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이 분명한 삶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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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11-30 17:43
♡♥♡ 목적이 분명한 삶 / 마태복음6:1
*** 들어가는 말
서울의 어느 큰 교회에서 신앙세미나를 하면서 문학평론가로 유명한 모 교수를 강사로 초빙했습니다. 그런데 이 교수는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분명히 공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초청한 이유는 ‘왜 예수를 믿지 않는지 그 이유를 듣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 교수가 그날 강의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자신은 미션 스쿨(기독교계통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이고, 산상수훈도 나름대로 다 알고 있으며, 어떤 때는 연구도 해 본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은 그 자체가 훌륭한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참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산상수훈대로 사는 교인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고, 그것이 자기가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은 말만 요란하게 떠들 뿐 실제 삶에서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비꼬는 투의 제안을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에 산상수훈대로 살고 있는 교회를 알고 있다면 저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예수 믿겠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논리로 성도를 농락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론은 그럴 듯하지만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가슴 답답하고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5,6,7장의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별칭입니다. 이 가르침이 ‘사람의 삶에 대한 빼어난 교훈’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입니다. 본문이 이 산상수훈의 한 가운데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너무나 평범한 말씀이지만 모든 사람의 가슴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이 한 말씀만 가지고도 그대로 지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진정으로 지키려면 먼저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식’은 ‘이중인격’이며 ‘이중적인 삶’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율법사 등 지도자 그룹에서 특히 심했습니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쓴 명작소설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란 책을 아시지요.
어느 마을에 마음씨 착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흠모한 나머지 ‘혹시 천사가 사람이 되어 내려온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전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마을에서는 밤마다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살인, 방화, 절도, 소녀 유괴 등. 끔찍한 범죄사건이 밤마다 일어나서 마을을 온통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칼’경이란 유명인사가 살해되었는데 살해도구가 단장(지팡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단장을 조사해본 결과 ‘앤더슨’이란 변호사가 ‘지킬’박사에게 준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지킬 박사는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지킬 박사의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았더니, ‘하이드’란 사람이 지킬 박사의 옷을 입고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결국 천사같이 착한 사람인 지킬 박사와 악마 같은 하이드는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지킬 박사는 밤마다 이상한 약을 먹고 마음도 얼굴도 흉악해져서 하이드란 사람이 되어 그런 끔찍한 죄를 즐기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소설이 명작으로 불리는 이유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두 성품을 사실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선한성품’과 ‘악한성품’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7:19절에서 자신을 표현하기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했고, 21절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성품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위선적인 삶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본문 이하에서는 성도에게서 가장 나타나기 쉬운 몇 가지의 위선적인 삶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구제할 때에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나팔을 불어 알리지 말고, 기도할 때에 자신의 경건함을 드러내려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 하지 말고, 금식할 때에 몰골을 흉하게 하여 자신의 금식을 나타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지금도 성도들이 가장 큰 자랑거리로 여기는 일들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너무도 분명한 이중적인 성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고민에서 벗어났다고 고백합니다.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성도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 것만이 이중적인 성품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씀합니다. 이는 목적이 분명한 삶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10: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도 바울은 모범을 보였습니다. 갈라디아서6:14절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으며, 빌립보서3:14절에서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신의 목적을 선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세상의 영화를 목적으로 한다면, 세상적인 출신과 부와 명예와 자신의 선행을 나타내고 자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네 면으로 된 접는 명함을 본 적 있습니까? 저는 얼마 전에 그런 명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좁은 앞뒷면으로는 도저히 부족해서 앞면에는 칼라 사진을 실었고, 안쪽 두 면에는 화려한 경력이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연락처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을 보다 더 많이 알리기 위함이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자신을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느 면에서도 진실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5: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실하고 선한 삶으로 자신을 나타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5:9절에서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빛으로 나타나는 삶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한 생활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탓하지 말고, 앞서 가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주님이 가시는 길로 묵묵하게 따라갑시다. 그 길에는 진정한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남들이야 사람을 보고 가든 세상을 보고 가든 우리는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갑시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오직 주님만 아시도록 그렇게 섬기며 삽시다. 주님은 그 크신 은혜를 베푸시면서도 단 한 번도 광고를 하신 적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변함도 없으시고 흔들림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삶으로 대복교회 성도 모두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서울의 어느 큰 교회에서 신앙세미나를 하면서 문학평론가로 유명한 모 교수를 강사로 초빙했습니다. 그런데 이 교수는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분명히 공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초청한 이유는 ‘왜 예수를 믿지 않는지 그 이유를 듣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 교수가 그날 강의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자신은 미션 스쿨(기독교계통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이고, 산상수훈도 나름대로 다 알고 있으며, 어떤 때는 연구도 해 본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은 그 자체가 훌륭한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참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산상수훈대로 사는 교인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고, 그것이 자기가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은 말만 요란하게 떠들 뿐 실제 삶에서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비꼬는 투의 제안을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에 산상수훈대로 살고 있는 교회를 알고 있다면 저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예수 믿겠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논리로 성도를 농락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론은 그럴 듯하지만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가슴 답답하고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5,6,7장의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별칭입니다. 이 가르침이 ‘사람의 삶에 대한 빼어난 교훈’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입니다. 본문이 이 산상수훈의 한 가운데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너무나 평범한 말씀이지만 모든 사람의 가슴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이 한 말씀만 가지고도 그대로 지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진정으로 지키려면 먼저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식’은 ‘이중인격’이며 ‘이중적인 삶’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율법사 등 지도자 그룹에서 특히 심했습니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쓴 명작소설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란 책을 아시지요.
어느 마을에 마음씨 착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흠모한 나머지 ‘혹시 천사가 사람이 되어 내려온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전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마을에서는 밤마다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살인, 방화, 절도, 소녀 유괴 등. 끔찍한 범죄사건이 밤마다 일어나서 마을을 온통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칼’경이란 유명인사가 살해되었는데 살해도구가 단장(지팡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단장을 조사해본 결과 ‘앤더슨’이란 변호사가 ‘지킬’박사에게 준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지킬 박사는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지킬 박사의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았더니, ‘하이드’란 사람이 지킬 박사의 옷을 입고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결국 천사같이 착한 사람인 지킬 박사와 악마 같은 하이드는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지킬 박사는 밤마다 이상한 약을 먹고 마음도 얼굴도 흉악해져서 하이드란 사람이 되어 그런 끔찍한 죄를 즐기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소설이 명작으로 불리는 이유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두 성품을 사실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선한성품’과 ‘악한성품’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7:19절에서 자신을 표현하기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했고, 21절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성품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위선적인 삶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본문 이하에서는 성도에게서 가장 나타나기 쉬운 몇 가지의 위선적인 삶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구제할 때에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나팔을 불어 알리지 말고, 기도할 때에 자신의 경건함을 드러내려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 하지 말고, 금식할 때에 몰골을 흉하게 하여 자신의 금식을 나타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지금도 성도들이 가장 큰 자랑거리로 여기는 일들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너무도 분명한 이중적인 성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고민에서 벗어났다고 고백합니다.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성도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 것만이 이중적인 성품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씀합니다. 이는 목적이 분명한 삶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10: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도 바울은 모범을 보였습니다. 갈라디아서6:14절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으며, 빌립보서3:14절에서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신의 목적을 선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세상의 영화를 목적으로 한다면, 세상적인 출신과 부와 명예와 자신의 선행을 나타내고 자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네 면으로 된 접는 명함을 본 적 있습니까? 저는 얼마 전에 그런 명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좁은 앞뒷면으로는 도저히 부족해서 앞면에는 칼라 사진을 실었고, 안쪽 두 면에는 화려한 경력이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연락처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을 보다 더 많이 알리기 위함이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자신을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느 면에서도 진실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5: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실하고 선한 삶으로 자신을 나타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5:9절에서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빛으로 나타나는 삶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한 생활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탓하지 말고, 앞서 가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주님이 가시는 길로 묵묵하게 따라갑시다. 그 길에는 진정한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남들이야 사람을 보고 가든 세상을 보고 가든 우리는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갑시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오직 주님만 아시도록 그렇게 섬기며 삽시다. 주님은 그 크신 은혜를 베푸시면서도 단 한 번도 광고를 하신 적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변함도 없으시고 흔들림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삶으로 대복교회 성도 모두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