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시작과 결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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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03-21 16:22
♡♥♡ 일의 시작과 결과 / 역대하16:7-12
*** 들어가는 말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 형태는 가지각색입니다. 성격에 따라서 소심하여 매사에 꼼꼼하기도 하며, 활발하지만 무엇인가 엉성하기도 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형태도 있습니다. 또한 많은 일을 하면서 일의 시작은 잘 하는데 끝매듭이 희미한 사람도 있고, 많은 일을 하지는 못하지만 시작한 일에 반드시 결과를 내어 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활 형태는 어떤 것입니까?
이 시간의 본문에는 남 유다의 세 번째 왕인 ‘아사’가 등장합니다. 아사 왕은 41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비교적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적인 통치를 했습니다. 초기의 아사 왕의 업적에 대하여 역대하14:2-5절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사가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 상을 없이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
그런데, 1절에서는 그 평안이 ‘10년 동안’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시작은 잘 했지만 점점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바뀌면서 말년에는 하나님의 징계로 죽게 됩니다. 아사 왕의 생애를 요약하면,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이 잘 어울립니다.
마라톤 중계를 보다보면, 출발할 때에 경쾌하게 시작해서 ‘잘 달린다.’ 싶도록 선두를 유지하면서 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환점을 돌고 골인지점이 다가오면서 선두를 내어주면서 서서히 뒤로 처지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결국 우승을 내어 주고 마는 안타까운 광경이 있지 않습니까? 스포츠 경기에 있어서 시작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결과도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의 시작은 중요하지만 마무리는 더욱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라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중요합니다.
저는 본문을 포함하는 아사 왕의 일대기를 읽을 때마다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아사 왕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울 왕이나 솔로몬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시작은 정말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결과는 모두가 비극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뿐만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일들 가운데 결과가 좋지 않은 이유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공통점을 보면서 각자의 삶을 조절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가 달랐습니다.
남 유다의 3대 성군을 꼽는다면, 아사, 히스기야, 요시야를 꼽을 수 있습니다. 솔로몬 왕도 그러했지만, 아사 왕도 시작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아사 왕은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는 종교개혁에 힘을 썼습니다. 또 모든 백성들을 명하여 하나님을 찾게 하고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 표본으로 자신의 어머니가 만든 목상까지도 찍고 불살랐으며, 목상을 만든 어머니를 태후의 자리에서 폐위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감하게 개혁을 단행하는 아사 왕을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사 왕의 35년까지 전쟁이 없도록 해주셨습니다.
아사 왕 36년에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침략해 왔습니다. 아사 왕은 그동안 하나님을 의지했던 마음은 간곳이 없고, 아람 왕인 ‘벤하닷’에게 성전과 왕궁의 금과 은을 주면서 북 이스라엘 군을 물리쳐 달라고 의뢰했습니다. 아사 왕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사 왕의 마음이 이처럼 달라진 것은 나라가 든든하게 서게 되는 집권 초기 10년 이후부터였습니다. 아사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가 든든하게 서게 되자 서서히 세상적인 권력과 힘을 신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집권 36년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이전에 구스의 군대 백만이 쳐들어 왔을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했었는데, 이제는 자그마한 북 이스라엘이 쳐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견자 하나니를 아사 왕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본문7-9절의 말씀에서 “네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의 평안이 사라진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결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시작과 끝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리기까지 했으며, 소원을 말하라는 하나님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지혜’만을 구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뽑히자 짐마차 뒤에 숨어버릴 정도로 겸손했고 부끄러움이 많았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는 깊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사라졌으며, 세상적인 힘과 권력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결말도 역시 ‘패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2. 구하는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아사 왕은 세상을 의지하면서부터 성격도 달라졌습니다. 난폭한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는 것조차 싫었습니다. 아사 왕은 화가 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어 버리고 백성들에게 화풀이를 했습니다. 결국 집권 말기인 39년에 하나님의 징계로 발에 심한 병이 나게 되었습니다. 본문12절을 봅시다.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아사가 왕이 된 초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었습니다. 구스의 세라가 군사 백만을 거느리고 싸움을 걸어 왔을 때에도 아사 왕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중과부적의 위기에서도 사람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던 아사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사 왕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스 군대를 전멸시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 발에 난 병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원에게 구했습니다.
그렇다면 병이 났을 때에 병원에 가서도 안 되고, 약을 사용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의사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약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였으며, 하나님께서 약 사용하는 것을 결코 막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우선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먼저 구하느냐? 아니면 사람이나 세상적인 힘이나 약을 의지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의사를 통해서든지 약을 통해서든지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아사 왕이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의지하지도 않는다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합니까? 그리고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께 먼저 구합니까? 혹시 시작은 좋았는데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세상 쪽으로 기울지나 않았는지요.
히브리서3:14절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이나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나 시작도 훌륭할 뿐만 아니라, 결과는 더욱 훌륭하여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 형태는 가지각색입니다. 성격에 따라서 소심하여 매사에 꼼꼼하기도 하며, 활발하지만 무엇인가 엉성하기도 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형태도 있습니다. 또한 많은 일을 하면서 일의 시작은 잘 하는데 끝매듭이 희미한 사람도 있고, 많은 일을 하지는 못하지만 시작한 일에 반드시 결과를 내어 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활 형태는 어떤 것입니까?
이 시간의 본문에는 남 유다의 세 번째 왕인 ‘아사’가 등장합니다. 아사 왕은 41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비교적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적인 통치를 했습니다. 초기의 아사 왕의 업적에 대하여 역대하14:2-5절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사가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 상을 없이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
그런데, 1절에서는 그 평안이 ‘10년 동안’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시작은 잘 했지만 점점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바뀌면서 말년에는 하나님의 징계로 죽게 됩니다. 아사 왕의 생애를 요약하면,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이 잘 어울립니다.
마라톤 중계를 보다보면, 출발할 때에 경쾌하게 시작해서 ‘잘 달린다.’ 싶도록 선두를 유지하면서 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환점을 돌고 골인지점이 다가오면서 선두를 내어주면서 서서히 뒤로 처지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결국 우승을 내어 주고 마는 안타까운 광경이 있지 않습니까? 스포츠 경기에 있어서 시작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결과도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의 시작은 중요하지만 마무리는 더욱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라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중요합니다.
저는 본문을 포함하는 아사 왕의 일대기를 읽을 때마다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아사 왕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울 왕이나 솔로몬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시작은 정말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결과는 모두가 비극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뿐만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일들 가운데 결과가 좋지 않은 이유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공통점을 보면서 각자의 삶을 조절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가 달랐습니다.
남 유다의 3대 성군을 꼽는다면, 아사, 히스기야, 요시야를 꼽을 수 있습니다. 솔로몬 왕도 그러했지만, 아사 왕도 시작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아사 왕은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는 종교개혁에 힘을 썼습니다. 또 모든 백성들을 명하여 하나님을 찾게 하고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 표본으로 자신의 어머니가 만든 목상까지도 찍고 불살랐으며, 목상을 만든 어머니를 태후의 자리에서 폐위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감하게 개혁을 단행하는 아사 왕을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사 왕의 35년까지 전쟁이 없도록 해주셨습니다.
아사 왕 36년에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침략해 왔습니다. 아사 왕은 그동안 하나님을 의지했던 마음은 간곳이 없고, 아람 왕인 ‘벤하닷’에게 성전과 왕궁의 금과 은을 주면서 북 이스라엘 군을 물리쳐 달라고 의뢰했습니다. 아사 왕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사 왕의 마음이 이처럼 달라진 것은 나라가 든든하게 서게 되는 집권 초기 10년 이후부터였습니다. 아사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가 든든하게 서게 되자 서서히 세상적인 권력과 힘을 신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집권 36년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이전에 구스의 군대 백만이 쳐들어 왔을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했었는데, 이제는 자그마한 북 이스라엘이 쳐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견자 하나니를 아사 왕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본문7-9절의 말씀에서 “네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의 평안이 사라진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결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시작과 끝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리기까지 했으며, 소원을 말하라는 하나님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지혜’만을 구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뽑히자 짐마차 뒤에 숨어버릴 정도로 겸손했고 부끄러움이 많았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는 깊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사라졌으며, 세상적인 힘과 권력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결말도 역시 ‘패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2. 구하는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아사 왕은 세상을 의지하면서부터 성격도 달라졌습니다. 난폭한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는 것조차 싫었습니다. 아사 왕은 화가 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어 버리고 백성들에게 화풀이를 했습니다. 결국 집권 말기인 39년에 하나님의 징계로 발에 심한 병이 나게 되었습니다. 본문12절을 봅시다.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아사가 왕이 된 초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었습니다. 구스의 세라가 군사 백만을 거느리고 싸움을 걸어 왔을 때에도 아사 왕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중과부적의 위기에서도 사람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던 아사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사 왕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스 군대를 전멸시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 발에 난 병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원에게 구했습니다.
그렇다면 병이 났을 때에 병원에 가서도 안 되고, 약을 사용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의사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약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였으며, 하나님께서 약 사용하는 것을 결코 막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우선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먼저 구하느냐? 아니면 사람이나 세상적인 힘이나 약을 의지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의사를 통해서든지 약을 통해서든지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아사 왕이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의지하지도 않는다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합니까? 그리고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께 먼저 구합니까? 혹시 시작은 좋았는데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세상 쪽으로 기울지나 않았는지요.
히브리서3:14절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이나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나 시작도 훌륭할 뿐만 아니라, 결과는 더욱 훌륭하여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