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484회
작성일
2002-11-16 11:13
♡♥♡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 고전15:9-11
*** 들어가는 말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흔히 일년에 두 차례, 보리추수 후에 지내는 맥추감사절과 가을 추수를 마치고 드리는 추수감사절이면 ‘감사’라는 주제가 봇물을 이룹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내용’ 또한 생활 속에서 입은 은혜를 헤아리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라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사는 신앙의 초보에 속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게 잘 해준 분에게 잘 대해주고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5:46-4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제, 우리의 감사는 좀 더 성숙해야합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를 엮은 것입니다. 캠프를 운영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몸이 많이 뚱뚱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특히 낯선 사람일 경우에는 무척 당황스러워했습니다.
어느 주일 오후였습니다. 대형버스 한 대가 장거리 여행을 마치고 캠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캠프 운영자는 사무실 창문을 통하여 버스가 주차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차를 운전한 운전기사가 내렸는데 너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는 20세의 뇌성마비 장애자였습니다. 그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똑바로 걷기는커녕 손발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고, 모습은 보기조차 흉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그는 사무실로 와서 캠프에 모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자리를 갖도록 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식사 후에 그는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그는 긴장해서 두 손을 꼭 모으고 준비했던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음식을 똑바로 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제대로 걸을 수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똑바로 걷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께서는 또한 저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독특한 존재로 만드셨듯이 저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 뚱뚱한 캠프 운영자는 자신이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결코 하나님께 감사한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멀리 볼 것도 없이 지나온 일년이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들이었습니까?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범사에 감사”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까?
1.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로 보낸 바울의 글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자신의 간증형식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앞 절인 8절에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실을 간증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을 표현하는 글을 보십시오. 본문9-10절입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조상 때부터 물려내려 온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유명한 율법학자였던 가말리엘 문하(門下)에서 배운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당시의 왕과 대제사장들도 그를 인정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율법에 열심이었고 헌신적이었습니다. 유대교를 지키기 위하여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증인으로 서기까지 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없애기 위하여 종교당국의 허가서를 받아 원정을 다닐 만큼 확신에 찬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낮추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 속에는 바울은 자신의 지금 위치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1)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그냥 ‘교회’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있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핍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핍박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4)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죄만해도 죽어 마땅하다는 고백입니다.
2) 바울은 자신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과거에 자신이 ‘방해를 놓는 사람이었고’, ‘비방하는 사람이었고’, ‘해를 끼치는 사람이었다.’(딤전1:13)라고 제자인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다 드러내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는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3)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처럼 바울 자신은 죽어 마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큰 은혜를 입어 사도가 되었음을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처럼 고생되는 일이 오히려 분에 넘치는 것이며, 부득불 해야 할 일임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나 자신의 형편을 보거나, 세상과 비교해서 자신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할 생각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남들은 하나님을 모를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벌 받기는커녕 잘만 되는데, 나는 이게 뭐냐!’라는 불평이 나오겠지요. 만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라면 당연한 말일 것입니다. 본문 뒤쪽의 19절을 봅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바울은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본 것은 이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통하여 얻게 되는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서8: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 큰 영광으로 향하는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를 넘어서 감격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부활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우리도 바울이 이 글을 기록하는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사역을 다 마치고 영광의 자리로 들어갔겠지만 지금 우리는 그 자리를 바라보고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보다도 더 비천하고 자랑할 것도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러한 우리를 이 영광의 자리에 서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2. 내가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때때로 부르는 찬송인 356장 4절의 가사에는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받은 “만 가지 은혜”가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냥 별 생각 없이 찬송이니까 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그 은혜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대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가로 받을만한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이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다는 말할 수 없겠지만 가장 중요한 순서로 몇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1) 나를 구원하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이미 죽어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육신적으로 따져도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 죽음의 죄에서 건져서 생명으로 옮기신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5:24절에서 선언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은혜를 언제 받았습니까? 로마서5:8절을 봅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確證)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일 때에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없습니다. 값없이 주셨기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2:8절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2) 나를 인도, 보호하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깨닫지 못하는 중에도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시편37:2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셨고, 잠언16: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시편66:9절에서는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라고 확실한 보호를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지치고 피곤하여 기도하지 못할 때에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시며,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중보하십니다. 요한복음17:24절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 나의 미래를 보장하시는 은혜입니다. 세상은 장래의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를 잡아보려고 수많은 보험 상품들이 나와 있지만 영의 생명까지 보장하는 보험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세상과 함께 그 운명을 같이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친 듯이 바쁘게 살며,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쾌락에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장래가 확실하게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생명보험증권’을 소개합니다. 먼저 앞에서 본 요한복음5: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어서 11:25-26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주님의 이 말씀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보험증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 종류의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요? 그 보험은 육신의 생활을 조금 더 안정되게 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명은 물론이고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는 전혀 효과를 발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 이를 때까지 모든 육신의 생활과 영의 생명을 보장하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지금 현재 나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감사의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스페인에 알폰소12세라는 그리스도인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궁전에서 자라는 소년들이 ‘식사기도를 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왕은 연회를 열고 소년들을 모두 초대했습니다. 식탁은 산해진미로 가득 차 있었고, 소년들은 맛있게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식사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연회 도중에 더럽고 누추한 옷을 입은 거지 하나가 들어 왔습니다. 그 거지도 왕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소년들은 놀랐지만 왕이 거지를 쫓아낼 것이라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식사를 끝낸 거지는 아무 말 없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소년들의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야비하고 천한 거지같으니!” 그러나 왕은 그들을 조용히 하라고 명하고는 소년들에게 말했습니다. “소년들아, 너희들은 저 거지보다 더 뻔뻔스럽고 대담한 사람들이다. 너희들은 매일 하나님이 주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거나 은총을 바라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 온 세월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고난과 절망까지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임을 믿고 감사합시다.
*** 들어가는 말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흔히 일년에 두 차례, 보리추수 후에 지내는 맥추감사절과 가을 추수를 마치고 드리는 추수감사절이면 ‘감사’라는 주제가 봇물을 이룹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내용’ 또한 생활 속에서 입은 은혜를 헤아리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라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사는 신앙의 초보에 속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게 잘 해준 분에게 잘 대해주고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5:46-4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제, 우리의 감사는 좀 더 성숙해야합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를 엮은 것입니다. 캠프를 운영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몸이 많이 뚱뚱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특히 낯선 사람일 경우에는 무척 당황스러워했습니다.
어느 주일 오후였습니다. 대형버스 한 대가 장거리 여행을 마치고 캠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캠프 운영자는 사무실 창문을 통하여 버스가 주차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차를 운전한 운전기사가 내렸는데 너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는 20세의 뇌성마비 장애자였습니다. 그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똑바로 걷기는커녕 손발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고, 모습은 보기조차 흉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그는 사무실로 와서 캠프에 모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자리를 갖도록 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식사 후에 그는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그는 긴장해서 두 손을 꼭 모으고 준비했던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음식을 똑바로 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제대로 걸을 수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똑바로 걷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께서는 또한 저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독특한 존재로 만드셨듯이 저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 뚱뚱한 캠프 운영자는 자신이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결코 하나님께 감사한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멀리 볼 것도 없이 지나온 일년이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들이었습니까?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범사에 감사”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까?
1.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로 보낸 바울의 글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자신의 간증형식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앞 절인 8절에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실을 간증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을 표현하는 글을 보십시오. 본문9-10절입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조상 때부터 물려내려 온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유명한 율법학자였던 가말리엘 문하(門下)에서 배운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당시의 왕과 대제사장들도 그를 인정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율법에 열심이었고 헌신적이었습니다. 유대교를 지키기 위하여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증인으로 서기까지 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없애기 위하여 종교당국의 허가서를 받아 원정을 다닐 만큼 확신에 찬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낮추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 속에는 바울은 자신의 지금 위치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1)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그냥 ‘교회’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있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핍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핍박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4)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죄만해도 죽어 마땅하다는 고백입니다.
2) 바울은 자신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과거에 자신이 ‘방해를 놓는 사람이었고’, ‘비방하는 사람이었고’, ‘해를 끼치는 사람이었다.’(딤전1:13)라고 제자인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다 드러내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는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3)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처럼 바울 자신은 죽어 마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큰 은혜를 입어 사도가 되었음을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처럼 고생되는 일이 오히려 분에 넘치는 것이며, 부득불 해야 할 일임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나 자신의 형편을 보거나, 세상과 비교해서 자신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할 생각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남들은 하나님을 모를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벌 받기는커녕 잘만 되는데, 나는 이게 뭐냐!’라는 불평이 나오겠지요. 만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라면 당연한 말일 것입니다. 본문 뒤쪽의 19절을 봅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바울은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본 것은 이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통하여 얻게 되는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서8: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 큰 영광으로 향하는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를 넘어서 감격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부활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우리도 바울이 이 글을 기록하는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사역을 다 마치고 영광의 자리로 들어갔겠지만 지금 우리는 그 자리를 바라보고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보다도 더 비천하고 자랑할 것도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러한 우리를 이 영광의 자리에 서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2. 내가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때때로 부르는 찬송인 356장 4절의 가사에는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받은 “만 가지 은혜”가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냥 별 생각 없이 찬송이니까 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그 은혜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대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가로 받을만한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이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다는 말할 수 없겠지만 가장 중요한 순서로 몇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1) 나를 구원하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이미 죽어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육신적으로 따져도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 죽음의 죄에서 건져서 생명으로 옮기신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5:24절에서 선언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은혜를 언제 받았습니까? 로마서5:8절을 봅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確證)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일 때에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없습니다. 값없이 주셨기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2:8절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2) 나를 인도, 보호하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깨닫지 못하는 중에도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시편37:2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셨고, 잠언16: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시편66:9절에서는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라고 확실한 보호를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지치고 피곤하여 기도하지 못할 때에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시며,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중보하십니다. 요한복음17:24절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 나의 미래를 보장하시는 은혜입니다. 세상은 장래의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를 잡아보려고 수많은 보험 상품들이 나와 있지만 영의 생명까지 보장하는 보험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세상과 함께 그 운명을 같이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친 듯이 바쁘게 살며,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쾌락에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장래가 확실하게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생명보험증권’을 소개합니다. 먼저 앞에서 본 요한복음5: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어서 11:25-26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주님의 이 말씀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보험증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 종류의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요? 그 보험은 육신의 생활을 조금 더 안정되게 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명은 물론이고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는 전혀 효과를 발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 이를 때까지 모든 육신의 생활과 영의 생명을 보장하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지금 현재 나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감사의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스페인에 알폰소12세라는 그리스도인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궁전에서 자라는 소년들이 ‘식사기도를 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왕은 연회를 열고 소년들을 모두 초대했습니다. 식탁은 산해진미로 가득 차 있었고, 소년들은 맛있게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식사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연회 도중에 더럽고 누추한 옷을 입은 거지 하나가 들어 왔습니다. 그 거지도 왕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소년들은 놀랐지만 왕이 거지를 쫓아낼 것이라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식사를 끝낸 거지는 아무 말 없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소년들의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야비하고 천한 거지같으니!” 그러나 왕은 그들을 조용히 하라고 명하고는 소년들에게 말했습니다. “소년들아, 너희들은 저 거지보다 더 뻔뻔스럽고 대담한 사람들이다. 너희들은 매일 하나님이 주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거나 은총을 바라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 온 세월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고난과 절망까지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임을 믿고 감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