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성공을 위하여!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851회
작성일
2003-03-08 23:36
♡♥♡ 삶의 성공을 위하여 / 대상13:1-14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울 때를 기억하십니까? 국민교육헌장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고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부여 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소속 된 곳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속 된 우리에게도 역시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공통적인 것도 있으며, 개인적인 것도 있습니다. 그 모든 사명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1950년대 세계선교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짐 엘리어트’선교사가 아프리카 밀림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의 유품 속에서 발견된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들을 버리는 사람, 그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즉,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서 자신의 청춘, 부와 명예, 권력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발자취를 남기는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육신이나 이 세상의 부귀영화는 끝까지 붙잡고 있을 수 없는 이 땅의 것입니다.
‘엘리어트’의 일기의 뒷부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을 위해서 내 삶이 불타기를 원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주님을 향하는 뜨거운 열정으로 타오르기를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말씀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다윗 왕의 열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도 올바른 방향으로 향할 때 성공적인 삶을 이룰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 말씀의 배경을 봅시다.
오늘 말씀의 초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법궤’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기럇여아림’에 있었습니다. 이미 100년 전, ‘엘리’ 제사장 시절에 블레셋과의 전쟁에 가지고 나갔다가 빼앗긴 후, 지금까지 ‘기럇여아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블레셋이 법궤를 빼앗은 후, 그 나라에는 법궤가 머무는 도시마다 각종 재앙으로 온 도시가 죽음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블레셋의 방백들이 의논하여, 새 수레를 만들어 젖 떼지 않은 송아지를 둔 암소에게 메우고, 수레 위에 법궤를 싣고 이스라엘의 국경 도시인 ‘기럇여아림’으로 보낸 것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법궤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등극하여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확정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자 온 이스라엘의 사상과 정신의 중심이 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기로 계획했습니다. 이 계획을 이스라엘의 모든 방백들과 백성들이 좋게 여기고 실행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런데,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이 재난으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하여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좋은 뜻으로 일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패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원인을 찾아서 제거하는 것이 성공적인 삶을 이루는 기초가 됩니다.
2. 삶의 성공을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본문1-4절에서 1차적인 실패의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거듭 실패하는 것을 곁에서 보아 왔습니다. 매사에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기억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묻고 의지하기 위하여 ‘기럇여아림’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올 것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는 일에 대하여 천부장과 백부장,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에게 그 뜻을 물어서 의견을 모았습니다. 즉, 다윗은 혼자 단독으로 처리하지 않고, 군부와 민중의 여론을 합한 민주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에 뭇 백성이 이일을 선히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이라고 하는 말을 볼 때,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듯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어 서서, 다윗의 계획을 재정리해 봅시다.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오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물었습니까? 아무것도 물은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이라는 가정법만 썼을 뿐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법궤를 모셔 오기 위해서 신앙적으로 준비한 것이 있습니까? 역시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도 않았고, 선지자를 부르지도 않았고, 예배를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군부와 백성의 뜻을 물었을 뿐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다윗이 여론을 수렴한 것을 민주주의적인 정치형태라고 찬사를 합니다. 세상적인 정치 형태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민주주의적인 방법인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오해하기 쉬운 함정입니다. 신앙의 일에 있어서는 다수의 성도가 옳다고 여긴다고 해서 바른 길은 아닙니다. 다윗은 당연히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습니다. 선지자를 불러서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법을 알아보았어야 했습니다. 사람의 뜻이 좋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본문5-10절에서 2차적인 실패의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새 수레를 만들어 언약궤를 실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20년간을 머물렀던 유다 족속 ‘아비나답’의 손자인 ‘웃사’와 ‘아히오’로 수레를 몰도록 했습니다. 나름대로 정성이 깃들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는 다윗과 백성들의 모습은 너무나 진지하고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심각한 충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자신과 백성의 생각에 좋으면 하나님께도 좋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고,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법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마태복음7:21-23절을 봅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면, 삶의 성공을 위한 올바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삶의 성공을 위한 올바른 방법은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인 언약궤에 대한 하나님은 뜻은 이러합니다. 민수기4:15절입니다.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라고 하셨고, 민수기7:6절에서는 “모세가 수레와 소를 받아 레위인에게 주었으니”라고 했고, 9절에서는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의 기구인 하나님의 법궤를 옮길 때에는 반드시 레위족의 고핫 자손이 어깨로 메도록 정하셨습니다. 비록 다윗이 새 수레에 실었지만 새 수레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수레를 몰았던 사람은 레위족도 아닌 유다 족이었습니다. 성물을 만지면 죽는다고 했는데, 소가 날뛰어서 언약궤가 넘어지려고 하자 ‘웃사’가 붙잡았습니다. 정상이 참작될 듯도 하지만 하나님께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결국, 기쁜 마음과 좋은 뜻으로 언약궤를 모시려 했던 다윗은 하나님의 거부하심이 명백해지자 즉시 중단하고 물러났습니다. 이 때문에 뜻밖에도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게 된 ‘오벧에돔의 집’은 법궤가 머문 삼 개월 동안 큰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몇 개월 후에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게 준비하여 성공적으로 법궤를 옮겨오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그 소망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물으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구하십시오.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나, 성공적인 삶을 누리는 비결에 있어서는, 사람의 기발한 아이디어나 요령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삶의 성공을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울 때를 기억하십니까? 국민교육헌장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고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부여 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소속 된 곳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속 된 우리에게도 역시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공통적인 것도 있으며, 개인적인 것도 있습니다. 그 모든 사명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1950년대 세계선교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짐 엘리어트’선교사가 아프리카 밀림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의 유품 속에서 발견된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들을 버리는 사람, 그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즉,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서 자신의 청춘, 부와 명예, 권력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발자취를 남기는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육신이나 이 세상의 부귀영화는 끝까지 붙잡고 있을 수 없는 이 땅의 것입니다.
‘엘리어트’의 일기의 뒷부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을 위해서 내 삶이 불타기를 원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주님을 향하는 뜨거운 열정으로 타오르기를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말씀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다윗 왕의 열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도 올바른 방향으로 향할 때 성공적인 삶을 이룰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 말씀의 배경을 봅시다.
오늘 말씀의 초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법궤’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기럇여아림’에 있었습니다. 이미 100년 전, ‘엘리’ 제사장 시절에 블레셋과의 전쟁에 가지고 나갔다가 빼앗긴 후, 지금까지 ‘기럇여아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블레셋이 법궤를 빼앗은 후, 그 나라에는 법궤가 머무는 도시마다 각종 재앙으로 온 도시가 죽음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블레셋의 방백들이 의논하여, 새 수레를 만들어 젖 떼지 않은 송아지를 둔 암소에게 메우고, 수레 위에 법궤를 싣고 이스라엘의 국경 도시인 ‘기럇여아림’으로 보낸 것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법궤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등극하여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확정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자 온 이스라엘의 사상과 정신의 중심이 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기로 계획했습니다. 이 계획을 이스라엘의 모든 방백들과 백성들이 좋게 여기고 실행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런데,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이 재난으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하여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좋은 뜻으로 일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패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원인을 찾아서 제거하는 것이 성공적인 삶을 이루는 기초가 됩니다.
2. 삶의 성공을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본문1-4절에서 1차적인 실패의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거듭 실패하는 것을 곁에서 보아 왔습니다. 매사에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기억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묻고 의지하기 위하여 ‘기럇여아림’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올 것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는 일에 대하여 천부장과 백부장,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에게 그 뜻을 물어서 의견을 모았습니다. 즉, 다윗은 혼자 단독으로 처리하지 않고, 군부와 민중의 여론을 합한 민주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에 뭇 백성이 이일을 선히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이라고 하는 말을 볼 때,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듯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어 서서, 다윗의 계획을 재정리해 봅시다.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오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물었습니까? 아무것도 물은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이라는 가정법만 썼을 뿐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법궤를 모셔 오기 위해서 신앙적으로 준비한 것이 있습니까? 역시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도 않았고, 선지자를 부르지도 않았고, 예배를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군부와 백성의 뜻을 물었을 뿐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다윗이 여론을 수렴한 것을 민주주의적인 정치형태라고 찬사를 합니다. 세상적인 정치 형태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민주주의적인 방법인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오해하기 쉬운 함정입니다. 신앙의 일에 있어서는 다수의 성도가 옳다고 여긴다고 해서 바른 길은 아닙니다. 다윗은 당연히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습니다. 선지자를 불러서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법을 알아보았어야 했습니다. 사람의 뜻이 좋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본문5-10절에서 2차적인 실패의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새 수레를 만들어 언약궤를 실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20년간을 머물렀던 유다 족속 ‘아비나답’의 손자인 ‘웃사’와 ‘아히오’로 수레를 몰도록 했습니다. 나름대로 정성이 깃들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는 다윗과 백성들의 모습은 너무나 진지하고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심각한 충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자신과 백성의 생각에 좋으면 하나님께도 좋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고,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법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마태복음7:21-23절을 봅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면, 삶의 성공을 위한 올바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삶의 성공을 위한 올바른 방법은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인 언약궤에 대한 하나님은 뜻은 이러합니다. 민수기4:15절입니다.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라고 하셨고, 민수기7:6절에서는 “모세가 수레와 소를 받아 레위인에게 주었으니”라고 했고, 9절에서는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의 기구인 하나님의 법궤를 옮길 때에는 반드시 레위족의 고핫 자손이 어깨로 메도록 정하셨습니다. 비록 다윗이 새 수레에 실었지만 새 수레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수레를 몰았던 사람은 레위족도 아닌 유다 족이었습니다. 성물을 만지면 죽는다고 했는데, 소가 날뛰어서 언약궤가 넘어지려고 하자 ‘웃사’가 붙잡았습니다. 정상이 참작될 듯도 하지만 하나님께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결국, 기쁜 마음과 좋은 뜻으로 언약궤를 모시려 했던 다윗은 하나님의 거부하심이 명백해지자 즉시 중단하고 물러났습니다. 이 때문에 뜻밖에도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게 된 ‘오벧에돔의 집’은 법궤가 머문 삼 개월 동안 큰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몇 개월 후에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게 준비하여 성공적으로 법궤를 옮겨오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그 소망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물으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구하십시오.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나, 성공적인 삶을 누리는 비결에 있어서는, 사람의 기발한 아이디어나 요령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삶의 성공을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