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취적인 신앙인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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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05-10 21:58
♡♥♡ 진취적인 신앙인 / 사사기 11:1-11
*** 들어가는 말
‘조지 뮬러’목사 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아의 아버지’입니다. 조지 뮬러 목사는 믿음과 사랑을 지닌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미국 장로교회 목사인 ‘아더 피어슨’ 박사가 뮬러 목사의 생애를 연구했습니다. 피어슨 목사는 연구 중에 뮬러 목사가 사용하던 성경을 조사하다가 특이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는 시편37:23절 말씀 옆에, 뮬러 목사의 친필로 “그리고 또한 멈춤까지도”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멈춤까지도”라는 의미는 고난과 역경, 혹은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음으로 인생행로가 멈추어 서는 때를 말합니다. 뮬러 목사는 역경의 때까지도 하나님께서 살피시고 인도하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인생행로에는 항상 좋은 일, 기쁜 일, 잘 되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기치 않았던 고난과 역경이 닥칠 때도 있고, 깜깜한 밤처럼 길을 찾지 못하는 인생의 어두움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진실한 신앙은 오히려 인생길이 어두울 때 그 진가가 나타나게 됩니다. 어두움이 깊을수록 빛이 더 밝게 빛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두움이 깊다는 것은 새 날이 가깝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밝아오는 새 날을 위하여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믿음을 정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준비된 사람만이 새 날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300여년의 사사시대 중에서 말기 때입니다. 사사시대란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던 신정시대와 왕이 통치하던 왕정시대의 중간 단계입니다. 사사들은 이스라엘의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대적을 물리치게 하시고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임을 동시에 행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입다’는 제사장과 선지자를 겸한 사사까지 총 16명의 사사 중 한 사람입니다. ‘입다’가 사사한 기간은 6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이 시간에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사사 ‘입다’가 자신의 환경을 개척해가는 진취적인 자세입니다.
먼저, 사사 ‘입다’의 환경적인 여건을 살펴봅시다.
‘입다’가 처한 환경은 당시로서는 도저히 사사가 될 수 없는 그런 여건이었습니다. ‘입다’는 한 종족을 통치하는 ‘길르앗’의 아들이었지만, 본 부인의 아들이 아닌 ‘기생’을 통하여 낳은 아들이었습니다(길르앗은 므낫세의 손자이자 길르앗 족속의 조상이며, 본문의 길르앗은 그 후손임. 이들이 사는 땅을 길르앗이라고도 함). ‘입다’는 출신이 비록 비천했지만 ‘큰 용사’였습니다. 본 부인의 아들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자라면서 자신들의 자리를 의식해서인지 ‘입다’를 추방시켜버렸습니다. ‘입다’는 이복형제들을 피하여 ‘돕’땅으로 도망을 갔으며, 떠돌이 건달패들의 두목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 암몬 족속들이 길르앗에게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다급해진 길르앗의 장로들은 ‘입다’를 찾아와서 ‘우리를 위하여 암몬 족속과 싸워주면 우리의 장관으로, 두목으로 모시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입다’는 승낙을 했고 길르앗의 두목이 되어 암몬 족속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결과는 승리했으며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입다’는 어떤 면에서 진취적인 자세였습니까?
‘입다’는 자신의 생애를 개척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입다’의 일대기를 보면 입다는 큰 용사였으며, 하나님의 사사로 쓰임 받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큰 용사’가 된다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즉 ‘입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생애를 개척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도망하여 돕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실력을 연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형편이 비슷한 주변의 잡류들이 모여왔던 것입니다. 그의 실력이 출중했다는 것은 그의 명성이 자신의 종족에게까지 알려졌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만일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스스로를 비관했다면 자신도 역시 아무런 쓸모없는 잡류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는 자신의 생애를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최선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입다’가 넓은 마음을 소유한 것입니다. 길르앗의 백성들은 암몬 족속들이 싸움을 걸어옴으로서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들은 나약한 자신의 지도자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항간에 소문이 자자한 과거에 추방된 ‘입다’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입다’를 찾아와서 ‘자신들이 처한 위기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이 기회가 ‘입다’에게는 그동안의 무시당하고 버림받은 과거를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자신의 종족을 받아들이는 관대함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입다’의 진취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취적인 신앙인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마태복음11:12절에서 주님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진취적인 자세로 그 환경을 극복했던 ‘입다’가 결국은 종족의 두령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정식적인 절차를 밟았다면 ‘길르앗’의 본 아들들 중에서 길르앗 종족의 두령이 나왔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입다’를 추방했을 것이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진취적인 성향의 입다를 두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제25회 세계올림픽이 1992년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서 열렸었습니다. 이 대회가 기억에 남는 것은 첫 금메달과 마지막 금메달을 한국에서 따냈기 때문입니다. 그 대회에서 첫 금메달의 영광을 전 국민에게 안겨준 선수는 사격의 여갑순 선수였고, 마지막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안겨주었습니다.
전적을 면밀히 분석한 전문가들조차 여갑순 선수가 우승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우승 후보인 불가리아의 레체바 선수보다 1-2점 뒤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상식 직후 여갑순 선수는 인터뷰에서 보도진이 ‘가장 의식했던 적수’를 물었을 때, ‘가장 의식했던 적수는 다른 선수가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기뻐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평안과 안전과 자존심을 추구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이나 위험한 상황에 대하여 경계하며 쉽게 뛰어들지 못합니다. 만일 평안이 깨어지고,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뒤떨어지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되면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잠언16:32절에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일상적인 평안함에 안주하려 하지 마십시오. 비록 한계에 부딪친다 할지라도 주저앉지 말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주어진 시간과 능력과 모든 것을 동원하여 자신을 개척하십시오. 준비된 자에게 주님은 기회를 주십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4:13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도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 믿음 속에서 담대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가꾸어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조지 뮬러’목사 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아의 아버지’입니다. 조지 뮬러 목사는 믿음과 사랑을 지닌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미국 장로교회 목사인 ‘아더 피어슨’ 박사가 뮬러 목사의 생애를 연구했습니다. 피어슨 목사는 연구 중에 뮬러 목사가 사용하던 성경을 조사하다가 특이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는 시편37:23절 말씀 옆에, 뮬러 목사의 친필로 “그리고 또한 멈춤까지도”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멈춤까지도”라는 의미는 고난과 역경, 혹은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음으로 인생행로가 멈추어 서는 때를 말합니다. 뮬러 목사는 역경의 때까지도 하나님께서 살피시고 인도하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인생행로에는 항상 좋은 일, 기쁜 일, 잘 되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기치 않았던 고난과 역경이 닥칠 때도 있고, 깜깜한 밤처럼 길을 찾지 못하는 인생의 어두움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진실한 신앙은 오히려 인생길이 어두울 때 그 진가가 나타나게 됩니다. 어두움이 깊을수록 빛이 더 밝게 빛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두움이 깊다는 것은 새 날이 가깝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밝아오는 새 날을 위하여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믿음을 정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준비된 사람만이 새 날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300여년의 사사시대 중에서 말기 때입니다. 사사시대란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던 신정시대와 왕이 통치하던 왕정시대의 중간 단계입니다. 사사들은 이스라엘의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대적을 물리치게 하시고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임을 동시에 행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입다’는 제사장과 선지자를 겸한 사사까지 총 16명의 사사 중 한 사람입니다. ‘입다’가 사사한 기간은 6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이 시간에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사사 ‘입다’가 자신의 환경을 개척해가는 진취적인 자세입니다.
먼저, 사사 ‘입다’의 환경적인 여건을 살펴봅시다.
‘입다’가 처한 환경은 당시로서는 도저히 사사가 될 수 없는 그런 여건이었습니다. ‘입다’는 한 종족을 통치하는 ‘길르앗’의 아들이었지만, 본 부인의 아들이 아닌 ‘기생’을 통하여 낳은 아들이었습니다(길르앗은 므낫세의 손자이자 길르앗 족속의 조상이며, 본문의 길르앗은 그 후손임. 이들이 사는 땅을 길르앗이라고도 함). ‘입다’는 출신이 비록 비천했지만 ‘큰 용사’였습니다. 본 부인의 아들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자라면서 자신들의 자리를 의식해서인지 ‘입다’를 추방시켜버렸습니다. ‘입다’는 이복형제들을 피하여 ‘돕’땅으로 도망을 갔으며, 떠돌이 건달패들의 두목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 암몬 족속들이 길르앗에게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다급해진 길르앗의 장로들은 ‘입다’를 찾아와서 ‘우리를 위하여 암몬 족속과 싸워주면 우리의 장관으로, 두목으로 모시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입다’는 승낙을 했고 길르앗의 두목이 되어 암몬 족속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결과는 승리했으며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입다’는 어떤 면에서 진취적인 자세였습니까?
‘입다’는 자신의 생애를 개척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입다’의 일대기를 보면 입다는 큰 용사였으며, 하나님의 사사로 쓰임 받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큰 용사’가 된다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즉 ‘입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생애를 개척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도망하여 돕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실력을 연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형편이 비슷한 주변의 잡류들이 모여왔던 것입니다. 그의 실력이 출중했다는 것은 그의 명성이 자신의 종족에게까지 알려졌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만일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스스로를 비관했다면 자신도 역시 아무런 쓸모없는 잡류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는 자신의 생애를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최선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입다’가 넓은 마음을 소유한 것입니다. 길르앗의 백성들은 암몬 족속들이 싸움을 걸어옴으로서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들은 나약한 자신의 지도자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항간에 소문이 자자한 과거에 추방된 ‘입다’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입다’를 찾아와서 ‘자신들이 처한 위기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이 기회가 ‘입다’에게는 그동안의 무시당하고 버림받은 과거를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자신의 종족을 받아들이는 관대함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입다’의 진취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취적인 신앙인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마태복음11:12절에서 주님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진취적인 자세로 그 환경을 극복했던 ‘입다’가 결국은 종족의 두령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정식적인 절차를 밟았다면 ‘길르앗’의 본 아들들 중에서 길르앗 종족의 두령이 나왔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입다’를 추방했을 것이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진취적인 성향의 입다를 두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제25회 세계올림픽이 1992년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서 열렸었습니다. 이 대회가 기억에 남는 것은 첫 금메달과 마지막 금메달을 한국에서 따냈기 때문입니다. 그 대회에서 첫 금메달의 영광을 전 국민에게 안겨준 선수는 사격의 여갑순 선수였고, 마지막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안겨주었습니다.
전적을 면밀히 분석한 전문가들조차 여갑순 선수가 우승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우승 후보인 불가리아의 레체바 선수보다 1-2점 뒤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상식 직후 여갑순 선수는 인터뷰에서 보도진이 ‘가장 의식했던 적수’를 물었을 때, ‘가장 의식했던 적수는 다른 선수가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기뻐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평안과 안전과 자존심을 추구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이나 위험한 상황에 대하여 경계하며 쉽게 뛰어들지 못합니다. 만일 평안이 깨어지고,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뒤떨어지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되면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잠언16:32절에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일상적인 평안함에 안주하려 하지 마십시오. 비록 한계에 부딪친다 할지라도 주저앉지 말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주어진 시간과 능력과 모든 것을 동원하여 자신을 개척하십시오. 준비된 자에게 주님은 기회를 주십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4:13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도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 믿음 속에서 담대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가꾸어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