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부르심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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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12-28 13:18
♡♥♡ 주님의 부르심 / 딤후1:9-14
*** 들어가는 말
2002년의 52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2003년도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할 거룩한 직분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며,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분 수행에 대한 평가와 상벌도 하나님께서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이 직분의 영광은 훗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 영광에 대하여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증거하십니다.
고린도후서3:7-9절을 봅시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이 ‘영의 직분’이자, ‘의의 직분’은 사도와 선지자와 목사와 교사, 그리고 장로와 집사 등이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며,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위한 직분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이며 직분 자들입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값비싼 바이올린 이름입니다. 현재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은 13억-100억까지 간다고 합니다.
이 바이올린은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라는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스트라디바리는 시 속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손을 늦춘다면.나는 하나님에게서 훔치는 것입니다. 당신께선 안토니오 없이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을 만드실 수 없으십니다.”
그는 평생에 1,100여 개의 악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악기들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깎아 만드는 하나하나의 손길에 하나님을 향하는 정성을 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세계 최고의 명품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대상으로 일하도록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이루어야 하는 것이 한 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이룬 몸이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도 조직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므로 ‘유기체’라고 합니다. 유기체인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봅시다. 고린도전서12장입니다.
먼저 12,13절을 봅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27절을 봅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음으로 직분과 은사들을 말씀하십니다.
직분이 필요한 것은 몸인 교회가 제 기능을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몸에는 듣는 기능도 있으며, 보는 기능, 말하는 기능, 걷는 발, 일하는 손, 이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내부의 수많은 기능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리고 지체들이 가지는 기능들이 바로 교회를 세우는 ‘은사’이며 ‘직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대복교회는 아직 온전한 몸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루고 온전하게 활동하기 위해서 몸의 기능을 수행할 여러 직분들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4:11-13절을 봅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처럼 교회의 직분은 성도를 서로 온전하게 연결하여 하나를 이루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몸인 교회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함께 성장하게 됩니다. 나 혼자 잘 되고자 한다면 결코 온전함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만일 혼자서도 잘 될 수 있었다면 중세 시대의 수도원 운동이 더욱 확산되었을 것이고 오늘에는 큰 부흥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깊은 산이나 토굴, 깎아지른 벼랑 위에서 세상과 구별된 신앙을 위하여 수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은 자신만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본문9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부르심으로’라는 말은 헬라어 klesis(klh'si")로서 ‘소명’, ‘천직’이라는 의미이며, 뒤따라 나오는 ‘부르심’이라는 말은 헬라어 kaleo(kalevw)로서 ‘부르다’, ‘하게 하다’, (누구, 누구의 특별한 이름이)‘불리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개별적으로 부르시고‘소명(은사, 직분)’을 부여하셨음 을 말씀하십니다.
소명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소명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나타내고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목적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나 혼자만의 소명 완수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각 그림이 맞추어져 가듯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하나님께서 개별적으로 소명을 주셔서 부르시는 사람들로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도, 모든 걸음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택하신 교회를 친히 세우십니다. 그래서 시편37:23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시며, 잠언16: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십니다.
어느 나이 많은 포경선 선장의 간증입니다.
꽤 오랜 세월이 흘렀군요. 제가 ‘케이프 혼’을 떠나 고래잡이를 떠나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망망대해를 항해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쪽으로부터 강풍이 정면으로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계속 이 방향으로 돛을 세워 오전 내내 거의 전진하지를 못했습니다. 11시경 제가 배의 키 곁에 서 있을 때, 갑자기 내 마음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왜 이 파도에 배를 난파시키고 있느냐? 아마 북쪽으로 가도 남쪽만큼 많은 고래가 있을 것이다. 바람을 거스르지 말고, 바람을 따라 달려가는 것을 상상해보자.’
이런 갑작스런 생각이 떠올라서 남쪽으로 향하던 뱃길을 돌려서 바람을 따라 북쪽으로 항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방향을 바꾼 지 1시간 후인 정오에 돛대 위의 감시원이 ‘전방에 보트들이 보인다.’고 소리치더군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4척의 구명정이 있었습니다. 그 구명정에는 10일 전에 화재로 인하여 파선한 배의 승무원 14명이 기진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명정을 타고 계속 표류하면서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구조를 기도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그들을 구조하기에 가장 아슬아슬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루만 더 늦었어도 그들은 생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글 후에 늙은 고래잡이 선장은 덧붙였습니다.
“당신이 종교를 가지셨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실은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매일 하나님께서 나를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써주실 것을 기도하면서 일과를 시작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 나의 뱃길을 돌리도록 하나님께서 내 마음 속에 생각을 넣어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 생각이 14명의 생명을 구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걸음을 이렇게 인도하십니다. 여러분들도 하루 일과를 계획하고 나가지만 전혀 뜻밖의 일들을 접할 때가 많이 있지요? 그래서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소망이 많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도 많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복음은 10절 말씀에서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순종했으며,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의 걸음을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부름 받은 우리들에게도 이 소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소명이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가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사랑으로서 본받아 지키는 것입니다. 이는 들은 말씀을 믿음과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탁하신 아름다운 것을 지켜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은 많이 있습니다. 바울이 성령을 의지하여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을 봅시다.
디모데전서4:12,13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했으며, 디모데후서 4:2절에서는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마태복음28: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은 무엇이며,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부탁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모두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와 구원’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복된 소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맡기신 소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고, 직분을 주셔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과 뜻을 하나로 모읍시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와 재능은 맡겨진 직분을 통하여 최대로 발산하여 교회가 든든히 서게 합시다.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상급을 예비하십니다. 디모데전서3:13절입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자리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담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신 내용과도 같습니다.
마태복음25:23절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라고 하셨으며, 므나 비유인 누가복음19:17절에서는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철강 회사 사장인 ‘조 말수’ 씨의 간증입니다. 그는 독실한 신자였으며 그 회사의 부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장 급이 가는 싱가포르의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억울한 마음과 수치심으로 당장 사표를 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싱가포르 지사에 부임했습니다. 그는 “이것도 주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일하면서, 싱가포르 한인교회에서 성실하게 봉사했습니다.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본사로부터 ‘사장으로 선임되었으니 귀국하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성경말씀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에 깊이 감사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를 위하여 주신 직분에 서로 마음을 합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나아가서 세상에서 주님의 사랑을 이루어 우리의 소명을 다합시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하는 칭찬과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2002년의 52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2003년도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할 거룩한 직분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며,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분 수행에 대한 평가와 상벌도 하나님께서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이 직분의 영광은 훗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 영광에 대하여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증거하십니다.
고린도후서3:7-9절을 봅시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이 ‘영의 직분’이자, ‘의의 직분’은 사도와 선지자와 목사와 교사, 그리고 장로와 집사 등이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며,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위한 직분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이며 직분 자들입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값비싼 바이올린 이름입니다. 현재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은 13억-100억까지 간다고 합니다.
이 바이올린은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라는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스트라디바리는 시 속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손을 늦춘다면.나는 하나님에게서 훔치는 것입니다. 당신께선 안토니오 없이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바이올린을 만드실 수 없으십니다.”
그는 평생에 1,100여 개의 악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악기들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깎아 만드는 하나하나의 손길에 하나님을 향하는 정성을 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세계 최고의 명품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대상으로 일하도록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이루어야 하는 것이 한 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이룬 몸이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도 조직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므로 ‘유기체’라고 합니다. 유기체인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봅시다. 고린도전서12장입니다.
먼저 12,13절을 봅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27절을 봅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음으로 직분과 은사들을 말씀하십니다.
직분이 필요한 것은 몸인 교회가 제 기능을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몸에는 듣는 기능도 있으며, 보는 기능, 말하는 기능, 걷는 발, 일하는 손, 이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내부의 수많은 기능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리고 지체들이 가지는 기능들이 바로 교회를 세우는 ‘은사’이며 ‘직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대복교회는 아직 온전한 몸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루고 온전하게 활동하기 위해서 몸의 기능을 수행할 여러 직분들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4:11-13절을 봅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처럼 교회의 직분은 성도를 서로 온전하게 연결하여 하나를 이루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몸인 교회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함께 성장하게 됩니다. 나 혼자 잘 되고자 한다면 결코 온전함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만일 혼자서도 잘 될 수 있었다면 중세 시대의 수도원 운동이 더욱 확산되었을 것이고 오늘에는 큰 부흥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깊은 산이나 토굴, 깎아지른 벼랑 위에서 세상과 구별된 신앙을 위하여 수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은 자신만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본문9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부르심으로’라는 말은 헬라어 klesis(klh'si")로서 ‘소명’, ‘천직’이라는 의미이며, 뒤따라 나오는 ‘부르심’이라는 말은 헬라어 kaleo(kalevw)로서 ‘부르다’, ‘하게 하다’, (누구, 누구의 특별한 이름이)‘불리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개별적으로 부르시고‘소명(은사, 직분)’을 부여하셨음 을 말씀하십니다.
소명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소명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나타내고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목적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나 혼자만의 소명 완수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각 그림이 맞추어져 가듯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하나님께서 개별적으로 소명을 주셔서 부르시는 사람들로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도, 모든 걸음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택하신 교회를 친히 세우십니다. 그래서 시편37:23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시며, 잠언16: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십니다.
어느 나이 많은 포경선 선장의 간증입니다.
꽤 오랜 세월이 흘렀군요. 제가 ‘케이프 혼’을 떠나 고래잡이를 떠나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망망대해를 항해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쪽으로부터 강풍이 정면으로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계속 이 방향으로 돛을 세워 오전 내내 거의 전진하지를 못했습니다. 11시경 제가 배의 키 곁에 서 있을 때, 갑자기 내 마음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왜 이 파도에 배를 난파시키고 있느냐? 아마 북쪽으로 가도 남쪽만큼 많은 고래가 있을 것이다. 바람을 거스르지 말고, 바람을 따라 달려가는 것을 상상해보자.’
이런 갑작스런 생각이 떠올라서 남쪽으로 향하던 뱃길을 돌려서 바람을 따라 북쪽으로 항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방향을 바꾼 지 1시간 후인 정오에 돛대 위의 감시원이 ‘전방에 보트들이 보인다.’고 소리치더군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4척의 구명정이 있었습니다. 그 구명정에는 10일 전에 화재로 인하여 파선한 배의 승무원 14명이 기진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명정을 타고 계속 표류하면서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구조를 기도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그들을 구조하기에 가장 아슬아슬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루만 더 늦었어도 그들은 생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글 후에 늙은 고래잡이 선장은 덧붙였습니다.
“당신이 종교를 가지셨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실은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매일 하나님께서 나를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써주실 것을 기도하면서 일과를 시작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 나의 뱃길을 돌리도록 하나님께서 내 마음 속에 생각을 넣어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 생각이 14명의 생명을 구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걸음을 이렇게 인도하십니다. 여러분들도 하루 일과를 계획하고 나가지만 전혀 뜻밖의 일들을 접할 때가 많이 있지요? 그래서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소망이 많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도 많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복음은 10절 말씀에서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순종했으며,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의 걸음을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부름 받은 우리들에게도 이 소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소명이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가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사랑으로서 본받아 지키는 것입니다. 이는 들은 말씀을 믿음과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탁하신 아름다운 것을 지켜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은 많이 있습니다. 바울이 성령을 의지하여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을 봅시다.
디모데전서4:12,13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했으며, 디모데후서 4:2절에서는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마태복음28: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은 무엇이며,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부탁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모두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와 구원’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복된 소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맡기신 소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고, 직분을 주셔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과 뜻을 하나로 모읍시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와 재능은 맡겨진 직분을 통하여 최대로 발산하여 교회가 든든히 서게 합시다.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상급을 예비하십니다. 디모데전서3:13절입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자리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담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신 내용과도 같습니다.
마태복음25:23절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라고 하셨으며, 므나 비유인 누가복음19:17절에서는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철강 회사 사장인 ‘조 말수’ 씨의 간증입니다. 그는 독실한 신자였으며 그 회사의 부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장 급이 가는 싱가포르의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억울한 마음과 수치심으로 당장 사표를 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싱가포르 지사에 부임했습니다. 그는 “이것도 주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일하면서, 싱가포르 한인교회에서 성실하게 봉사했습니다.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본사로부터 ‘사장으로 선임되었으니 귀국하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성경말씀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에 깊이 감사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를 위하여 주신 직분에 서로 마음을 합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나아가서 세상에서 주님의 사랑을 이루어 우리의 소명을 다합시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하는 칭찬과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