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천국의 사람들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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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11-09 13:47
♡♥♡ 작은 천국의 사람들 / 로마서14:1-12
***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사는 세계는 5대양 6대주에 194개국이 있으며, 60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1999년 10월 12일 0시 1분을 기하여 유엔 인구 국에서는 세계의 인구를 60억으로 발표했습니다. 2002년 현재에는 61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1960년에 세계 인구를 30억이라고 했는데, 40년 만에 배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2001년의 통계가 4700만 명이 넘어섰습니다.
이 많은 나라와 민족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60억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 한 사람도 같은 지문이나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개개인에게 독창적인 성격과 재능들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거창하게 서론을 꺼내는 이유는 각 사람이 지닌 개성과 삶의 독창성을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즉 세계 60억의 사람들은 제각기 독창적인 성격과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개인의 개성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수염을 그렇게 기릅니까?”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수염을 기르다니요? 나는 수염을 기르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저는 면도를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수염을 기르는 것’과 ‘면도를 하지 않는 것’은 같은 말 같지만 분명한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생각이 다를 때에 “당신 생각이 틀렸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보는 견해가 달라서 나타나는 생각의 차이이지 ‘틀렸다.’고 할 만큼 ‘잘못된 생각’은 아닙니다. 우리는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든지 요주의 인물로 낙인을 찍을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 정부의 관료들도 그러하고, 우리 자신들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 시간의 본문 말씀에도 이러한 문제가 드러나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초대 로마교회가 안고 있던 교회 내에 있었던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믿음이 강한 성도와 믿음이 약한 성도사이에 일어난 ‘음식’과 ‘날’에 대한 견해 차이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성도들이 서로 멸시하거나 판단하는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당시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독교 사상이 새롭게 전파되고 확산되는 초기였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신앙의 표상은 옛 관습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혼란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옛 습관을 존중하는 ‘보수파’와 옛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자유롭게 행동하려는 ‘진보파’로 갈라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로마교회도 이와 같은 갈등이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성도들 사이를 분열시키고 있었습니다.
먼저, 음식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직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새 언약의 믿음을 잘 알지 못하는 성도들이 옛 전통을 중요시했습니다. 즉 구약의 율법이 가르치는 성결법에 따라서 ‘육식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경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채소만 먹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새 언약의 말씀은 음식에 대하여 정하고 부정한 것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신앙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음식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설령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먹었을 때에는 전혀 신앙의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음식을 가리는 성도들을 ‘믿음이 약하다.’고 업신여겼습니다.
고린도전서10:25-26절입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고 하셨고, 사도행전10:12-16절에서는 이방인에 대하여 편견을 가진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이시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면서 먹으라고 하신 음식은 율법에서 금지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 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또 하나의 문제는 ‘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날’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성일(聖日)로 지키던 월삭, 맥추절, 수장절 등과 같은 축제나,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던 금식일, 속죄일 등의 특별한 절기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명시한 이러한 특별한 날들을 신성하게 여겨서 그 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의 신앙을 판단하며 비난했습니다. 반면에 새로운 시대를 여신 예수님에 의하여 주어진 구원의 기쁨을 감사하며 예배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날들이 차별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구약 절기의 본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절기 자체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업신여겼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 믿음의 형식과 이해 방식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갈등과 불화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현대 교회가 안고 있는 더 큰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개신교 교단만 해도 부끄럽도록 많이 갈라져 있습니다. 이 분열의 주 원인은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 믿음의 형식과 이해 방식의 차이이며, 더 나아가 권력의 문제로 말미암은 것들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현실을 판단하기에 앞서서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1. 문제를 바로 봅시다.
본문에는 ‘음식’과 ‘날’에 대한 문제가 구체적으로 부각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여러 편지에서 이와 같은 문제들이 지적되는 것을 보면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보편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단 이런 문제뿐만 아니라, 당파문제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등문제, 신분적인 문제 등등. 많은 일들이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분열을 조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초대교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오히려 오늘에 와서는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더욱 만연하여 더 많은 문제들이 쌓이고 있습니다. 첨단과학과 문명의 발달은 새로운 문화권을 만들었고, 사람들의 생활의 차이를 불러왔습니다. 결국 끼리끼리 모이는 병폐가 교회에까지 자연스럽게 들어왔습니다. 야고보서2:3-4절을 봅시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문제는 문화나 신분이나 삶의 차이가 아닙니다. 바르게 보지 못하는 관점이 문제입니다. ‘관점’이란, 자신의 가장 깊은 관심사를 기준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즉 옛 신앙에 매어있으면 율법적인 행위가 앞서게 될 것이며, 세상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육신의 혈기나 육신의 삶이 중심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에 있다면 사랑과 이해와 관용의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이나 행동이나 삶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7:3-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좀 더 넓은 마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바르게 보게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각의 중심에 계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2. 진리가 중심이 되는 판단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본문6-9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주를 위하여”라는 말이 다섯 번, “주의 것”이라는 말이 한 번 등장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판단 기준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와 함께 하시면서 생애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의 판단 기준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나 성도 개인이 행하는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합당한 것’인지 아니면 ‘내 생각이거나 혹은 세상적인 것인지’를 판단하면 올바른 판단이 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7:16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주님 앞에 와서 ‘주님, 저는 평생을 주의 이름으로 목사 일을 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도 행했습니다.’라고 자신이 행한 일을 인정해 달라고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선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아니면 내 생각과 내 삶의 방식과 다르다고 비판하고 업신여기고 경멸한다면 우리도 주님 앞에서 그런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하며, 어떤 인생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우리가 서로 판단하는 문제를 왜 신중해야 합니까?
한마디로 우리 모두는 서로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주인은 따로 계시는데 바로 하나님이 모든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본문4절에서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고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십니다. 설령 우리가 판단하는 그들이 믿음이 약하여 모든 일에 실수가 많다할지라도 그들을 하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공정하게 심판 받을 것입니다. 앞서서 잠깐 말씀드렸지만, 어떤 인생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10-12절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9:27절에서도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성도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서로를 이해하고 관용하고 사랑함으로서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유럽을 점령하고, 점령지마다 부대를 주둔시키며 곳곳에 감시초소를 세웠습니다. 하루는 한밤중에 황제가 직접 보초병들의 경계태세를 살펴보려고 순시를 했습니다. 어느 초소에 갔더니 한 사병이 자신의 총을 옆에 세워 놓은 채, 쭈그리고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순간적으로 화가 났지만 화를 내지 않고, 그 사병이 놓아 둔 총을 들고 보초를 섰습니다. 한참 만에 깨어난 보초병은 자기 대신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이 나폴레옹 장군임을 알게 되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그 때 황제는 “그래, 얼마나 피곤한가? 내가 대신 보초를 서 줄 테니까 좀 더 쉬게나.”라고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병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일생 동안 나폴레옹을 위해서 충성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야고보서2:13절을 봅시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나 자신의 태도에 따라서 우리 교회공동체는 달라집니다. 서로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고 업신여기면 미움과 분열이 있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움과 비판은 주님 말씀대로 그대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해와 관용과 사랑으로 서로를 돌아보고 감싸면 그곳이 바로 작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작은 천국으로 만들어갑시다.
***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사는 세계는 5대양 6대주에 194개국이 있으며, 60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1999년 10월 12일 0시 1분을 기하여 유엔 인구 국에서는 세계의 인구를 60억으로 발표했습니다. 2002년 현재에는 61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1960년에 세계 인구를 30억이라고 했는데, 40년 만에 배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2001년의 통계가 4700만 명이 넘어섰습니다.
이 많은 나라와 민족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60억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 한 사람도 같은 지문이나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개개인에게 독창적인 성격과 재능들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거창하게 서론을 꺼내는 이유는 각 사람이 지닌 개성과 삶의 독창성을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즉 세계 60억의 사람들은 제각기 독창적인 성격과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개인의 개성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수염을 그렇게 기릅니까?”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수염을 기르다니요? 나는 수염을 기르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저는 면도를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수염을 기르는 것’과 ‘면도를 하지 않는 것’은 같은 말 같지만 분명한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생각이 다를 때에 “당신 생각이 틀렸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보는 견해가 달라서 나타나는 생각의 차이이지 ‘틀렸다.’고 할 만큼 ‘잘못된 생각’은 아닙니다. 우리는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든지 요주의 인물로 낙인을 찍을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 정부의 관료들도 그러하고, 우리 자신들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 시간의 본문 말씀에도 이러한 문제가 드러나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초대 로마교회가 안고 있던 교회 내에 있었던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믿음이 강한 성도와 믿음이 약한 성도사이에 일어난 ‘음식’과 ‘날’에 대한 견해 차이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성도들이 서로 멸시하거나 판단하는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당시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독교 사상이 새롭게 전파되고 확산되는 초기였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신앙의 표상은 옛 관습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혼란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옛 습관을 존중하는 ‘보수파’와 옛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자유롭게 행동하려는 ‘진보파’로 갈라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로마교회도 이와 같은 갈등이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성도들 사이를 분열시키고 있었습니다.
먼저, 음식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직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새 언약의 믿음을 잘 알지 못하는 성도들이 옛 전통을 중요시했습니다. 즉 구약의 율법이 가르치는 성결법에 따라서 ‘육식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경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채소만 먹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새 언약의 말씀은 음식에 대하여 정하고 부정한 것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신앙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음식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설령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먹었을 때에는 전혀 신앙의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음식을 가리는 성도들을 ‘믿음이 약하다.’고 업신여겼습니다.
고린도전서10:25-26절입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고 하셨고, 사도행전10:12-16절에서는 이방인에 대하여 편견을 가진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이시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면서 먹으라고 하신 음식은 율법에서 금지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 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또 하나의 문제는 ‘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날’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성일(聖日)로 지키던 월삭, 맥추절, 수장절 등과 같은 축제나,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던 금식일, 속죄일 등의 특별한 절기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명시한 이러한 특별한 날들을 신성하게 여겨서 그 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의 신앙을 판단하며 비난했습니다. 반면에 새로운 시대를 여신 예수님에 의하여 주어진 구원의 기쁨을 감사하며 예배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날들이 차별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구약 절기의 본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절기 자체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업신여겼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 믿음의 형식과 이해 방식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갈등과 불화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현대 교회가 안고 있는 더 큰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개신교 교단만 해도 부끄럽도록 많이 갈라져 있습니다. 이 분열의 주 원인은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 믿음의 형식과 이해 방식의 차이이며, 더 나아가 권력의 문제로 말미암은 것들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현실을 판단하기에 앞서서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1. 문제를 바로 봅시다.
본문에는 ‘음식’과 ‘날’에 대한 문제가 구체적으로 부각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여러 편지에서 이와 같은 문제들이 지적되는 것을 보면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보편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단 이런 문제뿐만 아니라, 당파문제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등문제, 신분적인 문제 등등. 많은 일들이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분열을 조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초대교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오히려 오늘에 와서는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더욱 만연하여 더 많은 문제들이 쌓이고 있습니다. 첨단과학과 문명의 발달은 새로운 문화권을 만들었고, 사람들의 생활의 차이를 불러왔습니다. 결국 끼리끼리 모이는 병폐가 교회에까지 자연스럽게 들어왔습니다. 야고보서2:3-4절을 봅시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문제는 문화나 신분이나 삶의 차이가 아닙니다. 바르게 보지 못하는 관점이 문제입니다. ‘관점’이란, 자신의 가장 깊은 관심사를 기준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즉 옛 신앙에 매어있으면 율법적인 행위가 앞서게 될 것이며, 세상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육신의 혈기나 육신의 삶이 중심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에 있다면 사랑과 이해와 관용의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이나 행동이나 삶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7:3-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좀 더 넓은 마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바르게 보게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각의 중심에 계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2. 진리가 중심이 되는 판단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본문6-9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주를 위하여”라는 말이 다섯 번, “주의 것”이라는 말이 한 번 등장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판단 기준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와 함께 하시면서 생애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의 판단 기준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나 성도 개인이 행하는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합당한 것’인지 아니면 ‘내 생각이거나 혹은 세상적인 것인지’를 판단하면 올바른 판단이 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7:16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주님 앞에 와서 ‘주님, 저는 평생을 주의 이름으로 목사 일을 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도 행했습니다.’라고 자신이 행한 일을 인정해 달라고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선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아니면 내 생각과 내 삶의 방식과 다르다고 비판하고 업신여기고 경멸한다면 우리도 주님 앞에서 그런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하며, 어떤 인생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우리가 서로 판단하는 문제를 왜 신중해야 합니까?
한마디로 우리 모두는 서로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주인은 따로 계시는데 바로 하나님이 모든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본문4절에서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고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십니다. 설령 우리가 판단하는 그들이 믿음이 약하여 모든 일에 실수가 많다할지라도 그들을 하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공정하게 심판 받을 것입니다. 앞서서 잠깐 말씀드렸지만, 어떤 인생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10-12절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9:27절에서도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성도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서로를 이해하고 관용하고 사랑함으로서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유럽을 점령하고, 점령지마다 부대를 주둔시키며 곳곳에 감시초소를 세웠습니다. 하루는 한밤중에 황제가 직접 보초병들의 경계태세를 살펴보려고 순시를 했습니다. 어느 초소에 갔더니 한 사병이 자신의 총을 옆에 세워 놓은 채, 쭈그리고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순간적으로 화가 났지만 화를 내지 않고, 그 사병이 놓아 둔 총을 들고 보초를 섰습니다. 한참 만에 깨어난 보초병은 자기 대신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이 나폴레옹 장군임을 알게 되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그 때 황제는 “그래, 얼마나 피곤한가? 내가 대신 보초를 서 줄 테니까 좀 더 쉬게나.”라고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병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일생 동안 나폴레옹을 위해서 충성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야고보서2:13절을 봅시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나 자신의 태도에 따라서 우리 교회공동체는 달라집니다. 서로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고 업신여기면 미움과 분열이 있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움과 비판은 주님 말씀대로 그대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해와 관용과 사랑으로 서로를 돌아보고 감싸면 그곳이 바로 작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작은 천국으로 만들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