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하게 세웁시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5,911회
작성일
2003-04-19 18:42
♡♥♡ 든든하게 세웁시다. / 유다서 1:20-23
*** 들어가는 말
세상 돌아가는 일들이 너무나 어수선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확고한 소망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마저 이리저리 흔들리는 광경이 많이 목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전선(戰線)에는 이상이 없습니까? 마음이 살아가는 일로 염려되거나 걱정이 일어나지는 않습니까?
고대 스페인에 ‘헤르만 크르테스’라고 하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항해하여 멕시코에 상륙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인 멕시코 군은 숫적으로 우세했고 위치마저 스페인 군이 불리했습니다. 상황이 불리하게 되자 스페인 군사들이 사기가 떨어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장군은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장군은 그날 밤에 충복 몇 사람을 불러서 자신들이 타고 온 배들을 모조리 불질러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배들은 모두 불타 버렸고 이제는 아무도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장군은 군사들에게 선언했습니다.
“자, 우리는 이제 정복을 하거나 죽거나, 둘 중에 하나다. 돌아가는 길은 없다!”
그러면서 진군을 명령했습니다. 결국 스페인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일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란다면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핏하면 예전의 노예생활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비록 노예생활이었지만 지금의 고통스러운 생활보다는 나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순간적인 생활로 본다면 광야의 생활보다 노예 때의 생활이 더 편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생활은 보장된 미래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육신이 좀더 쾌락적이고 편한 길을 찾아다니겠지요. 이스라엘이 회상하는 것을 봅시다. 출애굽기16:3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원망과 불평은 삶이 고되고 어려움이 닥칠 때면 여지없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원망이 많았던 것은 정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큰 이적과 능력을 보기도 했고 체험하기도 했지만, 얼떨결에 지나가버린 폭풍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잠시 폭풍 속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눈앞의 현실에 매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된 원인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든든히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종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권면하는 본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든든하게 세울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확고한 신앙의 삶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종말의 시대에 이처럼 확고한 신앙의 삶이 더욱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전에는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래도 성도는 꾸준히 늘어만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이런 비난과 배척보다는 무관심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기독교에서 다른 종교로 빠져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자연히 숫자가 감소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전에 노방전도를 할 때, 또는 이 마을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이, 예수쟁이들 못쓴다.” “말만 잘하는 사람들” “자기들끼리만 다 해먹는다.” 등. 이런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내는 종류의 이야기들입니다. 어느 점잖게 보이는 노신사는 “예수는 좋은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싫어서 안 간다.”고도 했습니다. 지금 그들의 말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비쳐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고 배척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이런 이중적인 삶의 모습에 무관심해져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집을 세워야 폭풍이 불고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 반석 위에 세운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세워지는 우리의 집은 그 기초가 하나님의 사랑이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린도전서3:11절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확실한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믿음이란, 자신의 기분이나 세상의 환경에도 초연한 믿음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죽음 앞에서도 주님을 당당히 선언할 수 있는 그런 믿음입니다. 이런 든든한 기초 위에 자신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집은 어떻게 짓습니까?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집을 짓는 방식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통달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 세워지는 영적인 집은 하나님의 설계대로 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은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육신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삶은 ‘세상에서 사랑으로 행한 삶’입니다.
골로새서3:14절에서는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하셨고, 고린도전서13:2-3절에서는,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고린도전서16:14절에서는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건축원리입니다. 훗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가 지은 집이 하나님의 공력 심판대를 통과할 것입니다. 공력 심판대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설계되었는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재료를 사용했는지 등을 판별할 것입니다. 공력을 밝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불’입니다. 고린도전서3:12-13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우리는 이 건축원리를 생각하면서 집을 지어야 합니다. 어떻게 짓습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건강과 능력과 재물 등 모든 것을 다하여 가장 최상의 힘과 정성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일이십년 살 집도 아니고, 영원토록 살 집을 짓는데 그만한 정성을 들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공로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을 짓는 것은 각 자가 자신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참고로, 천국에서는 부부가 없기 때문에 각 자의 집이 있어야 합니다.)
이왕에 예수님 믿는 것, 확실한 믿음을 가집시다. 그리고 이왕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일군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든든한 집을 세웁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우리 또한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복된 삶을 만들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세상 돌아가는 일들이 너무나 어수선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확고한 소망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마저 이리저리 흔들리는 광경이 많이 목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전선(戰線)에는 이상이 없습니까? 마음이 살아가는 일로 염려되거나 걱정이 일어나지는 않습니까?
고대 스페인에 ‘헤르만 크르테스’라고 하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항해하여 멕시코에 상륙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인 멕시코 군은 숫적으로 우세했고 위치마저 스페인 군이 불리했습니다. 상황이 불리하게 되자 스페인 군사들이 사기가 떨어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장군은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장군은 그날 밤에 충복 몇 사람을 불러서 자신들이 타고 온 배들을 모조리 불질러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배들은 모두 불타 버렸고 이제는 아무도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장군은 군사들에게 선언했습니다.
“자, 우리는 이제 정복을 하거나 죽거나, 둘 중에 하나다. 돌아가는 길은 없다!”
그러면서 진군을 명령했습니다. 결국 스페인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일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란다면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핏하면 예전의 노예생활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비록 노예생활이었지만 지금의 고통스러운 생활보다는 나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순간적인 생활로 본다면 광야의 생활보다 노예 때의 생활이 더 편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생활은 보장된 미래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육신이 좀더 쾌락적이고 편한 길을 찾아다니겠지요. 이스라엘이 회상하는 것을 봅시다. 출애굽기16:3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원망과 불평은 삶이 고되고 어려움이 닥칠 때면 여지없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원망이 많았던 것은 정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큰 이적과 능력을 보기도 했고 체험하기도 했지만, 얼떨결에 지나가버린 폭풍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잠시 폭풍 속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눈앞의 현실에 매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된 원인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든든히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종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권면하는 본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든든하게 세울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확고한 신앙의 삶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종말의 시대에 이처럼 확고한 신앙의 삶이 더욱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전에는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래도 성도는 꾸준히 늘어만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이런 비난과 배척보다는 무관심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기독교에서 다른 종교로 빠져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자연히 숫자가 감소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전에 노방전도를 할 때, 또는 이 마을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이, 예수쟁이들 못쓴다.” “말만 잘하는 사람들” “자기들끼리만 다 해먹는다.” 등. 이런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내는 종류의 이야기들입니다. 어느 점잖게 보이는 노신사는 “예수는 좋은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싫어서 안 간다.”고도 했습니다. 지금 그들의 말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비쳐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고 배척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이런 이중적인 삶의 모습에 무관심해져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집을 세워야 폭풍이 불고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 반석 위에 세운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세워지는 우리의 집은 그 기초가 하나님의 사랑이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린도전서3:11절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확실한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믿음이란, 자신의 기분이나 세상의 환경에도 초연한 믿음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죽음 앞에서도 주님을 당당히 선언할 수 있는 그런 믿음입니다. 이런 든든한 기초 위에 자신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집은 어떻게 짓습니까?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집을 짓는 방식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통달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 세워지는 영적인 집은 하나님의 설계대로 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은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육신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삶은 ‘세상에서 사랑으로 행한 삶’입니다.
골로새서3:14절에서는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하셨고, 고린도전서13:2-3절에서는,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고린도전서16:14절에서는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건축원리입니다. 훗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가 지은 집이 하나님의 공력 심판대를 통과할 것입니다. 공력 심판대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설계되었는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재료를 사용했는지 등을 판별할 것입니다. 공력을 밝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불’입니다. 고린도전서3:12-13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우리는 이 건축원리를 생각하면서 집을 지어야 합니다. 어떻게 짓습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건강과 능력과 재물 등 모든 것을 다하여 가장 최상의 힘과 정성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일이십년 살 집도 아니고, 영원토록 살 집을 짓는데 그만한 정성을 들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공로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을 짓는 것은 각 자가 자신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참고로, 천국에서는 부부가 없기 때문에 각 자의 집이 있어야 합니다.)
이왕에 예수님 믿는 것, 확실한 믿음을 가집시다. 그리고 이왕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일군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든든한 집을 세웁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우리 또한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복된 삶을 만들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