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생명의 역사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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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04-19 18:40
♡♥♡ 신비로운 생명의 역사 / 마가복음 4:26-29
*** 들어가는 말
어떤 장님이 밤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길에 누구하고 부딪칠 것만 같아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필요도 없는 등불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의 등불을 보고 비켜갈 수 있도록 등불을 켜들고 밤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얼마가지도 못해서 어떤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눈도 없소?”라고 장님이 소리치자 상대방은 어리둥절해 하며 “어두워서 보지를 못했습니다.”라고 사과했습니다. 장님은 “내 등불이 안 보인다는 말이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제야 그 사람이 자세히 살펴보니 장님은 불 꺼진 등을 들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꺼진 등불을 들고 있지 않습니까? 어디, 직접 한번 만져보시지요.” 장님이 등을 만져보니 정말 싸늘했습니다. 장님은 바람에 불이 꺼진 지도 모른 채 불 꺼진 등만 들고 밤거리를 돌아다닌 것입니다.
오늘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위대하고 큰 절기인 부활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소망이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참으로 큰 기쁨의 날입니다. 이 기쁨은 영의 생명이 있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많은 신자 중에는 자신의 믿음의 등에 불이 켜져 있는지 꺼져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부활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열 처녀의 비유’에서처럼, 믿음의 등이 있다할지라도 기름이 없어 불이 꺼져있으면 혼인잔치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부활주일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신비로운 생명의 역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씨앗의 성장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두 가지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이 자라는 과정’이며, 다른 하나는 ‘생명을 다루는 일군’에 대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농장에 뿌려진 씨앗이 자라는 신비로운 과정을 통하여 영의 생명이 자라는 것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성장과정과 더불어 하나님의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한계와 해야 할 일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앞 쪽에는 “씨 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네 종류의 밭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다음에는 “겨자씨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나라의 놀라운 성장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두 비유 사이에 본문이 위치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신비로운 생명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일하는 일군들의 한계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비유에 등장하는 일군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농장에서 일하는 일군들입니다. 우리는 농장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농사를 위하여 씨앗을 뿌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창고를 채우기 위하여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또한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은 생명이 자라는 신비로운 일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이는 일군들이 지혜롭게 일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1. 일군들에게 주어진 일은 무엇입니까?
본문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일군의 명칭에 대하여 자세히 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는 농사꾼이 그의 밭에 뿌려 놓은 씨와 같다. 그 씨는 농사꾼이 가꾸지 않아도 자고 깨고 하는 동안에 저절로 싹이 돋아 자란다. 땅이 그 씨를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나며 마침내는 이삭에 낟알이 맺힌다. 그러면 농사꾼은 낫을 가지고 나가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인다.”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바로 ‘농사꾼’입니다. 농사꾼이 하는 일은 ‘씨를 뿌리는 일’과 ‘곡식을 거두는 일’입니다. 농사꾼이 씨를 뿌려놓은 후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씨앗이 터져서 싹이 나서 자라고, 이삭이 피고, 이삭에 곡식이 달려 익게 되는 모든 과정은 Auto system (자동장치)입니다. 그러면 일군 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농사꾼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군인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1: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4:6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복음이며, 우리가 뿌려야 하는 씨앗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먼저 씨앗이 쓸데없이 아무렇게나 뿌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씨앗을 노리는 새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사단이 농부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뿌려진 씨앗을 빼앗아 간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뿌려지기가 바쁘게 빼앗기는 이유는 밭이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길 가’라고 표현했습니다. 길은 사람들이 다녀서 단단하게 굳어있기 때문에 씨앗이 발아할 수가 없습니다. 혹 갈아놓은 밭이라 해도 돌을 골라내고, 흙을 잘게 부수고, 골을 타는 것과 비가 내리기 전후 등 씨를 뿌릴 적당한 조건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일군은 씨를 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야 하며 잘 활용해야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우리들은 항상 일해야 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마치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인 마태복음7:6절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하십니다. 씨앗인 복음은 곧 생명이므로 소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염려한 나머지 씨를 뿌리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부지런히 뿌리고, 계속 뿌려야 합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인 우리가 해야 할 또 다른 일은 ‘곡식을 거두는 것’입니다.
농사꾼은 곡식을 언제 거두어 들여야 할지를 압니다. 너무 일찍 거두어들이면 알이 꽉 들어차지 않아서 손실이 크게 됩니다. 반면에 너무 익도록 버려두면 알이 저절로 흘러버려서 역시 버려지게 되며 손실이 크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라고 하십니다. 아주 적절한 시기에 추수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추수 때’를 주의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추수 때’라고 하면 종말인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의미합니다. 혹은 개인적인 종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때의 추수 꾼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거나 ‘천사들’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추수 때’를 종말로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추수 꾼도 천사들이 아니라 씨를 뿌린 바로 그 농사꾼입니다. 요한복음4:35절을 봅시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우물곁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추수 때’를 수가성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려고 몰려나오는 바로 그 시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추수 꾼은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주님과 제자들이겠지요.
그러면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엮어봅시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웃이나 친구들에게 여러 가지로 호의를 베풉니다. 때때로 초대하여 음식과 차를 대접하기도 하며, 때로는 반찬거리나 작은 선물도 건네줍니다. 좋은 곳이 있으면 함께 구경 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많이 열렸을 때에 주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한 번 들었다고 해서 금방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기회가 되는대로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반응이 시원치 않고, 때로는 바위처럼 굳어져 있는 것처럼 여겨져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럭저럭 시간이 흐릅니다. 빠르면 며칠이 될 수도 있고, 늦어지면 몇 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인가 그가 주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며 마음이 열려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때가 바로 추수할 때입니다.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땅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보살피며, 세례를 받기까지 지속적으로 보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28:19-20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것이 추수하는 일입니다.
때로는 내가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둘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뿌린 씨앗을 다른 사람이 열매로 거둘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요한복음4:37-38절을 계속봅시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일한 대로 상을 받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추수하는 그 순간이 바로 그의 영혼이 부활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열매가 더디 익는다고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 됩니다. 너무 다그치거나 말씀을 많이 먹이려고 계속 새로운 것을 이야기 하면 싹은 죽어버리게 됩니다. 마치 겨우 어린 싹이 났음에도 욕심어린 마음에 강한 비료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결과는 싹이 타서 죽어버립니다. 자라는 것은 일군의 소관이 아님으로 주인에게 맡겨두어야 합니다.
2. 생명은 어떻게 자랍니까?
하나님의 일군인 농사꾼은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일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문27,28절에서는 일단 뿌려진 씨앗이 자라는 일에 있어서는 농사꾼이 할 일이 없음을 주의시키고 있습니다. 아! 농사꾼이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밤낮 자고 깨고 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즉 생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도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에 대한 일군의 한계점입니다.
일군에 의하여 뿌려진 씨앗은 이제 하나님께서 구성해 놓으신 Auto system mode (자동 운영 체제)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시스템을 본문에서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씨앗에서 싹이 나고, 이삭이 피고, 열매가 영그는 이 과정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신비는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봉해진 비밀과도 같습니다. 오직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다시 시나리오를 만들어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자 혹은 전도자를 통하여 사람의 영혼 속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말씀이 그 영혼 속에서 뿌리를 내립니다.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그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사람의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사람에게 가려져 있어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생명을 창조하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죽어 있던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로운 생명의 역사에 우리는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고 깨고 하는 사이에도 씨앗은 자라고 있으니까요. 지혜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일군에게 정하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합시다. 다만 한 가지, 우리의 한계 밖의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은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한 소년이 밭에서 몇 시간째 끙끙거리며 무엇인가 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밭에 있는 큰 돌을 옮기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그 돌은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소년의 아버지인 농부가 그곳에 왔습니다.
“얘야, 돌이 움직이지 않니?” 라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예, 꼼짝도 안 해요.”라고 대답합니다. “얘야,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해 봤느냐?”라고 아버지가 다시 물었습니다. “예, 아버지, 지금 몇 시간째 해 보았는데 이제는 더 못하겠어요.”라고 주저앉으면서 말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아니야, 넌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보지는 않았어. 너는 아직 이 아빠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잖아.”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써다가 낙심하지는 않습니까? 주인이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면서 지금도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는 주님의 일에 성실한 일군으로 동참하여 더욱 큰 기쁨을 소유하시고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어떤 장님이 밤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길에 누구하고 부딪칠 것만 같아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필요도 없는 등불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의 등불을 보고 비켜갈 수 있도록 등불을 켜들고 밤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얼마가지도 못해서 어떤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눈도 없소?”라고 장님이 소리치자 상대방은 어리둥절해 하며 “어두워서 보지를 못했습니다.”라고 사과했습니다. 장님은 “내 등불이 안 보인다는 말이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제야 그 사람이 자세히 살펴보니 장님은 불 꺼진 등을 들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꺼진 등불을 들고 있지 않습니까? 어디, 직접 한번 만져보시지요.” 장님이 등을 만져보니 정말 싸늘했습니다. 장님은 바람에 불이 꺼진 지도 모른 채 불 꺼진 등만 들고 밤거리를 돌아다닌 것입니다.
오늘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위대하고 큰 절기인 부활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소망이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참으로 큰 기쁨의 날입니다. 이 기쁨은 영의 생명이 있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많은 신자 중에는 자신의 믿음의 등에 불이 켜져 있는지 꺼져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부활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열 처녀의 비유’에서처럼, 믿음의 등이 있다할지라도 기름이 없어 불이 꺼져있으면 혼인잔치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부활주일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신비로운 생명의 역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씨앗의 성장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두 가지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이 자라는 과정’이며, 다른 하나는 ‘생명을 다루는 일군’에 대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농장에 뿌려진 씨앗이 자라는 신비로운 과정을 통하여 영의 생명이 자라는 것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성장과정과 더불어 하나님의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한계와 해야 할 일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앞 쪽에는 “씨 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네 종류의 밭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다음에는 “겨자씨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나라의 놀라운 성장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두 비유 사이에 본문이 위치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신비로운 생명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일하는 일군들의 한계와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비유에 등장하는 일군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농장에서 일하는 일군들입니다. 우리는 농장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농사를 위하여 씨앗을 뿌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창고를 채우기 위하여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또한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은 생명이 자라는 신비로운 일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이는 일군들이 지혜롭게 일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1. 일군들에게 주어진 일은 무엇입니까?
본문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일군의 명칭에 대하여 자세히 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는 농사꾼이 그의 밭에 뿌려 놓은 씨와 같다. 그 씨는 농사꾼이 가꾸지 않아도 자고 깨고 하는 동안에 저절로 싹이 돋아 자란다. 땅이 그 씨를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나며 마침내는 이삭에 낟알이 맺힌다. 그러면 농사꾼은 낫을 가지고 나가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인다.”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바로 ‘농사꾼’입니다. 농사꾼이 하는 일은 ‘씨를 뿌리는 일’과 ‘곡식을 거두는 일’입니다. 농사꾼이 씨를 뿌려놓은 후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씨앗이 터져서 싹이 나서 자라고, 이삭이 피고, 이삭에 곡식이 달려 익게 되는 모든 과정은 Auto system (자동장치)입니다. 그러면 일군 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농사꾼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군인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1: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4:6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복음이며, 우리가 뿌려야 하는 씨앗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먼저 씨앗이 쓸데없이 아무렇게나 뿌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씨앗을 노리는 새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사단이 농부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뿌려진 씨앗을 빼앗아 간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뿌려지기가 바쁘게 빼앗기는 이유는 밭이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길 가’라고 표현했습니다. 길은 사람들이 다녀서 단단하게 굳어있기 때문에 씨앗이 발아할 수가 없습니다. 혹 갈아놓은 밭이라 해도 돌을 골라내고, 흙을 잘게 부수고, 골을 타는 것과 비가 내리기 전후 등 씨를 뿌릴 적당한 조건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일군은 씨를 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야 하며 잘 활용해야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우리들은 항상 일해야 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마치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인 마태복음7:6절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하십니다. 씨앗인 복음은 곧 생명이므로 소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염려한 나머지 씨를 뿌리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부지런히 뿌리고, 계속 뿌려야 합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인 우리가 해야 할 또 다른 일은 ‘곡식을 거두는 것’입니다.
농사꾼은 곡식을 언제 거두어 들여야 할지를 압니다. 너무 일찍 거두어들이면 알이 꽉 들어차지 않아서 손실이 크게 됩니다. 반면에 너무 익도록 버려두면 알이 저절로 흘러버려서 역시 버려지게 되며 손실이 크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라고 하십니다. 아주 적절한 시기에 추수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추수 때’를 주의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추수 때’라고 하면 종말인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의미합니다. 혹은 개인적인 종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때의 추수 꾼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거나 ‘천사들’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추수 때’를 종말로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추수 꾼도 천사들이 아니라 씨를 뿌린 바로 그 농사꾼입니다. 요한복음4:35절을 봅시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우물곁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추수 때’를 수가성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려고 몰려나오는 바로 그 시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추수 꾼은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주님과 제자들이겠지요.
그러면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엮어봅시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웃이나 친구들에게 여러 가지로 호의를 베풉니다. 때때로 초대하여 음식과 차를 대접하기도 하며, 때로는 반찬거리나 작은 선물도 건네줍니다. 좋은 곳이 있으면 함께 구경 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많이 열렸을 때에 주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한 번 들었다고 해서 금방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기회가 되는대로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반응이 시원치 않고, 때로는 바위처럼 굳어져 있는 것처럼 여겨져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럭저럭 시간이 흐릅니다. 빠르면 며칠이 될 수도 있고, 늦어지면 몇 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인가 그가 주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며 마음이 열려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때가 바로 추수할 때입니다.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땅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보살피며, 세례를 받기까지 지속적으로 보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28:19-20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것이 추수하는 일입니다.
때로는 내가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둘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뿌린 씨앗을 다른 사람이 열매로 거둘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요한복음4:37-38절을 계속봅시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일한 대로 상을 받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추수하는 그 순간이 바로 그의 영혼이 부활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열매가 더디 익는다고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 됩니다. 너무 다그치거나 말씀을 많이 먹이려고 계속 새로운 것을 이야기 하면 싹은 죽어버리게 됩니다. 마치 겨우 어린 싹이 났음에도 욕심어린 마음에 강한 비료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결과는 싹이 타서 죽어버립니다. 자라는 것은 일군의 소관이 아님으로 주인에게 맡겨두어야 합니다.
2. 생명은 어떻게 자랍니까?
하나님의 일군인 농사꾼은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일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문27,28절에서는 일단 뿌려진 씨앗이 자라는 일에 있어서는 농사꾼이 할 일이 없음을 주의시키고 있습니다. 아! 농사꾼이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밤낮 자고 깨고 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즉 생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도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에 대한 일군의 한계점입니다.
일군에 의하여 뿌려진 씨앗은 이제 하나님께서 구성해 놓으신 Auto system mode (자동 운영 체제)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시스템을 본문에서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씨앗에서 싹이 나고, 이삭이 피고, 열매가 영그는 이 과정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신비는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봉해진 비밀과도 같습니다. 오직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다시 시나리오를 만들어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자 혹은 전도자를 통하여 사람의 영혼 속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말씀이 그 영혼 속에서 뿌리를 내립니다.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그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사람의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사람에게 가려져 있어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생명을 창조하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죽어 있던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로운 생명의 역사에 우리는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고 깨고 하는 사이에도 씨앗은 자라고 있으니까요. 지혜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일군에게 정하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합시다. 다만 한 가지, 우리의 한계 밖의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은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한 소년이 밭에서 몇 시간째 끙끙거리며 무엇인가 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밭에 있는 큰 돌을 옮기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그 돌은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소년의 아버지인 농부가 그곳에 왔습니다.
“얘야, 돌이 움직이지 않니?” 라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예, 꼼짝도 안 해요.”라고 대답합니다. “얘야,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해 봤느냐?”라고 아버지가 다시 물었습니다. “예, 아버지, 지금 몇 시간째 해 보았는데 이제는 더 못하겠어요.”라고 주저앉으면서 말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아니야, 넌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보지는 않았어. 너는 아직 이 아빠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잖아.”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써다가 낙심하지는 않습니까? 주인이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면서 지금도 생명의 역사를 이루시는 주님의 일에 성실한 일군으로 동참하여 더욱 큰 기쁨을 소유하시고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