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열정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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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01-31 22:06
♡♥♡ 올바른 열정 / 잠19:1-3
*** 들어가는 말
동물의 세계를 보면 기이한 일들을 많이 있음을 봅니다. 그 중에서도 본래 주어진 목적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경우가 있습니다.
‘남극의 신사’라고 불리는 ‘펭귄’은 날개를 헤엄치는데 사용을 합니다. 닭은 날개가 있지만 날지 못하고 땅에서만 삽니다. 두더지는 땅속에서만 살다가 눈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젖먹이 때에 어미를 잃고 사람 손으로 키워진 원숭이가 자연으로 보내졌지만 자유로운 자연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구걸하거나 훔쳐 먹으면서 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이상한 ‘펠리컨’에 대한 이야기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펠리컨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는 왕따 펠리컨이 있었습니다. 이 펠리컨은 사람들과 얼마동안 지냈는데, 우연히 보게 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늘 그 거울을 찾아왔습니다. 암놈 펠리컨을 붙여줘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자연보호자들이 그 펠리컨을 자신의 무리로 돌려보내려고 수많은 시도를 했지만 어느 샌가 다시 사람들의 세계로 와서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도 하나님께로부터 처음부터 부여받은 재능과 은사들이 있지만, 그에 맞는 목적대로 살지 못하고 엉뚱한 것에 길들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세상의 풍속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목적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보배로운 보석인 다이아몬드를 공깃돌 놀이나 하는데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에는 미련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을 대비 시키고 있습니다. 가난하면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는 성실한 사람과 어리석으면서도 고집을 버리지 않는 완고한 사람이 비교 됩니다. 본문은 이들을 통하여 더 나은 삶의 길을 찾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올바른 열정이 어떠한 것임을 말씀합니다.
1. 성도는 삶에 대한 올바른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의 삶이나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있어서 모두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12:11절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으며, 베드로전서4:8절에서,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신대로 모든 삶에서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올바른 것이어야 합니다.
본문2절에서,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지식 없는 소원”이란, ‘아무런 생각 없는 열심이나 잘못된 충고’를 의미하며, “발이 급하다.”는 것은 ‘올바른 지식의 인도나 방향이 없이 격한 혼란 속에서 성급하게 판단하고 처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나아가야 할 목표를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분명히 세우고, 성실하고 진지한 노력을 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열심은 있지만 올바른 지식도 없이 무작정 열심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잘못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의 핍박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6:2절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된 열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일에 열정이 있어야 함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열심이 있더라도 올바른 열정이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열심히 했지만 잘못되면, 열심히 했다는 이유로 용서되거나 칭찬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열정도 목적이 분명해야 하며, 바른 방법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된 열정을 가지고 있음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로마서10:2-3절입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예전에 전자 기술을 배우기 전에 고장 난 라디오를 무작정 분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분해는 했지만 무슨 기술이 있어야 고치지요. 나중에는 원래대로 조림조차 하지 못해서 결국 버리게 되었습니다. 후에 기술을 배운 후에는 ‘이렇게 간단한 것인데…’라고 어리석음에 혼자 쓴 웃음을 지은 적이 있었습니다.
현대의 많은 성도들이 이런 잘못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하는 것도 하나님을 향하는 열심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얼마 전에 부산에 있는 성도와 상담한 내용 중에도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심각한 경우였습니다. 새벽기도회에도 담임목사가 인도할 때에는 수백 명이 나오다가 부교역자가 인도할 때는 몇 십 명에 불과하며, 목사가 식사 할 때에는 일거리도 없이 부엌이 좁을 정도로 많은 봉사자가 있다가도 목사가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순간에 일거리가 남도록 일손이 부족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름이 나고 생색이 나는 일에는 남아돌도록 서로 먼저 헌금을 하지만, 알려지지 않는 일에는 재정이 없어 쩔쩔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도 불구하고 일이 잘못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며, 내가 살아야 할 목적도 알고, 일하는 목적도 분명해야 합니다.
2. 성도는 성실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1절에서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설령 가난한 길로 인도된다 할지라도 흠이 없는 온전한 길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올바른 열정이 있다 할지라도 성실함이 없으면 위대한 역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성실함’이란, ‘흠이 없는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온전함에 이르는 길입니까?
에베소서4:11-12절을 봅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온전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열심히 봉사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3:16-17절을 봅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으며, 요한일서2:5절에서는,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를 온전케 한다고 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온전케 된다고 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알고 목적과 방법이 분명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면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종합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세상에서의 삶이나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에 있어서 분명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열정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분명한 목적과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할 것은 흠이 없는 온전한 열정입니다. 온전한 열정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입니다. 비록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으로 인도된다 할지라도 이 길을 따르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며, 생명과 만족한 은혜가 주어집니다. 23절을 봅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우리 모두가 이러한 열정을 가집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베푸시는 영원한 생명과 삶의 만족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동물의 세계를 보면 기이한 일들을 많이 있음을 봅니다. 그 중에서도 본래 주어진 목적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경우가 있습니다.
‘남극의 신사’라고 불리는 ‘펭귄’은 날개를 헤엄치는데 사용을 합니다. 닭은 날개가 있지만 날지 못하고 땅에서만 삽니다. 두더지는 땅속에서만 살다가 눈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젖먹이 때에 어미를 잃고 사람 손으로 키워진 원숭이가 자연으로 보내졌지만 자유로운 자연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구걸하거나 훔쳐 먹으면서 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이상한 ‘펠리컨’에 대한 이야기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펠리컨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는 왕따 펠리컨이 있었습니다. 이 펠리컨은 사람들과 얼마동안 지냈는데, 우연히 보게 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늘 그 거울을 찾아왔습니다. 암놈 펠리컨을 붙여줘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자연보호자들이 그 펠리컨을 자신의 무리로 돌려보내려고 수많은 시도를 했지만 어느 샌가 다시 사람들의 세계로 와서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도 하나님께로부터 처음부터 부여받은 재능과 은사들이 있지만, 그에 맞는 목적대로 살지 못하고 엉뚱한 것에 길들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세상의 풍속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목적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보배로운 보석인 다이아몬드를 공깃돌 놀이나 하는데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에는 미련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을 대비 시키고 있습니다. 가난하면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는 성실한 사람과 어리석으면서도 고집을 버리지 않는 완고한 사람이 비교 됩니다. 본문은 이들을 통하여 더 나은 삶의 길을 찾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올바른 열정이 어떠한 것임을 말씀합니다.
1. 성도는 삶에 대한 올바른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의 삶이나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있어서 모두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12:11절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으며, 베드로전서4:8절에서,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신대로 모든 삶에서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올바른 것이어야 합니다.
본문2절에서,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지식 없는 소원”이란, ‘아무런 생각 없는 열심이나 잘못된 충고’를 의미하며, “발이 급하다.”는 것은 ‘올바른 지식의 인도나 방향이 없이 격한 혼란 속에서 성급하게 판단하고 처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나아가야 할 목표를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분명히 세우고, 성실하고 진지한 노력을 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열심은 있지만 올바른 지식도 없이 무작정 열심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잘못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의 핍박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6:2절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된 열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일에 열정이 있어야 함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열심이 있더라도 올바른 열정이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열심히 했지만 잘못되면, 열심히 했다는 이유로 용서되거나 칭찬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열정도 목적이 분명해야 하며, 바른 방법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된 열정을 가지고 있음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로마서10:2-3절입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예전에 전자 기술을 배우기 전에 고장 난 라디오를 무작정 분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분해는 했지만 무슨 기술이 있어야 고치지요. 나중에는 원래대로 조림조차 하지 못해서 결국 버리게 되었습니다. 후에 기술을 배운 후에는 ‘이렇게 간단한 것인데…’라고 어리석음에 혼자 쓴 웃음을 지은 적이 있었습니다.
현대의 많은 성도들이 이런 잘못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하는 것도 하나님을 향하는 열심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얼마 전에 부산에 있는 성도와 상담한 내용 중에도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심각한 경우였습니다. 새벽기도회에도 담임목사가 인도할 때에는 수백 명이 나오다가 부교역자가 인도할 때는 몇 십 명에 불과하며, 목사가 식사 할 때에는 일거리도 없이 부엌이 좁을 정도로 많은 봉사자가 있다가도 목사가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순간에 일거리가 남도록 일손이 부족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름이 나고 생색이 나는 일에는 남아돌도록 서로 먼저 헌금을 하지만, 알려지지 않는 일에는 재정이 없어 쩔쩔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도 불구하고 일이 잘못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며, 내가 살아야 할 목적도 알고, 일하는 목적도 분명해야 합니다.
2. 성도는 성실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1절에서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설령 가난한 길로 인도된다 할지라도 흠이 없는 온전한 길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올바른 열정이 있다 할지라도 성실함이 없으면 위대한 역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성실함’이란, ‘흠이 없는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온전함에 이르는 길입니까?
에베소서4:11-12절을 봅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온전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열심히 봉사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3:16-17절을 봅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으며, 요한일서2:5절에서는,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를 온전케 한다고 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온전케 된다고 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알고 목적과 방법이 분명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면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종합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세상에서의 삶이나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에 있어서 분명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열정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분명한 목적과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할 것은 흠이 없는 온전한 열정입니다. 온전한 열정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입니다. 비록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으로 인도된다 할지라도 이 길을 따르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며, 생명과 만족한 은혜가 주어집니다. 23절을 봅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우리 모두가 이러한 열정을 가집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베푸시는 영원한 생명과 삶의 만족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