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운 삶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586회
작성일
2003-01-31 22:04
♡♥♡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운 삶 / 벧전2:18-25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혹시 예전에 보리밟기를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어렸을 때에 겨울이면 보리밭에 가서 자그마하게 자란 보리 싹을 밟았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납니다. 지금이야 보리밭을 찾아보기도 힘들지만 그 당시만 해도 겨울이면 온 들판이 보리밭이었습니다.
보리 이삭은 보통 잘 자라면 한 포기에 450알 정도가 열립니다. 그러나 처음 돋아난 줄기는 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낱알을 맺지 못하고 80알에서 90알 정도밖에 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리 씨앗은 가을에 뿌리기 때문에 싹이 돋는 겨울이면 땅이 부풀어 올라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하거나 얼어버릴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리가 싹을 내면 발로 밟는 것입니다. 이 때 허약한 싹은 꺾여지면서 땅도 다져집니다. 꺾여진 싹은 죽는 것이 아니라 전보다 더 강한 줄기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낱알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연약한 보리 싹이 불쌍하게 생각되어 밟지 않는다면, 보리 싹은 죽거나 혹은 나약하여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보리 싹을 밟는 그 자체가 보리가 튼튼하게 자라서 충실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환경과 신분에 있어서 차별이 무척 심했습니다. 특히 노예제도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본문을 비롯한 사도 바울의 여러 서신을 통하여 교회에서도 노예제도가 인정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주된 구성원들이 노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초강대국이었던 로마는 노예경제 체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무려 6천만 명이 넘는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노예가 많을 때에는 인구의 절반이 노예였다고 합니다. 노예는 주로 전쟁에 패한 나라의 사람들이나 돈에 팔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노예들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도구’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노예의 생명을 좌우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주인과 노예가 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자연히 교회에서의 생활과 사회에서의 생활이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되고,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종들과 노예들에 대하여 특별한 신앙적인 말씀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신분과 계급 그리고 여러 가지의 차별이 존재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이 그러하고, 사회의 단체 생활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이런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1. 그리스도인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해야 합니다.
세상의 환경 중에서 많은 부분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환경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45:7절에서,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하셨으며, 18절에서는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환경도 역시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 까지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습니다. 로마서13:1절에서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주어진 환경에 순응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본문18절에서,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라고 하십니다. “사환들”이란, ‘집안의 하인’ 혹은 ‘종’을 의미하며, “주인”이란, ‘통치자’, ‘주’, ‘주인’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의 다스리는 자, 최고권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순복해야 할 주인에 대한 조건이 없음도 알아야 합니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순복하라.”고 하십니다. 즉 은혜롭고 너그러운 주인뿐만 아니라, 심술궂거나 고집 센 주인에게도 순복하라고 하십니다.
빌레몬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빌레몬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고 하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주인의 어떤 것을 훔치고는 도망을 쳤습니다. 오네시모는 도망자로 살다가 바울을 만나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후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너의 종인 오네시모가 그리스도안에서 변화되었다. 전에는 무익한 자였지만 이제는 유익한 자이다. 오네시모가 너를 대신해서 나를 잘 섬기고 있다. 그러니 이 사람을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혹시 네게 손해를 입힌 것이 있으면 내가 배상하겠다.’
사도 바울이 이런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은 빌레몬 역시 바울의 전도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자신의 집을 교회로 사용할 만큼 신실한 성도였습니다. 빌레몬의 집이 곧 골로새 교회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세상의 환경에 여전히 순복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7:20-24절입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의 신분적인 환경을 그대로 인정하시는 말씀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은 이후로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종임을 알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난도 이겨야 할 환경입니다.
앞서 보리밭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제 겨우 돋아나는 싹을 밟는다는 것은 보리 싹에게는 분명히 고통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보리 싹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주인의 배려이며 사랑이며 기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겨내야 할 환경이 있습니다. 주인의 인색함도 그러하며, 심술궂거나 고집이 센 주인도 그러합니다. 뿐만 아니라 삶이 고통스러운 환경도 있으며, 육신의 고통으로 인한 어려운 환경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박해로 인한 죽음의 위기와 굶주림과 자유하지 못함의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따랐지만 이 어려운 환경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환경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이겨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6:4-5절을 봅시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이 환경은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환경을 통하여 복음이 더 넓은 곳으로 퍼져나가도록 하셨으며, 깨끗하고 담대한 보배로운 믿음으로 자라게 하셨습니다.
‘하늘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송명희’ 자매는 뇌성마비 장애자로 이제 서른을 넘긴 나이입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예수님께 드리는 편지를 쓴 것이 있습니다. 편지의 서두는 ‘고난의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라는 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예수님을 고난의 선생님이라 불렀습니다. 그 편지 내용 중의 한 부분입니다.
“선생님을 좇은 후에도 고난은 저를 떠나주지 않았고 오히려 고난이 많아져 고통스러움은 더해만 갔었는데, 선생님이 제 옆에 계셔서 육신은 고달픔이 있으나 마음은 편안했고, 감사함으로 고난의 길을 잘 밟을 수 있었지요. 의심과 두려움이 있을 때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슬프고 괴로울 때는 ‘얘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제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했을 땐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선생님은 그렇게 수없이 말씀하시며 그 부드러운 손으로 안아주셨지요. 제가 선생님을 만난 후, 건강이 없어도, 지식이 없어도, 많은 재물이 없어도, 선생님이 계시기에 감사 할 수 있었지요. 선생님, 감사의 성숙과 이해의 성숙은 고난이 아니면 얻어지는 게 아닌가 봅니다.”
주어진 고통과 환경을 뛰어 넘은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주어진 고통의 환경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 예로 본문21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는데, 따르는 종이면 제자인 우리가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어려운 환경이 있다할지라도 앞서가신 주님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로마서8: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 유익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운 고통의 환경이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한 배려임을 알고 믿음으로 이겨나갑시다.
3. 그리스도인은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고통스러운 환경에는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환경에는 억울하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은 믿음으로 선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곧잘 이용만 하고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올바른 일을 하고도 나쁜 결과를 얻는 경우들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얻는 그리스도인의 아픔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로 인하여 당연히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야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죄로 인한 고난은 좋은 소득이 없음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한 고난이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으로 인하여 당하는 애매한 고난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본문19절에서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삶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에 따르는 영광입니다. 이 삶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입니다.
최초로 교회사를 쓴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글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난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글 중에서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테바이(더베)의 순교자들이 받은 고난과 형벌은 아무리 설명한대도 다 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그들은 갈고리로가 아니라 조개껍질로 살을 도려 낸바되어 죽임을 당했다. 여인들은 한 다리를 꺾이고, 옷이 벗겨진 후, 알몸 그대로 높은 곳에 달리어 죽을 때까지 구경거리가 되었다. 또 어떤 이들은 일부러 만든 도구, 즉 나뭇가지 중 가장 센 것들을 한꺼번에 휘게 하여, 그 하나하나에 손발을 결박한 후, 그것을 일시에 놓음으로써, 반동으로 손발이 찢겨져 나가 죽임을 당한 성도도 있었다. 이러한 일은 수일간, 또는 잠시 동안 행해진 것이 아니라, 수년에 걸쳐 행해졌다. 하루에 60명, 100명의 남자 성도들이 각양 형벌의 언도를 받고, 아내와 어린 자녀들과 함께 하루 동안에 죽임을 당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정에 있어서는, 선고가 신자들에게 내려지기가 무섭게 다른 신자들이 재판관 앞으로 달려 나가 자기도 그리스도인임을 용감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기쁨으로써 최후의 죽음의 선고를 받아 들였다.
이들은 고난이나 고통스러운 죽음을 즐긴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영원한 영광을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부귀영화나 명예, 쾌락을 누리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픈 환경을 멀리한다면 영원한 영광은 멀어집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5:18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예수님도 미움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미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한다면, 하나님도 좋고 세상도 좋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빛과 어두움을 동시에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자연히 물러가게 되고, 어두움이 있으면 빛은 없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세상의 것들은 자연히 멀어지게 됩니다. 동이 터면 어두움이 서서히 걷히듯이 말입니다.
애매한 고난의 환경에서도 고통과 억울함과 슬픔을 참으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름다움 삶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먼저 그러한 고난을 당하셨던 주님이 함께 하시며, 그 모든 수고로움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고린도전서15:5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때때로 닥치는 어려움의 환경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것마저도 믿음으로 순종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으로 인정받아 현재의 기쁨과 미래의 영원한 영광을 누리며 준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혹시 예전에 보리밟기를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어렸을 때에 겨울이면 보리밭에 가서 자그마하게 자란 보리 싹을 밟았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납니다. 지금이야 보리밭을 찾아보기도 힘들지만 그 당시만 해도 겨울이면 온 들판이 보리밭이었습니다.
보리 이삭은 보통 잘 자라면 한 포기에 450알 정도가 열립니다. 그러나 처음 돋아난 줄기는 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낱알을 맺지 못하고 80알에서 90알 정도밖에 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리 씨앗은 가을에 뿌리기 때문에 싹이 돋는 겨울이면 땅이 부풀어 올라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하거나 얼어버릴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리가 싹을 내면 발로 밟는 것입니다. 이 때 허약한 싹은 꺾여지면서 땅도 다져집니다. 꺾여진 싹은 죽는 것이 아니라 전보다 더 강한 줄기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낱알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연약한 보리 싹이 불쌍하게 생각되어 밟지 않는다면, 보리 싹은 죽거나 혹은 나약하여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보리 싹을 밟는 그 자체가 보리가 튼튼하게 자라서 충실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환경과 신분에 있어서 차별이 무척 심했습니다. 특히 노예제도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본문을 비롯한 사도 바울의 여러 서신을 통하여 교회에서도 노예제도가 인정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주된 구성원들이 노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초강대국이었던 로마는 노예경제 체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무려 6천만 명이 넘는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노예가 많을 때에는 인구의 절반이 노예였다고 합니다. 노예는 주로 전쟁에 패한 나라의 사람들이나 돈에 팔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노예들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도구’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노예의 생명을 좌우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주인과 노예가 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자연히 교회에서의 생활과 사회에서의 생활이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되고,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종들과 노예들에 대하여 특별한 신앙적인 말씀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신분과 계급 그리고 여러 가지의 차별이 존재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이 그러하고, 사회의 단체 생활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이런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1. 그리스도인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해야 합니다.
세상의 환경 중에서 많은 부분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환경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45:7절에서,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하셨으며, 18절에서는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환경도 역시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 까지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습니다. 로마서13:1절에서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주어진 환경에 순응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본문18절에서,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라고 하십니다. “사환들”이란, ‘집안의 하인’ 혹은 ‘종’을 의미하며, “주인”이란, ‘통치자’, ‘주’, ‘주인’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의 다스리는 자, 최고권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순복해야 할 주인에 대한 조건이 없음도 알아야 합니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순복하라.”고 하십니다. 즉 은혜롭고 너그러운 주인뿐만 아니라, 심술궂거나 고집 센 주인에게도 순복하라고 하십니다.
빌레몬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빌레몬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고 하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주인의 어떤 것을 훔치고는 도망을 쳤습니다. 오네시모는 도망자로 살다가 바울을 만나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후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너의 종인 오네시모가 그리스도안에서 변화되었다. 전에는 무익한 자였지만 이제는 유익한 자이다. 오네시모가 너를 대신해서 나를 잘 섬기고 있다. 그러니 이 사람을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혹시 네게 손해를 입힌 것이 있으면 내가 배상하겠다.’
사도 바울이 이런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은 빌레몬 역시 바울의 전도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자신의 집을 교회로 사용할 만큼 신실한 성도였습니다. 빌레몬의 집이 곧 골로새 교회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세상의 환경에 여전히 순복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7:20-24절입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의 신분적인 환경을 그대로 인정하시는 말씀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은 이후로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종임을 알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난도 이겨야 할 환경입니다.
앞서 보리밭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제 겨우 돋아나는 싹을 밟는다는 것은 보리 싹에게는 분명히 고통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보리 싹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주인의 배려이며 사랑이며 기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겨내야 할 환경이 있습니다. 주인의 인색함도 그러하며, 심술궂거나 고집이 센 주인도 그러합니다. 뿐만 아니라 삶이 고통스러운 환경도 있으며, 육신의 고통으로 인한 어려운 환경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박해로 인한 죽음의 위기와 굶주림과 자유하지 못함의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따랐지만 이 어려운 환경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환경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이겨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6:4-5절을 봅시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이 환경은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환경을 통하여 복음이 더 넓은 곳으로 퍼져나가도록 하셨으며, 깨끗하고 담대한 보배로운 믿음으로 자라게 하셨습니다.
‘하늘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송명희’ 자매는 뇌성마비 장애자로 이제 서른을 넘긴 나이입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예수님께 드리는 편지를 쓴 것이 있습니다. 편지의 서두는 ‘고난의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라는 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예수님을 고난의 선생님이라 불렀습니다. 그 편지 내용 중의 한 부분입니다.
“선생님을 좇은 후에도 고난은 저를 떠나주지 않았고 오히려 고난이 많아져 고통스러움은 더해만 갔었는데, 선생님이 제 옆에 계셔서 육신은 고달픔이 있으나 마음은 편안했고, 감사함으로 고난의 길을 잘 밟을 수 있었지요. 의심과 두려움이 있을 때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슬프고 괴로울 때는 ‘얘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제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했을 땐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선생님은 그렇게 수없이 말씀하시며 그 부드러운 손으로 안아주셨지요. 제가 선생님을 만난 후, 건강이 없어도, 지식이 없어도, 많은 재물이 없어도, 선생님이 계시기에 감사 할 수 있었지요. 선생님, 감사의 성숙과 이해의 성숙은 고난이 아니면 얻어지는 게 아닌가 봅니다.”
주어진 고통과 환경을 뛰어 넘은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주어진 고통의 환경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 예로 본문21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는데, 따르는 종이면 제자인 우리가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어려운 환경이 있다할지라도 앞서가신 주님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로마서8: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 유익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운 고통의 환경이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한 배려임을 알고 믿음으로 이겨나갑시다.
3. 그리스도인은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고통스러운 환경에는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환경에는 억울하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은 믿음으로 선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곧잘 이용만 하고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올바른 일을 하고도 나쁜 결과를 얻는 경우들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얻는 그리스도인의 아픔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로 인하여 당연히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야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죄로 인한 고난은 좋은 소득이 없음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한 고난이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으로 인하여 당하는 애매한 고난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본문19절에서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삶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에 따르는 영광입니다. 이 삶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입니다.
최초로 교회사를 쓴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글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난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글 중에서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테바이(더베)의 순교자들이 받은 고난과 형벌은 아무리 설명한대도 다 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그들은 갈고리로가 아니라 조개껍질로 살을 도려 낸바되어 죽임을 당했다. 여인들은 한 다리를 꺾이고, 옷이 벗겨진 후, 알몸 그대로 높은 곳에 달리어 죽을 때까지 구경거리가 되었다. 또 어떤 이들은 일부러 만든 도구, 즉 나뭇가지 중 가장 센 것들을 한꺼번에 휘게 하여, 그 하나하나에 손발을 결박한 후, 그것을 일시에 놓음으로써, 반동으로 손발이 찢겨져 나가 죽임을 당한 성도도 있었다. 이러한 일은 수일간, 또는 잠시 동안 행해진 것이 아니라, 수년에 걸쳐 행해졌다. 하루에 60명, 100명의 남자 성도들이 각양 형벌의 언도를 받고, 아내와 어린 자녀들과 함께 하루 동안에 죽임을 당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정에 있어서는, 선고가 신자들에게 내려지기가 무섭게 다른 신자들이 재판관 앞으로 달려 나가 자기도 그리스도인임을 용감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기쁨으로써 최후의 죽음의 선고를 받아 들였다.
이들은 고난이나 고통스러운 죽음을 즐긴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영원한 영광을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부귀영화나 명예, 쾌락을 누리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픈 환경을 멀리한다면 영원한 영광은 멀어집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5:18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예수님도 미움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미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한다면, 하나님도 좋고 세상도 좋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빛과 어두움을 동시에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자연히 물러가게 되고, 어두움이 있으면 빛은 없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세상의 것들은 자연히 멀어지게 됩니다. 동이 터면 어두움이 서서히 걷히듯이 말입니다.
애매한 고난의 환경에서도 고통과 억울함과 슬픔을 참으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름다움 삶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먼저 그러한 고난을 당하셨던 주님이 함께 하시며, 그 모든 수고로움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고린도전서15:5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때때로 닥치는 어려움의 환경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것마저도 믿음으로 순종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으로 인정받아 현재의 기쁨과 미래의 영원한 영광을 누리며 준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