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상하신 하나님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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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01-26 14:02
♡♥♡ 자상하신 하나님 / 요나 4:1-11
*** 들어가는 말
자신의 마음에 정직한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는 정직했지만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뜻에는 무지했던 어리석은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에 대하여 불평하고 대들었던 용감한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요?
우리 같으면 ‘당장 집어치워!’라고 고함을 쳤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선지자를 달래시며 깨닫게 하시고 끝까지 사용하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불평하고 대드는 요나 선지자를 자상하게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자상하시고 따뜻하신 사랑도 느껴보며,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중국의 첫 선교사로서 중국선교의 문을 여셨던 ‘허드슨 테일러’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선교사역을 하던 중에 함께 사역할 선교사를 모집하려고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많은 선교사 지망생이 모였습니다. 허드슨 선교사는 지망생들을 한 사람씩 면접을 했습니다.
“당신은 왜 중국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까?”
지망생들의 대답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중국의 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중국을 변화시키고 문명의 세계로 인도해야 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선교를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려고 합니다.”등등. 대답을 들은 허드슨 선교사는,
“모두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것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동기만으로는 선교사로 가지 못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지망생 중의 한 사람이 되물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왜 선교사가 되셨습니까?”
그 때에 허드슨 선교사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중국 사람을 사랑합니다. 오로지 사랑 때문에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무슨 유행가 가사 같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사랑 때문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사랑 때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주인공으로 출연한 요나 선지자는 이기심과 복수심으로 가득한 것을 봅니다. 연출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통하여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1. 사람의 보편적인 마음을 알게 하십니다.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가 죄악으로 가득하여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선지자를 부르셔서 니느웨로 보내시면서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너희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외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반대편인 ‘다시스’를 향하여 도망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적국이기 때문에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을 받아 망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괴롭히고 죽이려는 원수가 잘 안 되고 망하기를 바라는 것이 보편적인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아마도 원수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도 나를 대적하는 사람이 자신의 죄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데 ‘나를 괴롭히더니만 고소하다.’고 박수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마음 경영이 아님을 깨우치십니다. 그래서 요나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계획하고 경영할 때, 길이 형통하지 못하고 막힐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는 억지로 강행하지 말고 잠시 머물러 서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성경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이 전도를 위해서 아시아로 향할 때에도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막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한 번 혼이 나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니느웨에 ‘회개하라.’고 외친 후에도 하나님의 명령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화를 내면서 대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니느웨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앉아서 니느웨가 망하는 꼴을 보려고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도 자세하게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러한 일을 많이 겪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반발에도 화를 내지 않으시고, 깨닫게 하시려고 또 다른 일을 준비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하는 요나를 위하여 배를 파선하게 하시고,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요나를 삼키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요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이것도 하나님의 자상하신 사랑입니다. 에스겔18:23절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악인들이 고통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악인이라 할지라도 돌이켜 회개하고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자상하신 사랑 때문에 우리도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요나는 한 번 혼이 나고서도 다시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반발하며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성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려고 또 한 가지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요나가 언덕에서 뜨거운 햇볕을 피하려고 초막을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나를 위하여 박넝쿨을 준비하셔서 속성으로 자라게 하셨습니다. 박넝쿨이 초막에 덮이자 햇볕을 가려서 시원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하신 이 일에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요나가 기분이 좋아져 있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 벌레를 보내셔서 박넝쿨을 갈아먹게 하셨습니다. 벌레는 박넝쿨의 줄기를 파먹었고, 다음날 박넝쿨은 시들어버렸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뜨거운 바람까지 불게 하셨습니다. 요나의 좋은 기분도 하루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요나는 ‘차라리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하나님께 떼를 섰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박넝쿨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를 보십시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합니다.”라고 대듭니다. 10-11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것이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자상하신 사랑입니다. 요나의 불순종과 불평과 억지를 쓰는 것까지도 용납하시고 자상하게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을 받아야 하는 이방의 도시 니느웨까지도 회개하고 돌아와서 살기를 바라시는 사랑이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6:35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헤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생활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자상한 배려와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삶의 가장 확실한 비결입니다. 우리도 요나처럼 그러한 마음이 많이 있지만, 나를 향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또한 우리 자신의 사랑과 행복을 위하여 주님의 뜻을 순종하며 따라갑시다.
*** 들어가는 말
자신의 마음에 정직한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에는 정직했지만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뜻에는 무지했던 어리석은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에 대하여 불평하고 대들었던 용감한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요?
우리 같으면 ‘당장 집어치워!’라고 고함을 쳤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선지자를 달래시며 깨닫게 하시고 끝까지 사용하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불평하고 대드는 요나 선지자를 자상하게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자상하시고 따뜻하신 사랑도 느껴보며,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중국의 첫 선교사로서 중국선교의 문을 여셨던 ‘허드슨 테일러’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선교사역을 하던 중에 함께 사역할 선교사를 모집하려고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많은 선교사 지망생이 모였습니다. 허드슨 선교사는 지망생들을 한 사람씩 면접을 했습니다.
“당신은 왜 중국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까?”
지망생들의 대답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중국의 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중국을 변화시키고 문명의 세계로 인도해야 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선교를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려고 합니다.”등등. 대답을 들은 허드슨 선교사는,
“모두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것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동기만으로는 선교사로 가지 못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지망생 중의 한 사람이 되물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왜 선교사가 되셨습니까?”
그 때에 허드슨 선교사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중국 사람을 사랑합니다. 오로지 사랑 때문에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무슨 유행가 가사 같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사랑 때문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사랑 때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주인공으로 출연한 요나 선지자는 이기심과 복수심으로 가득한 것을 봅니다. 연출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통하여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1. 사람의 보편적인 마음을 알게 하십니다.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가 죄악으로 가득하여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선지자를 부르셔서 니느웨로 보내시면서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너희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외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반대편인 ‘다시스’를 향하여 도망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적국이기 때문에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을 받아 망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괴롭히고 죽이려는 원수가 잘 안 되고 망하기를 바라는 것이 보편적인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아마도 원수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도 나를 대적하는 사람이 자신의 죄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데 ‘나를 괴롭히더니만 고소하다.’고 박수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마음 경영이 아님을 깨우치십니다. 그래서 요나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계획하고 경영할 때, 길이 형통하지 못하고 막힐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는 억지로 강행하지 말고 잠시 머물러 서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성경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이 전도를 위해서 아시아로 향할 때에도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막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한 번 혼이 나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니느웨에 ‘회개하라.’고 외친 후에도 하나님의 명령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화를 내면서 대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니느웨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앉아서 니느웨가 망하는 꼴을 보려고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도 자세하게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러한 일을 많이 겪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반발에도 화를 내지 않으시고, 깨닫게 하시려고 또 다른 일을 준비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하는 요나를 위하여 배를 파선하게 하시고,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요나를 삼키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요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이것도 하나님의 자상하신 사랑입니다. 에스겔18:23절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악인들이 고통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악인이라 할지라도 돌이켜 회개하고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자상하신 사랑 때문에 우리도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요나는 한 번 혼이 나고서도 다시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반발하며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성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려고 또 한 가지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요나가 언덕에서 뜨거운 햇볕을 피하려고 초막을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나를 위하여 박넝쿨을 준비하셔서 속성으로 자라게 하셨습니다. 박넝쿨이 초막에 덮이자 햇볕을 가려서 시원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하신 이 일에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요나가 기분이 좋아져 있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 벌레를 보내셔서 박넝쿨을 갈아먹게 하셨습니다. 벌레는 박넝쿨의 줄기를 파먹었고, 다음날 박넝쿨은 시들어버렸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뜨거운 바람까지 불게 하셨습니다. 요나의 좋은 기분도 하루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요나는 ‘차라리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하나님께 떼를 섰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박넝쿨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를 보십시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합니다.”라고 대듭니다. 10-11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것이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자상하신 사랑입니다. 요나의 불순종과 불평과 억지를 쓰는 것까지도 용납하시고 자상하게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을 받아야 하는 이방의 도시 니느웨까지도 회개하고 돌아와서 살기를 바라시는 사랑이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6:35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헤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생활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자상한 배려와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삶의 가장 확실한 비결입니다. 우리도 요나처럼 그러한 마음이 많이 있지만, 나를 향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또한 우리 자신의 사랑과 행복을 위하여 주님의 뜻을 순종하며 따라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