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663회
작성일
2003-02-22 14:36
♡♥♡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 / 엡5:1-7
***들어가는 말
여러분, ‘말(言)’ 때문에 낭패를 당해본 적 있으시지요? 아마도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야고보서3:2절에서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은 금방 듣고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한 번 스치듯 들은 말이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는 말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만 천 사람의 귀로 들어가며, 결국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한 마디 말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한 마디 말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도 있습니다. 명심보감에는 “깜박이는 한 점의 불티가 능히 넓고 넓은 숲을 태우고, 반 마디의 그릇된 말이 평생에 쌓은 덕을 무너뜨린다.”고 했습니다.
화가 ‘레오나르 다빈치’가 어느 날 매우 중요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화실을 찾아온 몇 명의 어린아이들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다가 그만 그의 물감 통을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다빈치는 ‘당장에 나가라.’고 아이들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울음을 터뜨리며 도망치듯 화실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다빈치가 다시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려는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붓 한번 까딱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인을 생각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문제를 깨달았습니다. 다빈치는 울면서 도망친 아이들을 다시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자신의 지나친 말을 정중하게 사과했습니다. 아이들은 얼굴이 밝아졌고, 다빈치 자신은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말은 자신에게나 이웃에게나 동일한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그 힘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많은 부분을 말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언14:3절에서는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는 입술로 스스로 보전하느니라.”고 했으며, 12:14절에서는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의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말 한마디 한 마디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마태복음12:36,37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판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성도와 불신자들의 생활을 대비하면서 성도의 마땅한 생활 방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시간에 살펴보려는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입니다. 우리가 벙어리가 아닌 다음에는 하루에도 다 기억하지 못할 많은 말을 하고 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말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1. 버려야 되는 말이 있습니다.
야고보서3:8-10절을 봅시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한 샘에서 쓴 물과 단 물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임에도 선뜻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서지를 않습니다. 그만큼 돈 안 드는 말이라고 쉽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도 좋은 말보다는 나쁜 말이나 욕설을 더 빨리 배웁니다. 가르치는 말은 잘 못하면서도 가르치지도 않은 욕은 잘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버려야 되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3절에서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했으며, 4절에서는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했으며, 4:29절에서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누추함’,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들은 모두 ‘음담패설’, ‘상스러운 농담’등을 말합니다. ‘음행’은 윤리 도덕적인 의미도 있지만 ‘우상숭배’와도 연관이 깊습니다. ‘더러운 것’이란, ‘육체적이나 도덕적인 불결함’을 말하며, ‘탐욕’은 ‘지나친 욕심’을 말합니다. 이런 것은 이름도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말은 우리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도 우리 입술에서 나오는 말대로 시행하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4:28절을 봅시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옛 말에도 “말이 씨가 된다.”고 했습니다. 말은 사람을 유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말을 되뇌면 정말 그런 것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생명에 손실을 주는 말들은 버려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때에, ‘그 피 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현실로 나타났는지 보았지 않습니까? 로마에 의하여 강제노역과 처형을 당했으며, 독일의 나치에 의하여 6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강제노역과 독가스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요즈음 매스컴에서는 ‘토크쇼’가 유행입니다. 바로 현란한 말장난입니다. 출연자들은 말에 능란합니다. 영화 부문에서도 ‘코미디 물’이 인기 상승이라고 합니다. 코미디 역시 말장난입니다. 세상이 답답하고 가식이 판을 치니까 사람들은 깊은 의미 없이 웃고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중한 생명을 그렇게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해 미국의 쌍둥이 빌딩 테러 때에도 죽음을 앞두고 남긴 짧은 말들이나, 어저께 대구 지하철 참사 때에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의 그 짧은 몇 마디 식을 남기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는 농담이나 쓸모없는 말들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미안해!” “사랑해” “그동안 고마웠다” 등등. 아름다운 말들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부정적인 말들을 버립시다. 비난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말들을 버립시다. 의미 없이 떠들고 농담하는 말들도 버립시다. 그리고 본문6절 말씀처럼, 사람들이 헛된 말로 우리를 속이지 못하도록 정신을 차립시다.
2. 해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말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본문에서는 ‘감사하는 말’을 꼽았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의 근본 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는 결코 어떤 섬김도 할 수가 없습니다. 감사가 없는 섬김은 ‘겉치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50편에서는 “감사로 예배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이 좋은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이 분은 언제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다니기 때문에 ‘감사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감사 할아버지가 식육점에서 고기 한 근을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봉지에서 빠져나온 고기를 마침 지나가던 개가 물고 달아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일어나 앉아서 그 모양을 물끄러미 보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개는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어떤 젊은이가 지나가다가 할아버지를 보고 “그게 무슨 감사할 일입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아 이 사람아, 고기는 잃어버렸지만 내 입맛은 그냥 있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감사는 조건을 따져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으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삶을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도록 하시는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나 말을 얼마나 합니까? 감사는 할수록 더 많은 감사할 일들을 주십니다. 이제 버려야 할 말과 해야 할 말을 구분하면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갑시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는 더욱 큰 영광이 되고, 우리들에게는 기쁨과 감사와 만족의 삶이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는 말
여러분, ‘말(言)’ 때문에 낭패를 당해본 적 있으시지요? 아마도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야고보서3:2절에서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은 금방 듣고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한 번 스치듯 들은 말이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는 말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만 천 사람의 귀로 들어가며, 결국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한 마디 말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한 마디 말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도 있습니다. 명심보감에는 “깜박이는 한 점의 불티가 능히 넓고 넓은 숲을 태우고, 반 마디의 그릇된 말이 평생에 쌓은 덕을 무너뜨린다.”고 했습니다.
화가 ‘레오나르 다빈치’가 어느 날 매우 중요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화실을 찾아온 몇 명의 어린아이들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다가 그만 그의 물감 통을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다빈치는 ‘당장에 나가라.’고 아이들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울음을 터뜨리며 도망치듯 화실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다빈치가 다시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려는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붓 한번 까딱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인을 생각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문제를 깨달았습니다. 다빈치는 울면서 도망친 아이들을 다시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자신의 지나친 말을 정중하게 사과했습니다. 아이들은 얼굴이 밝아졌고, 다빈치 자신은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말은 자신에게나 이웃에게나 동일한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그 힘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많은 부분을 말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언14:3절에서는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는 입술로 스스로 보전하느니라.”고 했으며, 12:14절에서는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의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말 한마디 한 마디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마태복음12:36,37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판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성도와 불신자들의 생활을 대비하면서 성도의 마땅한 생활 방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시간에 살펴보려는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입니다. 우리가 벙어리가 아닌 다음에는 하루에도 다 기억하지 못할 많은 말을 하고 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말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1. 버려야 되는 말이 있습니다.
야고보서3:8-10절을 봅시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한 샘에서 쓴 물과 단 물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임에도 선뜻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서지를 않습니다. 그만큼 돈 안 드는 말이라고 쉽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도 좋은 말보다는 나쁜 말이나 욕설을 더 빨리 배웁니다. 가르치는 말은 잘 못하면서도 가르치지도 않은 욕은 잘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버려야 되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3절에서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했으며, 4절에서는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했으며, 4:29절에서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누추함’,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들은 모두 ‘음담패설’, ‘상스러운 농담’등을 말합니다. ‘음행’은 윤리 도덕적인 의미도 있지만 ‘우상숭배’와도 연관이 깊습니다. ‘더러운 것’이란, ‘육체적이나 도덕적인 불결함’을 말하며, ‘탐욕’은 ‘지나친 욕심’을 말합니다. 이런 것은 이름도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말은 우리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도 우리 입술에서 나오는 말대로 시행하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4:28절을 봅시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옛 말에도 “말이 씨가 된다.”고 했습니다. 말은 사람을 유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말을 되뇌면 정말 그런 것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생명에 손실을 주는 말들은 버려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때에, ‘그 피 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현실로 나타났는지 보았지 않습니까? 로마에 의하여 강제노역과 처형을 당했으며, 독일의 나치에 의하여 6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강제노역과 독가스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요즈음 매스컴에서는 ‘토크쇼’가 유행입니다. 바로 현란한 말장난입니다. 출연자들은 말에 능란합니다. 영화 부문에서도 ‘코미디 물’이 인기 상승이라고 합니다. 코미디 역시 말장난입니다. 세상이 답답하고 가식이 판을 치니까 사람들은 깊은 의미 없이 웃고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중한 생명을 그렇게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해 미국의 쌍둥이 빌딩 테러 때에도 죽음을 앞두고 남긴 짧은 말들이나, 어저께 대구 지하철 참사 때에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의 그 짧은 몇 마디 식을 남기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는 농담이나 쓸모없는 말들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미안해!” “사랑해” “그동안 고마웠다” 등등. 아름다운 말들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부정적인 말들을 버립시다. 비난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말들을 버립시다. 의미 없이 떠들고 농담하는 말들도 버립시다. 그리고 본문6절 말씀처럼, 사람들이 헛된 말로 우리를 속이지 못하도록 정신을 차립시다.
2. 해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말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본문에서는 ‘감사하는 말’을 꼽았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의 근본 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는 결코 어떤 섬김도 할 수가 없습니다. 감사가 없는 섬김은 ‘겉치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50편에서는 “감사로 예배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이 좋은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이 분은 언제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다니기 때문에 ‘감사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감사 할아버지가 식육점에서 고기 한 근을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봉지에서 빠져나온 고기를 마침 지나가던 개가 물고 달아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일어나 앉아서 그 모양을 물끄러미 보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개는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어떤 젊은이가 지나가다가 할아버지를 보고 “그게 무슨 감사할 일입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아 이 사람아, 고기는 잃어버렸지만 내 입맛은 그냥 있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감사는 조건을 따져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으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삶을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도록 하시는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나 말을 얼마나 합니까? 감사는 할수록 더 많은 감사할 일들을 주십니다. 이제 버려야 할 말과 해야 할 말을 구분하면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갑시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는 더욱 큰 영광이 되고, 우리들에게는 기쁨과 감사와 만족의 삶이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