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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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03-15 20:22
♡♥♡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 / 출애굽기 3:1-5
*** 들어가는 말
우리가 누리는 지금의 모든 생활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모세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남긴 유명한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라는 말입니다. 이는 ‘가장 최선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함께 하셨다거나, 앞으로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은 항상 현재여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과거에 잘 했던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앞으로 잘 하겠다는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에스겔18:24절입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서 의인이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현재 생활이 악하다면 결과는 죽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성도의 현재의 삶이 중요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는 지금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이 신뢰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지금 나의 모든 생활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모세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되새겨 봅시다. 지금부터 하는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잘 들으시고 모세의 인생에 하나님이 어떻게 섭리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일생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극과 극의 삶이었습니다. 태어난 시기도 하필이면 바로가 유대인의 번성을 막기 위하여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때였습니다. 삼 개월을 숨기고 키우다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 강에 버렸습니다. 그 갈대상자를 바로의 딸인 공주가 발견하고 자기 자식으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자기 어머니를 유모로 추천했습니다. 모세가 젖을 땐 후에 바로의 궁으로 들어가게 되고, 40년 동안 애굽의 모든 학문과 궁중의 예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동족을 탄압하는 애굽 관리를 죽이게 되고, 그 일로 광야로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귀족에서 갈 곳 없는 부랑자로 전락하여 광야를 떠돌았습니다. 어느 날, 우물곁에 앉았다가 양떼에게 물을 먹이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을 돕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하여 미디안 제사장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의 딸과 결혼까지 하게 된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면서 양을 먹이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무렵, 하루는 양을 먹이다가 호렙 산의 한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도 나무가 타지를 않았습니다. 이 신기한 광경을 보기 위하여 가까이 다가갈 때에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
비록 우여곡절이 많은 생애지만 보통 사람이 겪는 삶의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에서 어떤 부분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답변은 전부 다입니다. 즉 모세의 전 생애에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가 작용했습니다. 모세가 태어나기 전의 계획까지 말입니다.
모세나 모세의 부모 입장에서 본다면 모세가 태어난 환경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딸에게 발견되고 왕자로서 자라게 된 것이 행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한 것은 기구한 운명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광야에서 미디안 제사장의 딸을 만난 것이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 적으로 본다면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그리스도인조차도 자신의 생애를 이렇게 세상적인 관점으로 생각하고 살 때가 있습니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나 믿음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산다면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도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생애에 임한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섭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도자로 모세를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이사야48:10절에서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욥기23:10절에서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욥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의 길을 표현했습니다. 이는 욥이 자신에게 이루어진 이 고난의 생애가 하나님의 섭리이심을 믿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깊은 신앙을 가졌던 ‘윗치만 니’는 자신의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에게 결혼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여인으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그 여인에게 요청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자신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그 여인과의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맡겼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장소에서 그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여인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다시 청혼을 했습니다. 냉정하게 거절하던 10년 전과는 달리 그 여인은 청혼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결혼을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거절을 당하거나, 길이 막히거나, 환경의 제약을 받을 때에는 조용히 하나님께 상황을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만일 우격다짐으로 자신의 생각대로 밀고 나간다면 세상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충돌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전하고는 하나님께 통곡하며 상황을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 전도를 위하여 나아가다가 길이 막히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그들에게 패전하거나, 길이 막히거나, 환경을 통한 제약의 원인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길이 막히고 환경의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억지로 일을 추진하던 사울 왕은 하나님의 진노를 샀으며 결국 버림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유대인을 탄압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모세를 위하여 누이 미리암과 바로의 딸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런 방법이 아니고는 모세가 바로의 궁에서 왕자로 들어갈 수도 없었고, 애굽 왕가와의 만남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모세의 의도와는 달리 동족을 때리는 애굽 관리를 밀친 것이 죽음으로 연결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아니면 모세가 광야에서 살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모세의 생애를 섭리하시고 성경의 모든 인물들에게 역사하시고 섭리하신 하나님께서 지금은 저와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시고 섭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즉 저와 여러분의 모든 생활을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과테말라의 알폰소 대통령은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지기는 일에 병적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관저를 중심으로 반경 2KM안에 있는 건물은 무조건 대통령 궁 쪽으로 난 창문을 폐쇄시켜 버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친위대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무기를 휴대한 채 자기 관저에 출입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주치의는 하루 세 번씩 그를 검진했고, 어떤 물건도 친위대의 엄격한 사전 검사 없이는 절대로 관저 안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음식물은 검사관이 시식한 다음이라야 그의 식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당시 150만 불이라는 거금으로 대통령 전용의 방탄차를 주문 제작했습니다. 이 차는 기관포로 습격을 당해도 끄떡없도록 설계되었으며, 경호용으로는 완벽한 것으로 알려진 차였습니다.
그런데 이 방탄차를 인수하고 한껏 기분이 좋았던 그 다음날 평소에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친위대원의 저격으로 그렇게 가기 싫었던 지옥으로 급행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의 생명을 지키려 해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참새의 생명에까지 섭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0:29절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뿐만 아니라 들의 풀까지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후회를 남기지 않는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 천국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우리가 누리는 지금의 모든 생활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모세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남긴 유명한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라는 말입니다. 이는 ‘가장 최선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함께 하셨다거나, 앞으로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은 항상 현재여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과거에 잘 했던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앞으로 잘 하겠다는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에스겔18:24절입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서 의인이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현재 생활이 악하다면 결과는 죽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성도의 현재의 삶이 중요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는 지금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이 신뢰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지금 나의 모든 생활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모세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되새겨 봅시다. 지금부터 하는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잘 들으시고 모세의 인생에 하나님이 어떻게 섭리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일생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극과 극의 삶이었습니다. 태어난 시기도 하필이면 바로가 유대인의 번성을 막기 위하여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때였습니다. 삼 개월을 숨기고 키우다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 강에 버렸습니다. 그 갈대상자를 바로의 딸인 공주가 발견하고 자기 자식으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자기 어머니를 유모로 추천했습니다. 모세가 젖을 땐 후에 바로의 궁으로 들어가게 되고, 40년 동안 애굽의 모든 학문과 궁중의 예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동족을 탄압하는 애굽 관리를 죽이게 되고, 그 일로 광야로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귀족에서 갈 곳 없는 부랑자로 전락하여 광야를 떠돌았습니다. 어느 날, 우물곁에 앉았다가 양떼에게 물을 먹이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을 돕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하여 미디안 제사장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의 딸과 결혼까지 하게 된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면서 양을 먹이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무렵, 하루는 양을 먹이다가 호렙 산의 한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도 나무가 타지를 않았습니다. 이 신기한 광경을 보기 위하여 가까이 다가갈 때에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
비록 우여곡절이 많은 생애지만 보통 사람이 겪는 삶의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에서 어떤 부분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답변은 전부 다입니다. 즉 모세의 전 생애에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가 작용했습니다. 모세가 태어나기 전의 계획까지 말입니다.
모세나 모세의 부모 입장에서 본다면 모세가 태어난 환경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딸에게 발견되고 왕자로서 자라게 된 것이 행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한 것은 기구한 운명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광야에서 미디안 제사장의 딸을 만난 것이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 적으로 본다면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그리스도인조차도 자신의 생애를 이렇게 세상적인 관점으로 생각하고 살 때가 있습니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나 믿음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산다면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도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생애에 임한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섭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도자로 모세를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이사야48:10절에서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욥기23:10절에서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욥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의 길을 표현했습니다. 이는 욥이 자신에게 이루어진 이 고난의 생애가 하나님의 섭리이심을 믿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깊은 신앙을 가졌던 ‘윗치만 니’는 자신의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에게 결혼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여인으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그 여인에게 요청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자신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그 여인과의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맡겼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장소에서 그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여인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다시 청혼을 했습니다. 냉정하게 거절하던 10년 전과는 달리 그 여인은 청혼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결혼을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거절을 당하거나, 길이 막히거나, 환경의 제약을 받을 때에는 조용히 하나님께 상황을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만일 우격다짐으로 자신의 생각대로 밀고 나간다면 세상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충돌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전하고는 하나님께 통곡하며 상황을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 전도를 위하여 나아가다가 길이 막히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그들에게 패전하거나, 길이 막히거나, 환경을 통한 제약의 원인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길이 막히고 환경의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억지로 일을 추진하던 사울 왕은 하나님의 진노를 샀으며 결국 버림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유대인을 탄압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모세를 위하여 누이 미리암과 바로의 딸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런 방법이 아니고는 모세가 바로의 궁에서 왕자로 들어갈 수도 없었고, 애굽 왕가와의 만남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모세의 의도와는 달리 동족을 때리는 애굽 관리를 밀친 것이 죽음으로 연결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아니면 모세가 광야에서 살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모세의 생애를 섭리하시고 성경의 모든 인물들에게 역사하시고 섭리하신 하나님께서 지금은 저와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시고 섭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즉 저와 여러분의 모든 생활을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과테말라의 알폰소 대통령은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지기는 일에 병적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관저를 중심으로 반경 2KM안에 있는 건물은 무조건 대통령 궁 쪽으로 난 창문을 폐쇄시켜 버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친위대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무기를 휴대한 채 자기 관저에 출입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주치의는 하루 세 번씩 그를 검진했고, 어떤 물건도 친위대의 엄격한 사전 검사 없이는 절대로 관저 안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음식물은 검사관이 시식한 다음이라야 그의 식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당시 150만 불이라는 거금으로 대통령 전용의 방탄차를 주문 제작했습니다. 이 차는 기관포로 습격을 당해도 끄떡없도록 설계되었으며, 경호용으로는 완벽한 것으로 알려진 차였습니다.
그런데 이 방탄차를 인수하고 한껏 기분이 좋았던 그 다음날 평소에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친위대원의 저격으로 그렇게 가기 싫었던 지옥으로 급행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의 생명을 지키려 해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참새의 생명에까지 섭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0:29절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뿐만 아니라 들의 풀까지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후회를 남기지 않는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 천국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