 잘못된 길을 갈 때에는 권면과 징계와 심판에 대한 경고로 인도했으며,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으로 절망할 때에는 회복에 대한 소망을 제시하며 위로와 격려로 인도했습니다. 본문 말씀이 후자에 속한 예가 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시면서,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고 외치라 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로 받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났음을 알리라는 말씀입니다. 노예생활 중인 이스라엘에게는 분명히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곧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것이고, 율법에 메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빅 카드를 내 놓으셨습니다. 본문3-5절의 말씀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1장에서 ‘세례요한’의 출생예고로 인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42장에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등장하고, 53장에서는 인류의 죄를 위하여 고난당하시는 메시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인류의 완전한 위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한 서곡으로 본문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대강절 2주를 맞이하면서 온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1. 위로의 시작은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입니다.
본문6-8절을 봅시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하나님께서는 외치는 자에게 ‘허무하고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과 피조 세계를 주관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창조주이시며, 피조 세계를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봅시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수없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듯하기도 했지만 전혀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1:2-4절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또한 호세아4:1절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라고 탄식하시면서 6절에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인생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죄에 매어있는 상태로는 하나님의 위로를 알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기 위하여 먼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자신들이 범죄한 자들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 구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시편91: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2. 하나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로라고 합니까? 국어사전에서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느끼는 고달픔이나 괴로움을 풀도록 따뜻이 대하여 줌.”, “수고함을 어루만져 치사함”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삶에 대한 위로도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는 이러한 세상적인 삶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위로는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위로를 깨달을 수 있는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작가인 ‘케이트 밀러’라는 분이 자신의 아버지의 장례식을 회고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장례식 예배가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위로하기 위하여 우리 집에 왔습니다. 그 방문자들 중에는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백발을 지닌 키가 큰 사람’이 한 분 있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카우보이모자를 들고 저녁 내내 소파 한쪽 끝에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갔을 때 마침내 그분이 자신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너의 아버지를 안단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는 밀러를 똑바로 쳐다보고 악수를 한 후 돌아서서 떠났습니다. 밀러는 그분에 대하여,
“나는 결코 그 사람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조문 왔던 사람들 중 다른 사람은 아무도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가 와서 슬픔에 잠긴 우리와 아무런 말도 없이 저녁 내내 앉아 있다가 마침내 아버지에 대해 한마디 말을 남기고 떠난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아버지와 우리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나는 그 분의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분이 그때 나와 함께 있어 준 것은 나에게 굉장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밀러는 친구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 애써서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깨달았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있어줄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이 아픈 사람이나 심지어는 감옥에 갇힌 사람을 위문할 때 적용되는 기본적인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입으로 위로를 표현하고 설득력 있는 말을 하는 것이 그냥 와서 염려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함께 있어준다는 것’은 병자나 슬픔 당한 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함께 해 주시는 분이 나의 형편을 이해하시며,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실 때에 그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옛말에 “과부가 홀아비 사정을 안다.”고 했습니다. 비슷한 처지에 있거나, 같은 것을 경험한 사람의 위로가 가장 큰 것은 그 형편을 알기 때문에 가장 적절한 위로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되셔서 가장 비천한 것에서부터 최악의 경우까지 친히 담당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능력의 주님이시니 그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사실에 대하여 히브리서2:18절에서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많은 환난 속에서 산 사람이라고 할 만큼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환난이 많았던 만큼 때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로 유대인들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23:11절에서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고 위로하시며 격려하셨습니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폭풍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며 죽음이 문턱에 왔을 때에도 주님은 바울 곁에 계셨습니다. 사도행전27:23-24절입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이처럼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는 현실적인 삶에서 역사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인생에게 행하신 가장 큰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생의 보장이 되셨으니 이보다 더한 위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3. 하나님의 위로는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이 큰 하나님의 위로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본문2절에서,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겸손하게 순종한 사실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아직 시행되지 않은 예고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미 시행된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계획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과 하나님을 배반한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이 예고되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멍에를 만들어 목에 걸도록 한 예레미야 선지자를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모든 것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주었으니 너희가 그 다스림에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바벨론의 침공은 유다를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므로 순하게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적국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가두었으며, 하나님의 뜻에 불복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결국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하여 함락되었으며, 마지막까지 남겨진 사람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들은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풀릴 때까지 70년을 노예로 살았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본문3,4절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산은 낮아져야 되고, 골짜기는 높아져야 되고, 첩경을 곧게 해야’합니다. 바리새주의적인 교만, 자기 의를 의지하는 교만, 잘났다고 하는 교만, 뭔가 자기가 이룬 것같이 생각하는 교만, 다 낮아져야합니다. 그리고 원망과 미움과 멸시로 깊어진 골은 주님의 사랑으로 매워져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하신 은혜입니다. 즉 비록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징계라 할지라도 순종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다가오는 대강절의 기간은 가장 큰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는 때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삶에 찌들어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생각합시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죄 사함과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이 위로를 전합시다. 아직 세상의 삶에 매어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받은 위로와 격려로 전합시다. 위로와 격려는 베풀수록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리하여 이 대강절 기간이 주님을 기리며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되는 사랑과 평화의 계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