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서로 받으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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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04-26 23:19
♡♥♡ 너희도 서로 받으라. / 로마서15:1-7
*** 들어가는 말
전도서4: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공동체가 힘을 내기 위해서는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슨 공동체이든 구성원들이 뜻이 하나가 되고 마음이 하나가 되면 큰 힘을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말처럼, 공동체가 제각기 자신의 소리를 높이면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합창단에는 성악가들을 잘 기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악가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합창은 단원들이 자신의 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소리를 들어가면서 화합된 소리를 낼 때 가능합니다. 어느 한 파트가 수가 많다고 강한 소리를 내면 화음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약한 파트를 배려해 가면서 소리의 조화를 이루어야 훌륭한 합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마치 많은 종류의 악기들이 모인 오케스트라나 혹은 개성 있는 사람들이 모인 합창단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필요 없는 존재란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화합을 이루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있습니다. 본문5-6절을 봅시다.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추구하는 뜻이 같고, 마음이 하나가 되고, 말까지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장인 요한복음17장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게 해달라는 간곡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11절에서는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셨고, 21-22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에 틀림없습니다. 비록 성도들이지만,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지금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여러 가지 여건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뜻이 같아야 하고, 서로를 배려하고, 관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산기슭에서 양을 기르는 목동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늦은 오후, 양들이 우리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의 자리가 비었습니다. 아버지와 딸은 잃은 양을 찾다가 그 양이 가시나무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바동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 양을 가시덤불에서 끄집어내었지만 그 양은 이미 여러 곳에 긁히고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양이 너무 불쌍해서 울면서 아버지에게,
“아빠, 저 나무가 미워요. 저 나무를 잘라버려요.”
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버지와 딸은 도끼를 가지고 가시나무를 잘라 버리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가시나무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이리 저리 날면서, 어제 양이 가시에 걸려 뽑혔던 털을 부리로 모으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그 작은 새는 부리 가득히 양털을 물고는 날아갔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보고 있던 어린 딸이 아버지에게,
“아빠, 하나님이 왜 이곳에 가시나무를 자라게 하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무의 가시들은 작은 새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부드러운 털을 모으는 일을 하는가 봐요.”
라고 했습니다. 작은 새 덕분에 가시나무는 도끼질을 모면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세계에도 의미 없이 창조된 것은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의 피조물 중에서 특별히 구별된 위대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6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서로 받는 것입니다. 본문1,2절에서,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연약한 자”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이 부족한 성도’를 말하며, “강한 자”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이 강한 성도’를 의미합니다. 즉 믿음이 강한 성도가 아직은 영적으로 미숙하여 신앙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도들의 약점을 끈기 있게 참고 견디며 이끌어주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7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즉 주님이 나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인 로마교회는 유대인 성도도 있었지만, 이방인으로서 개종한 성도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대교에 익숙해 있던 유대인 성도들은 매사에 구약의 율법과 규칙들을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이방인으로서 개종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구약적인 율법과 규례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오늘로 따지자면, 믿음의 연륜이 오랜 성도들은 교회의 절기와 각종 교회법들을 주장하면서 경건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신앙의 연륜이 짧은 성도는 신앙의 법에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고자 합니다. 또 다른 면으로는 예배의 시간이나 형식, 섬김과 봉사의 형식과 질 등의 차이를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그런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차이들을 비판하지 말고 서로 인내하면서 이끌어주고 따라가면서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이 말로는 쉬울지 모르지만 실천하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기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신앙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주장을 펼치기 보다는 그 일에 대하여 주님의 뜻을 찾으면 한결 쉬울 것입니다.
한동안 미국에서 크리스천 청소년들 간에 WWJD라는 팔찌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WWJD란 “What Would Jesus Do”의 첫 글자를 딴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 실천하자는 신앙의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시작은 ‘찰스 쉘돈’(Chrales M. Sheldon)이 1896년에 쓴 소설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In His Steps)”라는 책이 출판되면서부터 였습니다. 찰스 쉘돈은 미국 켄사스 주에서 목회하던 젊은 목사였습니다. 그가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되어 쓴 이 소설은 미국에서만 삼천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합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Jesus is Here"(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책으로 소개가 되었습니다.
이 책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믿음교회 목사였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가 쓴 “제자입니까?”라는 책이 불씨가 되어 한국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Jesus is Here!"
그렇습니다. ‘주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를 이루기에 훨씬 쉬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나 됨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미리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연습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서로 생각이 달라도 주님을 믿는 믿음이 하나이므로 뜻을 하나로 모읍시다. 그리고 마음도 하나로 모읍시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관용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대로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사랑과 행복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전도서4: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공동체가 힘을 내기 위해서는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슨 공동체이든 구성원들이 뜻이 하나가 되고 마음이 하나가 되면 큰 힘을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말처럼, 공동체가 제각기 자신의 소리를 높이면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합창단에는 성악가들을 잘 기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악가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합창은 단원들이 자신의 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소리를 들어가면서 화합된 소리를 낼 때 가능합니다. 어느 한 파트가 수가 많다고 강한 소리를 내면 화음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약한 파트를 배려해 가면서 소리의 조화를 이루어야 훌륭한 합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마치 많은 종류의 악기들이 모인 오케스트라나 혹은 개성 있는 사람들이 모인 합창단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필요 없는 존재란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화합을 이루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있습니다. 본문5-6절을 봅시다.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추구하는 뜻이 같고, 마음이 하나가 되고, 말까지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장인 요한복음17장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게 해달라는 간곡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11절에서는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셨고, 21-22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에 틀림없습니다. 비록 성도들이지만,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지금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여러 가지 여건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뜻이 같아야 하고, 서로를 배려하고, 관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산기슭에서 양을 기르는 목동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늦은 오후, 양들이 우리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의 자리가 비었습니다. 아버지와 딸은 잃은 양을 찾다가 그 양이 가시나무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바동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 양을 가시덤불에서 끄집어내었지만 그 양은 이미 여러 곳에 긁히고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양이 너무 불쌍해서 울면서 아버지에게,
“아빠, 저 나무가 미워요. 저 나무를 잘라버려요.”
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버지와 딸은 도끼를 가지고 가시나무를 잘라 버리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가시나무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이리 저리 날면서, 어제 양이 가시에 걸려 뽑혔던 털을 부리로 모으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그 작은 새는 부리 가득히 양털을 물고는 날아갔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보고 있던 어린 딸이 아버지에게,
“아빠, 하나님이 왜 이곳에 가시나무를 자라게 하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무의 가시들은 작은 새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부드러운 털을 모으는 일을 하는가 봐요.”
라고 했습니다. 작은 새 덕분에 가시나무는 도끼질을 모면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세계에도 의미 없이 창조된 것은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의 피조물 중에서 특별히 구별된 위대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6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서로 받는 것입니다. 본문1,2절에서,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연약한 자”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이 부족한 성도’를 말하며, “강한 자”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이 강한 성도’를 의미합니다. 즉 믿음이 강한 성도가 아직은 영적으로 미숙하여 신앙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도들의 약점을 끈기 있게 참고 견디며 이끌어주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7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즉 주님이 나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인 로마교회는 유대인 성도도 있었지만, 이방인으로서 개종한 성도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대교에 익숙해 있던 유대인 성도들은 매사에 구약의 율법과 규칙들을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이방인으로서 개종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구약적인 율법과 규례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오늘로 따지자면, 믿음의 연륜이 오랜 성도들은 교회의 절기와 각종 교회법들을 주장하면서 경건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신앙의 연륜이 짧은 성도는 신앙의 법에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고자 합니다. 또 다른 면으로는 예배의 시간이나 형식, 섬김과 봉사의 형식과 질 등의 차이를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그런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차이들을 비판하지 말고 서로 인내하면서 이끌어주고 따라가면서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이 말로는 쉬울지 모르지만 실천하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기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신앙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주장을 펼치기 보다는 그 일에 대하여 주님의 뜻을 찾으면 한결 쉬울 것입니다.
한동안 미국에서 크리스천 청소년들 간에 WWJD라는 팔찌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WWJD란 “What Would Jesus Do”의 첫 글자를 딴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 실천하자는 신앙의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시작은 ‘찰스 쉘돈’(Chrales M. Sheldon)이 1896년에 쓴 소설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In His Steps)”라는 책이 출판되면서부터 였습니다. 찰스 쉘돈은 미국 켄사스 주에서 목회하던 젊은 목사였습니다. 그가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되어 쓴 이 소설은 미국에서만 삼천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합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Jesus is Here"(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책으로 소개가 되었습니다.
이 책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믿음교회 목사였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가 쓴 “제자입니까?”라는 책이 불씨가 되어 한국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Jesus is Here!"
그렇습니다. ‘주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를 이루기에 훨씬 쉬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나 됨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미리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연습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서로 생각이 달라도 주님을 믿는 믿음이 하나이므로 뜻을 하나로 모읍시다. 그리고 마음도 하나로 모읍시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관용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대로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사랑과 행복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