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간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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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02-22 14:34
♡♥♡ 하나님의 시간 / 요한복음11:17-27
*** 들어가는 말
여러분, 이 세상에서의 삶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에서 뚜렷하게 느껴지는 큰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시간의 한계’를 넘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시간의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삶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서나 지옥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영원’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잘 표현한 말씀이 베드로후서3:8절의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천년을 하루 같이 하루를 천년 같이 여기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서두에서 이렇게 시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속에서 느끼는 신앙의 세계를 생각해 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종종 답답한 환경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만 아무런 응답도 주어지지 않음을 경험합니다. 즉 어려운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면서 기도하지만 환경의 변화는 전혀 없습니다. 고통은 더해지고 마음의 갈등도 심해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으십니다. 이럴 때면 믿음이 좋은 사람들마저 주저앉게 됩니다.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역했던 ‘엘리야’ 선지자도 어려운 시련 앞에서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신앙 대결에서 승리하고 그들을 몰수히 죽였습니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왕후 이세벨의 복수심 앞에서 그는 도망했으며,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19:4)
엘리야에게는 하나님의 응답도 있었고 놀라운 이적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위기의 상황과 답답한 환경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환경은 더욱 악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비록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엘리야 선지자였지만 신앙의 좌절을 겪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았던 사람도 이와 같은 시련과 아픔의 길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더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이와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시간의 제약을 받는 사람들을 대하시는 모습입니다. 이 말씀에서 여러분의 삶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성도의 가슴을 조여 오는 시련의 환경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불과 2Km 정도의 거리에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그 마을에는 나사로와 그의 두 여동생 마리아와 마르다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부모 없이 어렵게 사는 가정이어서 주님의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두 자매가 기둥처럼 여기며 살아왔던 오빠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다급해진 자매는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위급한 상황을 전했습니다. 자매로서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도 삶의 위기는 닥쳐옵니다. 오늘의 성도인 우리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위인들에게 ‘생애에서 가장 잊지 못할 풍성한 은혜의 자리가 어디였는지?’를 묻는다면, 아마도 ‘생애의 가장 어둡고 차가웠던 자리’라고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한 배경에는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바쳐야 하는 뼈아픈 고통이 있었습니다. 요셉에게는 노예와 죄수라는 억울하고 괴로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차례의 죽음의 고비와 핍박과 환난과 끝내 순교를 당하는 환난의 강을 건넜습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면 할수록 사회와 이웃의 냉대와 시기가 따라옵니다. 세상은 자기와 삶의 색깔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쉽게 용납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6장14절 이하에서는,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하리요.”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15:18-19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깊어지면 질수록 세상은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닥쳐오는 시련과 위기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앞서 가시는 주님께서,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이 이 길을 갔기 때문이며, 우리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성도가 만난 위기에는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보낸 다급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면서 태연하게 다른 일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정확한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식을 들은 지 이틀이나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느닷없이 “유대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시면서 ‘베다니’로 가실 뜻을 비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만일 이 사건이 내게서 일어났다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왜 죽기 전에 오셔서 고쳐주지 않으시고, 죽기를 기다렸다가 죽은 후에 다시 살리러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입장을 바꾸어서 우리가 마리아와 마르다의 입장이라면 예수님이 무척 야속할 것입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예수님께 소식까지 전했는데, 예수님은 고의적으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신 것이 얼마나 밉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는 생활의 고달픔이나 아픔이나 위기를 만나서 다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상황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도리어 악화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지체장애자이면서도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체스터 스워’ 박사는 주님을 몹시도 전하고 싶어서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청소년 시절부터 복종적이고, 헌신적이고, 쓸모 있고,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미국에서 그 사람만큼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가진 최선의 것으로 나는 하나님을 섬길 것이며, 내가 그분을 필요로 할 때 그분이 그곳에 계실 것을 나는 압니다.”
어느 날, 조지아 주 아덴즈에서, 그가 탄 차가 참혹한 사고를 냈습니다. 그는 사고 차에서 비집고 나와 길가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는 피를 많이 흘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사고 지점을 맨 첫 번째로 지나가던 차에는 뜻밖에 의사와 간호원이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워 박사를 응급 처치하여 병원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가 퇴원했을 때 그의 손발은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이나 위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상황과 환경이 믿음으로도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까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영광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생각은 평안이며 잘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29:11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우리가 아픔이나 위기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함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에도 첫 부분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3.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시간에 이루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신 때는 나사로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무덤에 안치한 지 나흘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세상적인 이치로는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이르러서 입구를 막은 돌을 치우라고 하셨을 때에 마르다는 “주여, 죽은지가 이미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상황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미 끝이 난 상태입니다. 다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적합한 시간보다는 너무 늦게 일하신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성경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자손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100세나 되어 임신이 불가능해진 이후에야 오셔서 아들을 낳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사무엘 선지자는 약속한 일주일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왕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르고 났을 때 사무엘이 나타났으며, 이것이 시작이 되어 불순종하는 사울 왕으로 낙인이 찍히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에 절하지 않고서 풀무불에 던져 넣음을 당했습니다. 주님은 그 불 속에 계셨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이런 일은 너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의뢰하는지를 알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들의 시간과 생각과 환경과 상황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시간에 이루십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악인들은 형통하고 승승장구하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히려 핍박과 환난으로 고난을 면치 못하자 하나님께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하박국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나님께는 너무 늦는 법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정하신 때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너무 늦거나 빠르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시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은 피조세계에 정해진 제한일뿐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너머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보아야 하며 신뢰해야 합니다.
환경이 어둡고 위기가 닥칠수록 주님께 대한 신뢰는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현재’여야 합니다. 마르다는 ‘주님께서 오라비가 죽기 전에 오셨으면 살릴 수 있었겠노라.’고 고백했으며, 예수님이 부활을 말씀하시자 ‘마지막 날에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마르다의 신앙은 과거적이고 미래적입니다. 가장 중요한 ‘현재’는 빠져있습니다.
주님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지금’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본문25,26절을 봅시다. 이 말씀은 지금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나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까? 비록 이해가 되지 않는 환경이 있다할지라도 주님은 변함없이 뜻을 이루시며,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에 대하여 믿음을 잃지 맙시다. 감사하며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지혜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삶을 늘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여러분, 이 세상에서의 삶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에서 뚜렷하게 느껴지는 큰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시간의 한계’를 넘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시간의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삶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서나 지옥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영원’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잘 표현한 말씀이 베드로후서3:8절의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천년을 하루 같이 하루를 천년 같이 여기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서두에서 이렇게 시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속에서 느끼는 신앙의 세계를 생각해 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종종 답답한 환경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만 아무런 응답도 주어지지 않음을 경험합니다. 즉 어려운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면서 기도하지만 환경의 변화는 전혀 없습니다. 고통은 더해지고 마음의 갈등도 심해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으십니다. 이럴 때면 믿음이 좋은 사람들마저 주저앉게 됩니다.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역했던 ‘엘리야’ 선지자도 어려운 시련 앞에서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신앙 대결에서 승리하고 그들을 몰수히 죽였습니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왕후 이세벨의 복수심 앞에서 그는 도망했으며,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19:4)
엘리야에게는 하나님의 응답도 있었고 놀라운 이적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위기의 상황과 답답한 환경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환경은 더욱 악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비록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엘리야 선지자였지만 신앙의 좌절을 겪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았던 사람도 이와 같은 시련과 아픔의 길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더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이와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시간의 제약을 받는 사람들을 대하시는 모습입니다. 이 말씀에서 여러분의 삶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성도의 가슴을 조여 오는 시련의 환경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불과 2Km 정도의 거리에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그 마을에는 나사로와 그의 두 여동생 마리아와 마르다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부모 없이 어렵게 사는 가정이어서 주님의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두 자매가 기둥처럼 여기며 살아왔던 오빠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다급해진 자매는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위급한 상황을 전했습니다. 자매로서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도 삶의 위기는 닥쳐옵니다. 오늘의 성도인 우리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위인들에게 ‘생애에서 가장 잊지 못할 풍성한 은혜의 자리가 어디였는지?’를 묻는다면, 아마도 ‘생애의 가장 어둡고 차가웠던 자리’라고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한 배경에는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바쳐야 하는 뼈아픈 고통이 있었습니다. 요셉에게는 노예와 죄수라는 억울하고 괴로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차례의 죽음의 고비와 핍박과 환난과 끝내 순교를 당하는 환난의 강을 건넜습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면 할수록 사회와 이웃의 냉대와 시기가 따라옵니다. 세상은 자기와 삶의 색깔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쉽게 용납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6장14절 이하에서는,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하리요.”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15:18-19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깊어지면 질수록 세상은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닥쳐오는 시련과 위기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앞서 가시는 주님께서,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이 이 길을 갔기 때문이며, 우리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성도가 만난 위기에는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보낸 다급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면서 태연하게 다른 일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정확한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식을 들은 지 이틀이나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느닷없이 “유대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시면서 ‘베다니’로 가실 뜻을 비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만일 이 사건이 내게서 일어났다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왜 죽기 전에 오셔서 고쳐주지 않으시고, 죽기를 기다렸다가 죽은 후에 다시 살리러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입장을 바꾸어서 우리가 마리아와 마르다의 입장이라면 예수님이 무척 야속할 것입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예수님께 소식까지 전했는데, 예수님은 고의적으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신 것이 얼마나 밉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는 생활의 고달픔이나 아픔이나 위기를 만나서 다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상황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도리어 악화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지체장애자이면서도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체스터 스워’ 박사는 주님을 몹시도 전하고 싶어서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청소년 시절부터 복종적이고, 헌신적이고, 쓸모 있고,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미국에서 그 사람만큼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가진 최선의 것으로 나는 하나님을 섬길 것이며, 내가 그분을 필요로 할 때 그분이 그곳에 계실 것을 나는 압니다.”
어느 날, 조지아 주 아덴즈에서, 그가 탄 차가 참혹한 사고를 냈습니다. 그는 사고 차에서 비집고 나와 길가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는 피를 많이 흘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사고 지점을 맨 첫 번째로 지나가던 차에는 뜻밖에 의사와 간호원이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워 박사를 응급 처치하여 병원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가 퇴원했을 때 그의 손발은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이나 위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상황과 환경이 믿음으로도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까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영광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생각은 평안이며 잘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29:11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우리가 아픔이나 위기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함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에도 첫 부분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3.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시간에 이루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신 때는 나사로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무덤에 안치한 지 나흘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세상적인 이치로는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이르러서 입구를 막은 돌을 치우라고 하셨을 때에 마르다는 “주여, 죽은지가 이미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상황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미 끝이 난 상태입니다. 다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적합한 시간보다는 너무 늦게 일하신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성경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자손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100세나 되어 임신이 불가능해진 이후에야 오셔서 아들을 낳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사무엘 선지자는 약속한 일주일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왕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르고 났을 때 사무엘이 나타났으며, 이것이 시작이 되어 불순종하는 사울 왕으로 낙인이 찍히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에 절하지 않고서 풀무불에 던져 넣음을 당했습니다. 주님은 그 불 속에 계셨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이런 일은 너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의뢰하는지를 알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들의 시간과 생각과 환경과 상황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시간에 이루십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악인들은 형통하고 승승장구하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히려 핍박과 환난으로 고난을 면치 못하자 하나님께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하박국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나님께는 너무 늦는 법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정하신 때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너무 늦거나 빠르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시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은 피조세계에 정해진 제한일뿐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너머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보아야 하며 신뢰해야 합니다.
환경이 어둡고 위기가 닥칠수록 주님께 대한 신뢰는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현재’여야 합니다. 마르다는 ‘주님께서 오라비가 죽기 전에 오셨으면 살릴 수 있었겠노라.’고 고백했으며, 예수님이 부활을 말씀하시자 ‘마지막 날에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마르다의 신앙은 과거적이고 미래적입니다. 가장 중요한 ‘현재’는 빠져있습니다.
주님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지금’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본문25,26절을 봅시다. 이 말씀은 지금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나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까? 비록 이해가 되지 않는 환경이 있다할지라도 주님은 변함없이 뜻을 이루시며,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에 대하여 믿음을 잃지 맙시다. 감사하며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지혜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삶을 늘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