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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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11-02 14:53
♡♥♡ 행복한 사람 / 신명기33:26-29
***들어가는 말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은 33장1절에서부터 시작된 모세의 축복 내용의 결론부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부터 광야 40년을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 입구까지 인도한 민족의 영도자였습니다. 이제 모세의 나이 120세이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일을 다 마쳤습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 12지파를 하나씩 축복하고 있습니다. 모든 축복을 마친 후에 모세는 하나님의 선민이 된 이스라엘을 ‘행복 자’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행복 자’라고 번역 된 단어(아쉬레/ ירשׁא)는 ‘충만한 행복’, ‘완전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이스라엘을 그토록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까?
지금 이스라엘은 고독하고, 고통스럽고, 모든 것이 불충분한 긴 광야의 길을 40년에 걸쳐 지나왔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앞에는 거인 족이 있으며, 거대하고 견고한 성으로 둘러싸인 가나안 땅이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은 하셨지만 그들이 싸워서 빼앗아야 하는 땅입니다. 지금 당장 자신들의 손에 확실하게 쥐어져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환경에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붙어 있는 흑인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분명 두 사람인데 머리가 붙어 있는 두 사람이었습니다. 붙은 부분이 머리였기 때문에 절단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부모는 남 보기가 창피하여 30세가 넘도록 집안에만 가둬두고 차마 죽일 수는 없어서 짐승처럼 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들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인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으로서의 행복을 찾아 나섰습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었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이 형에게 칠판 앞으로 나가서 글을 쓰라고 하니, 머리가 붙은 동생도 같이 따라가서 마치 말굽 형 모양으로 칠판 앞에 서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비극적인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발견된 자신의 인생을 더 이상 비극이나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너무나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들의 입에서 어떻게 “너무나 행복하다.”는 말이 나올 수가 있습니까? 가나안을 앞에 둔 이스라엘이나, 머리가 붙은 흑인 쌍둥이나,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행복에 겨운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지금의 삶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1.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냥 무덤덤하게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며, 누리며, 감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행복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본문29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는 얼마나 행복한 백성이냐! 여호와께서 해방시켜 주신 백성, 이런 백성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느냐?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방패와 같고, 원수들을 쳐서 이기는 무서운 칼과 같으시니 이스라엘아, 너희는 언제까지나 여호와만 의지하며 살아라! 그러면 네 원수들이 네 앞에 엎드려 살려 달라고 애원할 것이고 너는 그들의 등을 짓밟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행복한 사람인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옛날의 이스라엘 사람들만 그러합니까?
로마서8:32절을 봅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어서 38-39절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생명까지 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더 아끼시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권세와 세력으로부터도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큰 행복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2. 그런데 행복을 느끼지도 누리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만족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합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많은 근심을 지고 고민하며, 행복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원인은 행복을 세상의 생활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내 집이 있어야 행복하다.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 자식이 출세해야 행복하다. 좋은 직장, 좋은 사업이 있어야 행복하다. 건강해야 행복하다. 좋은 자가용, 여유로운 시간 등등. 세상적인 조건을 행복으로 생각하게 되면 결코 만족도 행복도 누리지 못합니다.
잠언27:20절에서는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고 하셨고, 전도서5:10절에서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남편을 잃은 한 부인이 슬픔에 빠져서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부인은 견딜 수 없는 고독감과 남편에의 연민 때문에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 부인은 무작정 버스를 타고는 어느 주택가의 종점에서 내려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성탄절 이브여서 그런지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즐거움에 들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럴수록 자신은 더욱 초라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까운 곳에서 성탄의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부인은 소리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자그마한 교회였는데, 성탄의 찬양이 울려 퍼지고, 찬란한 불빛으로 장식된 트리가 반짝이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부인은 뒷자리에 쓰러지듯 앉아서 슬픔과 자기 연민에 빠져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배고픔과 피곤에 빠져 엎드린 채 잠이 들었습니다.
한잠 푹 자고 눈을 뜬 부인은 놀랐습니다. 교회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자그마한 교회 내부는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지난밤의 기억이 환상이었는지 의심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초라한 행색의 어린아이 둘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이 늦은 밤에 외롭게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은 고아라고 했으며, 부인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자신들의 어머니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지금까지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는 생각에 깊은 슬픔에 빠져있었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무척 부끄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를 나와서 과자와 빵을 한 아름 사주고는 또 선물을 주었습니다. 부인은 고아들로 인하여 감추어진 자신의 행복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 부인은 후에 고아들을 위한 기술학원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조건을 행복으로 여기는 한 진정한 행복은 찾을 수조차 없습니다.
3. 우리는 행복을 누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행복을 누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두운 얼굴로 고통에 찌든 모습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비록 핍박과 고난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삶이라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에는 평화가 있었으며, 얼굴은 빛이 났다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빛이 났다고 했습니다.
얼만 전에 온 인터넷 편지에는 북한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성도들을 돕던 김 전도사님이라는 분이 청진 교도소에 수감된 이야기를 전해 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김 전도사님을 만나고 온 목사님의 이야기로는 위로하러 갔다가 도리어 위로를 받고 왔다고 했습니다. 얼굴이나 온 몸은 고문과 추위와 굶주림으로 차마 볼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굴은 너무나 평화로웠으며, 자신은 죽음도 각오했다면서 기쁨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본문26-28절을 봅시다. 현대어 성경입니다. “이어서 모세가 이스라엘 전체에 대하여 축복하였다. 이스라엘을 존귀한 여수룬으로 높여 주신 하나님, 여수룬의 하나님과 같은 신은 하나도 없다. 그분이 하늘에서 찬란하게 구름을 타고 급히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러 오신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피난처시요, 그분이 강한 팔로 이스라엘을 붙잡아 그 품에 안아주신다! 이스라엘아, 그분이 원수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들을 전멸시키라고 네게 명령하셨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안전한 곳에서 살며 홀로 야곱의 샘물을 퍼마시며 살 것이다. 하늘은 이슬과 비를 흡족히 내려 주고 땅은 네게 곡식과 포도주를 풍족하게 내어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행복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은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습니다. 예레미야31:14절입니다.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시며, 고린도후서3:5절에서는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행복을 누립시다. 내게 주신 삶을 감사하며 기뻐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기쁨을 누리는 중에 주님은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들어가는 말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은 33장1절에서부터 시작된 모세의 축복 내용의 결론부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부터 광야 40년을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 입구까지 인도한 민족의 영도자였습니다. 이제 모세의 나이 120세이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일을 다 마쳤습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 12지파를 하나씩 축복하고 있습니다. 모든 축복을 마친 후에 모세는 하나님의 선민이 된 이스라엘을 ‘행복 자’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행복 자’라고 번역 된 단어(아쉬레/ ירשׁא)는 ‘충만한 행복’, ‘완전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이스라엘을 그토록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까?
지금 이스라엘은 고독하고, 고통스럽고, 모든 것이 불충분한 긴 광야의 길을 40년에 걸쳐 지나왔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앞에는 거인 족이 있으며, 거대하고 견고한 성으로 둘러싸인 가나안 땅이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은 하셨지만 그들이 싸워서 빼앗아야 하는 땅입니다. 지금 당장 자신들의 손에 확실하게 쥐어져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환경에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붙어 있는 흑인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분명 두 사람인데 머리가 붙어 있는 두 사람이었습니다. 붙은 부분이 머리였기 때문에 절단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부모는 남 보기가 창피하여 30세가 넘도록 집안에만 가둬두고 차마 죽일 수는 없어서 짐승처럼 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들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인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으로서의 행복을 찾아 나섰습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었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이 형에게 칠판 앞으로 나가서 글을 쓰라고 하니, 머리가 붙은 동생도 같이 따라가서 마치 말굽 형 모양으로 칠판 앞에 서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비극적인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발견된 자신의 인생을 더 이상 비극이나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너무나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들의 입에서 어떻게 “너무나 행복하다.”는 말이 나올 수가 있습니까? 가나안을 앞에 둔 이스라엘이나, 머리가 붙은 흑인 쌍둥이나,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행복에 겨운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지금의 삶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1.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냥 무덤덤하게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며, 누리며, 감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행복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본문29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는 얼마나 행복한 백성이냐! 여호와께서 해방시켜 주신 백성, 이런 백성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느냐?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방패와 같고, 원수들을 쳐서 이기는 무서운 칼과 같으시니 이스라엘아, 너희는 언제까지나 여호와만 의지하며 살아라! 그러면 네 원수들이 네 앞에 엎드려 살려 달라고 애원할 것이고 너는 그들의 등을 짓밟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행복한 사람인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옛날의 이스라엘 사람들만 그러합니까?
로마서8:32절을 봅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어서 38-39절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생명까지 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더 아끼시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권세와 세력으로부터도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큰 행복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2. 그런데 행복을 느끼지도 누리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만족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합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많은 근심을 지고 고민하며, 행복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원인은 행복을 세상의 생활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내 집이 있어야 행복하다.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 자식이 출세해야 행복하다. 좋은 직장, 좋은 사업이 있어야 행복하다. 건강해야 행복하다. 좋은 자가용, 여유로운 시간 등등. 세상적인 조건을 행복으로 생각하게 되면 결코 만족도 행복도 누리지 못합니다.
잠언27:20절에서는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고 하셨고, 전도서5:10절에서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남편을 잃은 한 부인이 슬픔에 빠져서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부인은 견딜 수 없는 고독감과 남편에의 연민 때문에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 부인은 무작정 버스를 타고는 어느 주택가의 종점에서 내려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성탄절 이브여서 그런지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즐거움에 들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럴수록 자신은 더욱 초라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까운 곳에서 성탄의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부인은 소리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자그마한 교회였는데, 성탄의 찬양이 울려 퍼지고, 찬란한 불빛으로 장식된 트리가 반짝이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부인은 뒷자리에 쓰러지듯 앉아서 슬픔과 자기 연민에 빠져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배고픔과 피곤에 빠져 엎드린 채 잠이 들었습니다.
한잠 푹 자고 눈을 뜬 부인은 놀랐습니다. 교회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자그마한 교회 내부는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지난밤의 기억이 환상이었는지 의심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초라한 행색의 어린아이 둘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이 늦은 밤에 외롭게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은 고아라고 했으며, 부인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자신들의 어머니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지금까지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는 생각에 깊은 슬픔에 빠져있었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무척 부끄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를 나와서 과자와 빵을 한 아름 사주고는 또 선물을 주었습니다. 부인은 고아들로 인하여 감추어진 자신의 행복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 부인은 후에 고아들을 위한 기술학원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조건을 행복으로 여기는 한 진정한 행복은 찾을 수조차 없습니다.
3. 우리는 행복을 누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행복을 누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두운 얼굴로 고통에 찌든 모습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비록 핍박과 고난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삶이라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에는 평화가 있었으며, 얼굴은 빛이 났다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빛이 났다고 했습니다.
얼만 전에 온 인터넷 편지에는 북한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성도들을 돕던 김 전도사님이라는 분이 청진 교도소에 수감된 이야기를 전해 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김 전도사님을 만나고 온 목사님의 이야기로는 위로하러 갔다가 도리어 위로를 받고 왔다고 했습니다. 얼굴이나 온 몸은 고문과 추위와 굶주림으로 차마 볼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굴은 너무나 평화로웠으며, 자신은 죽음도 각오했다면서 기쁨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본문26-28절을 봅시다. 현대어 성경입니다. “이어서 모세가 이스라엘 전체에 대하여 축복하였다. 이스라엘을 존귀한 여수룬으로 높여 주신 하나님, 여수룬의 하나님과 같은 신은 하나도 없다. 그분이 하늘에서 찬란하게 구름을 타고 급히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러 오신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피난처시요, 그분이 강한 팔로 이스라엘을 붙잡아 그 품에 안아주신다! 이스라엘아, 그분이 원수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들을 전멸시키라고 네게 명령하셨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안전한 곳에서 살며 홀로 야곱의 샘물을 퍼마시며 살 것이다. 하늘은 이슬과 비를 흡족히 내려 주고 땅은 네게 곡식과 포도주를 풍족하게 내어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행복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은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습니다. 예레미야31:14절입니다.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시며, 고린도후서3:5절에서는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행복을 누립시다. 내게 주신 삶을 감사하며 기뻐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기쁨을 누리는 중에 주님은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