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기회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5,855회
작성일
2003-03-15 20:24
♡♥♡ 돌아오지 않는 기회 / 히브리서 12:14-17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주어진 기회를 놓친 후에 안타까워하거나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까?
아마 한 번도 기회를 놓쳐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기회 중에는 놓쳐도 큰 타격이 없는 것이 있는가 하면, 생명이 달린 소중한 기회도 있습니다. 이 시간의 본문에는 육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영의 영원한 생명이 달린 소중한 기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14절을 다시 봅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주를 보지 못한다.”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기회를 잃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중요한 기회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은 하나님의 속성이자 성도의 삶에서 이루어야 필수 덕목입니다.
베드로전서3:11절에서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고 하셨으며, 야고보서3:17절에서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성도가 생활 속에서 나타내야 할 성품의 1, 2위가 거룩함과 화평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 주님께서 로마서12:18절에서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산상수훈의 8복 중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악을 멀리하거나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경건한 삶’이라고 합니다. 경건한 삶을 야고보서1:27절에서 정의하시기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이론적인 신앙이 아니라 생활입니다.
기독교 계통의 대학에 다니는 어느 학생이 지도교수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 학생은, “나는 날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며, 성경을 읽고 암송까지 합니다. 대학에서 주관하는 신앙집회는 한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도 내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없습니다. 제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교수는 그 학생에게, “이제부터는 고민이 있는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서로 등지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서 화해하게 하고, 병든 친구나 실의에 빠진 친구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라.”고 권면했습니다.
교수는 학생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 학생은 경건하고 거룩한 모양은 있었지만 실제적인 생활에서는 아무것도 나타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능력은 경건하고 거룩한 모양이 아니라, 실제적인 생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생활 속에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기도하고 성경 읽는다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기 위하여 시간이나 물질이나 노력과 정성을 많이 투자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너희는 돌아보아”라고 하셨는데 “돌아본다.”는 것은 ‘주의 깊은 관심’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내 생활 속에서의 투자’를 의미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하여 우리가 투자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도록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본문15절에서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라 함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을 말씀합니다. 즉 성도는 서로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생활에 빠지지 않도록 깊은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예전에 신학생 시절에 포항 쪽으로 학생회 간부 수련회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12인승 승합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목적지를 향했습니다. 계곡의 시원한 그늘에서 간단한 예배와 회의를 하고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월포 해수욕장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하고 출발을 했습니다. 해수욕장에 도착을 하고 나니 임원 중에 두 사람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차량 두 대에서 서로 ‘다른 차에 탔겠거니’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먼 길을 다시 갔다 와야 하는 것도 문제지만, 황당해할 두 사람의 모습이 더 애가 탔습니다. 그들의 겉옷과 소지품이 몽땅 차에 있었기 때문에 무척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결국 차량 한 대가 두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처음 머물렀던 계곡에 가까이 갔을 때에 그 문제의 두 사람이 아스팔트길을 터덜터덜 마주 오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잠시 계곡 상류 쪽으로 간 사이에 출발을 했던 것입니다.
설마 탔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 사고를 부르는 것입니다. ‘설마’가 ‘역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다시 찾으러 갈 수도 있고, 그들 스스로가 집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리 큰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생명이 달린 문제였다면 낭패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가족이든 교회의 교우이든 서로 영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가족 중의 한 사람, 혹은 절친한 친구나 교우 중의 한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위험한 길로 간다면 가만히 보고만 있겠습니까?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친구가 깊은 물로 가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요. 이처럼 성도는 우리 가족 중에 그런 사람은 없는지! 우리 성도들 중에 그런 사람은 없는지를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합니다. 나쁜 일임을 알고도 가족이나 친구라는 명목 때문에 모른 척 한다든지 덮어두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사형수가 형장에서 마지막 소원을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 품에 안겨보고 싶습니다.” 집행관은 사형수의 어머니를 형장에 들어가도록 허락했습니다. 사형수는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안고는 갑자기 어머니의 귀를 물어뜯었습니다. 간수들이 급하게 떼어놓자 집행관이 “정말 마지막까지 반성할 줄도 모르는 나쁜 녀석”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 때 사형수는 어머니를 향하여 울부짖었습니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 학교 앞 가게에서 처음으로 연필을 훔쳐 왔을 때 나를 나무라셨다면 지금 이렇게 죽지는 않을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히브리서10:24-25절에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좋은 일은 서로 격려하고, 취해서는 안 되는 일은 사랑으로 서로 권면하고, 아픔이나 고통은 서로 나누며 위로합시다.
2. 거짓된 교리와 행위를 따르지 않도록 돌아보아야 합니다.
본문15절 후반절에서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라고 했습니다. “쓴 뿌리”란 ‘이단 사상’을 의미합니다. 이단 사상이란 하나님께 대한 변질된 믿음입니다. 신명기29:18-21절을 봅시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붓게 하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필경은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시되, 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 책에 기록된 언약의 모든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
‘이단’은 눈에 띄게 다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말 그대로 꼬리만 달라서 깨닫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단도 성경을 인용할 줄 알고, 자신이 마치 빛의 천사처럼 위장할 줄도 압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성경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 말씀을 살짝 왜곡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11:13-15절을 봅시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이처럼 이단에 대하여는 구약성경에서도 심각하게 다루며 경고하고 있지만, 신약성경에서는 더욱 강도 높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2:1절에서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고 경고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1:8절에서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강도 높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이단 사상을 따르는 것을 성경에서는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더러움을 입는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단 사상에 빠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너무나 많은 이단이 있습니다. 소위 ‘기도원’ 혹은 ‘영성훈련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점쟁이들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돈을 밝히고, 쾌락을 좋아하며, 축복과 저주의 말을 잘 하며, 원망과 불평을 잘합니다. 마치 성경말씀을 자신의 말인 양 그렇게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이들에게 빠지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3. 성도의 신분에 걸맞게 살도록 돌아보아야 합니다.
본문16,17절에서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에서’를 ‘망령된 자’의 표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을 때, 동생 야곱이 팥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너무나 배가 고파서 팥죽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꾀쟁이 야곱은 형인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을 주면 팥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에서는 배고픈 나머지 ‘배가 고파 죽게 생겼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대수냐?’라고 하면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동생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거래에는 무슨 증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말로서 거래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왜 망령된 행위였겠습니까? ‘망령되다.’는 말은 ‘사악한 행위’ 혹은 ‘이방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즉 일순간의 세상적인 것으로 영원한 가치를 가진 것을 바꾸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가치를 지닌 “장자의 명분”을 한 순간의 배부름에 그치는 음식물과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망령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시편49:20절에서는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에서는 존귀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적인 것과 바꾸어버린 짐승이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장자의 명분은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하나님의 복을 이어가는 권한이었습니다. 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장자의 축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에서가 축복의 자리를 빼앗겼음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기회는 지나가버린 후였습니다. 한 번 축복하여 대를 물린 것은 다시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금 세상적인 생각에 빠져서, 단지 지금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영원한 것을 허비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하나님께는 어떤 증서나 증거도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가 별다른 생각 없이 한 번 내어뱉은 말만으로도 하나님께는 유효합니다. 성도 서로 간에 잘못된 말을 하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잠시 있을 세상의 것으로 영원한 생명에 관계된 일을 버리지 않도록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기회의 문이 언제 닫힐지 모릅니다. 지금 기회가 있을 때에 서로 돌아보아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도록 시간도 물질도 노력도 정성도 투자합시다. 그리하여 우리를 위하여 예비 된 영원토록 빛나는 가치를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주어진 기회를 놓친 후에 안타까워하거나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까?
아마 한 번도 기회를 놓쳐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기회 중에는 놓쳐도 큰 타격이 없는 것이 있는가 하면, 생명이 달린 소중한 기회도 있습니다. 이 시간의 본문에는 육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영의 영원한 생명이 달린 소중한 기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14절을 다시 봅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주를 보지 못한다.”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기회를 잃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중요한 기회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은 하나님의 속성이자 성도의 삶에서 이루어야 필수 덕목입니다.
베드로전서3:11절에서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고 하셨으며, 야고보서3:17절에서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성도가 생활 속에서 나타내야 할 성품의 1, 2위가 거룩함과 화평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 주님께서 로마서12:18절에서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산상수훈의 8복 중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악을 멀리하거나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경건한 삶’이라고 합니다. 경건한 삶을 야고보서1:27절에서 정의하시기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이론적인 신앙이 아니라 생활입니다.
기독교 계통의 대학에 다니는 어느 학생이 지도교수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 학생은, “나는 날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며, 성경을 읽고 암송까지 합니다. 대학에서 주관하는 신앙집회는 한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도 내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없습니다. 제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교수는 그 학생에게, “이제부터는 고민이 있는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서로 등지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서 화해하게 하고, 병든 친구나 실의에 빠진 친구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라.”고 권면했습니다.
교수는 학생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 학생은 경건하고 거룩한 모양은 있었지만 실제적인 생활에서는 아무것도 나타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능력은 경건하고 거룩한 모양이 아니라, 실제적인 생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생활 속에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기도하고 성경 읽는다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기 위하여 시간이나 물질이나 노력과 정성을 많이 투자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너희는 돌아보아”라고 하셨는데 “돌아본다.”는 것은 ‘주의 깊은 관심’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내 생활 속에서의 투자’를 의미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하여 우리가 투자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도록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본문15절에서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라 함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을 말씀합니다. 즉 성도는 서로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생활에 빠지지 않도록 깊은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예전에 신학생 시절에 포항 쪽으로 학생회 간부 수련회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12인승 승합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목적지를 향했습니다. 계곡의 시원한 그늘에서 간단한 예배와 회의를 하고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월포 해수욕장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하고 출발을 했습니다. 해수욕장에 도착을 하고 나니 임원 중에 두 사람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차량 두 대에서 서로 ‘다른 차에 탔겠거니’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먼 길을 다시 갔다 와야 하는 것도 문제지만, 황당해할 두 사람의 모습이 더 애가 탔습니다. 그들의 겉옷과 소지품이 몽땅 차에 있었기 때문에 무척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결국 차량 한 대가 두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처음 머물렀던 계곡에 가까이 갔을 때에 그 문제의 두 사람이 아스팔트길을 터덜터덜 마주 오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잠시 계곡 상류 쪽으로 간 사이에 출발을 했던 것입니다.
설마 탔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 사고를 부르는 것입니다. ‘설마’가 ‘역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다시 찾으러 갈 수도 있고, 그들 스스로가 집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리 큰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생명이 달린 문제였다면 낭패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가족이든 교회의 교우이든 서로 영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가족 중의 한 사람, 혹은 절친한 친구나 교우 중의 한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위험한 길로 간다면 가만히 보고만 있겠습니까?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친구가 깊은 물로 가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요. 이처럼 성도는 우리 가족 중에 그런 사람은 없는지! 우리 성도들 중에 그런 사람은 없는지를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합니다. 나쁜 일임을 알고도 가족이나 친구라는 명목 때문에 모른 척 한다든지 덮어두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사형수가 형장에서 마지막 소원을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 품에 안겨보고 싶습니다.” 집행관은 사형수의 어머니를 형장에 들어가도록 허락했습니다. 사형수는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안고는 갑자기 어머니의 귀를 물어뜯었습니다. 간수들이 급하게 떼어놓자 집행관이 “정말 마지막까지 반성할 줄도 모르는 나쁜 녀석”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 때 사형수는 어머니를 향하여 울부짖었습니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 학교 앞 가게에서 처음으로 연필을 훔쳐 왔을 때 나를 나무라셨다면 지금 이렇게 죽지는 않을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히브리서10:24-25절에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좋은 일은 서로 격려하고, 취해서는 안 되는 일은 사랑으로 서로 권면하고, 아픔이나 고통은 서로 나누며 위로합시다.
2. 거짓된 교리와 행위를 따르지 않도록 돌아보아야 합니다.
본문15절 후반절에서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라고 했습니다. “쓴 뿌리”란 ‘이단 사상’을 의미합니다. 이단 사상이란 하나님께 대한 변질된 믿음입니다. 신명기29:18-21절을 봅시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붓게 하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필경은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시되, 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 책에 기록된 언약의 모든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
‘이단’은 눈에 띄게 다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말 그대로 꼬리만 달라서 깨닫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단도 성경을 인용할 줄 알고, 자신이 마치 빛의 천사처럼 위장할 줄도 압니다. 사단이 하와를 유혹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성경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 말씀을 살짝 왜곡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11:13-15절을 봅시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이처럼 이단에 대하여는 구약성경에서도 심각하게 다루며 경고하고 있지만, 신약성경에서는 더욱 강도 높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2:1절에서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고 경고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1:8절에서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강도 높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이단 사상을 따르는 것을 성경에서는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더러움을 입는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단 사상에 빠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너무나 많은 이단이 있습니다. 소위 ‘기도원’ 혹은 ‘영성훈련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점쟁이들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돈을 밝히고, 쾌락을 좋아하며, 축복과 저주의 말을 잘 하며, 원망과 불평을 잘합니다. 마치 성경말씀을 자신의 말인 양 그렇게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이들에게 빠지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3. 성도의 신분에 걸맞게 살도록 돌아보아야 합니다.
본문16,17절에서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에서’를 ‘망령된 자’의 표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을 때, 동생 야곱이 팥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너무나 배가 고파서 팥죽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꾀쟁이 야곱은 형인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을 주면 팥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에서는 배고픈 나머지 ‘배가 고파 죽게 생겼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대수냐?’라고 하면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동생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거래에는 무슨 증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말로서 거래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왜 망령된 행위였겠습니까? ‘망령되다.’는 말은 ‘사악한 행위’ 혹은 ‘이방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즉 일순간의 세상적인 것으로 영원한 가치를 가진 것을 바꾸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가치를 지닌 “장자의 명분”을 한 순간의 배부름에 그치는 음식물과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망령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시편49:20절에서는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에서는 존귀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적인 것과 바꾸어버린 짐승이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장자의 명분은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하나님의 복을 이어가는 권한이었습니다. 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장자의 축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에서가 축복의 자리를 빼앗겼음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기회는 지나가버린 후였습니다. 한 번 축복하여 대를 물린 것은 다시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금 세상적인 생각에 빠져서, 단지 지금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영원한 것을 허비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하나님께는 어떤 증서나 증거도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가 별다른 생각 없이 한 번 내어뱉은 말만으로도 하나님께는 유효합니다. 성도 서로 간에 잘못된 말을 하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잠시 있을 세상의 것으로 영원한 생명에 관계된 일을 버리지 않도록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기회의 문이 언제 닫힐지 모릅니다. 지금 기회가 있을 때에 서로 돌아보아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도록 시간도 물질도 노력도 정성도 투자합시다. 그리하여 우리를 위하여 예비 된 영원토록 빛나는 가치를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