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생각하시는 하나님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5,826회
작성일
2003-04-12 21:21
♡♥♡ 사람을 생각하시는 하나님 / 막2:21-28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몰라줄 때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도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스스로 소개하고 홍보해서라도 자신을 알리려고 애를 씁니다. 요즈음 젊은이들 세계에서 ‘개인기’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는 것도 이런 시대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만의 독특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야 알아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알리고,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아주시기를 바라지 않은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때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사정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이사야40:2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실 때가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해입니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성경에는 ‘하지 말라.’고 제한하는 것도 많고, ‘어려운 것을 강압적으로 하라.’는 것도 많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일을 지키고, 헌신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등.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괴롭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기가 어렵다고 불평합니다. 이것이 사실일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려고 하셨다면 애당초 이런 신앙의 길을 주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사람들의 죄를 사하시려고 죽게 하실 필요는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렵게 만들고 고통을 자처하고 나선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이며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29: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그러면,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봅시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가면서 이삭을 땄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시장기가 돌아서 밀 이삭을 잘라 비벼서 먹었는가 봅니다. 그 때 동행하던 무리 중에 바리새인들이 그 광경을 보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즉 제자들이 안식일에 대한 율법을 어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근거를 봅시다. 출애굽기20:10절입니다. “일곱째 날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 안에 거하는 나그네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 말씀이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정죄하는 근거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아주 먼 옛날에 있었던 다윗의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로 드신 본문25-26절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의 일입니다. 다윗은 자신과 함께 한 무리들의 주림을 면하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성소의 떡 상에 진설했던 떡을 먹었습니다(삼상21:1-6).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행위였으며, 당연히 죽어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때에 따라서는 율법을 어겨도 좋다는 말입니까?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했듯이,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무시하시면서 까지 제자들의 편을 들어 준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율법을 어겨도 좋다는 말도 아니며 제자들의 편을 들어준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율법의 본질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위하여 제정하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아담 이후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본질이자 목적은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나 많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주신 목적은 생각지도 않고 다만 지키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번뜩이면서 율법을 범하는 사람들을 찾아내고는 정죄하고 처벌했습니다. 정죄되어 출교당하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으로서는 ‘죽어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많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다 보니 눈치를 살피면서 지키는 척이라도 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23:27-28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경건파’들이 있어서 그들은 스스로의 생활을 세상과 격리시켰습니다. 그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했는데, 결혼을 금하고 쾌락을 멀리했습니다. 심지어는 안식일이면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금지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용변을 볼 수가 없으니 자연히 먹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살맛이 나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이러한 고통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살려주시려고 제정하신 율법이 오히려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후로 하나님의 희생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런 괴로움에 빠진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함입니다. 메시아의 사역을 예언한 이사야61:1-2절의 말씀을 인용한 누가복음4:18-19절에서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8:32절에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하여 죽음이 확정된 사람에게 주어진 사면장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다리가 되셨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너무나 고마워서 주님을 따르며 섬기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새 포도주’입니다. 그리고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가는 것이 ‘새롭게 짜여진 천이며 새 부대’입니다.
마음에 부담감을 안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억지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율법이 주도하던 세상에서 행하던 옛 행실들이며 ‘낡은 부대이며 낡은 천’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움으로 구원을 받아야만 했던 행실의 법이 율법입니다.
오늘에 있어서는 자신의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곧 낡은 천이며 낡은 부대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2:8-9절을 기억합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것, 기도하고, 말씀 읽고, 헌금하고, 섬김과 봉사 하는 모든 신앙의 행위는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생각하시는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따름으로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인 복음을 담기에 합당한 새 부대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나를 위하여 희생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 따릅시다. 그리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몰라줄 때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도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스스로 소개하고 홍보해서라도 자신을 알리려고 애를 씁니다. 요즈음 젊은이들 세계에서 ‘개인기’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는 것도 이런 시대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만의 독특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야 알아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알리고,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아주시기를 바라지 않은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때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사정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이사야40:2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실 때가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해입니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성경에는 ‘하지 말라.’고 제한하는 것도 많고, ‘어려운 것을 강압적으로 하라.’는 것도 많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일을 지키고, 헌신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등.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괴롭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기가 어렵다고 불평합니다. 이것이 사실일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려고 하셨다면 애당초 이런 신앙의 길을 주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사람들의 죄를 사하시려고 죽게 하실 필요는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렵게 만들고 고통을 자처하고 나선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이며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29: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그러면,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봅시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가면서 이삭을 땄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시장기가 돌아서 밀 이삭을 잘라 비벼서 먹었는가 봅니다. 그 때 동행하던 무리 중에 바리새인들이 그 광경을 보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즉 제자들이 안식일에 대한 율법을 어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근거를 봅시다. 출애굽기20:10절입니다. “일곱째 날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 안에 거하는 나그네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 말씀이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정죄하는 근거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아주 먼 옛날에 있었던 다윗의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로 드신 본문25-26절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의 일입니다. 다윗은 자신과 함께 한 무리들의 주림을 면하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성소의 떡 상에 진설했던 떡을 먹었습니다(삼상21:1-6).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행위였으며, 당연히 죽어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때에 따라서는 율법을 어겨도 좋다는 말입니까?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했듯이,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무시하시면서 까지 제자들의 편을 들어 준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율법을 어겨도 좋다는 말도 아니며 제자들의 편을 들어준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율법의 본질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위하여 제정하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아담 이후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본질이자 목적은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나 많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주신 목적은 생각지도 않고 다만 지키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번뜩이면서 율법을 범하는 사람들을 찾아내고는 정죄하고 처벌했습니다. 정죄되어 출교당하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으로서는 ‘죽어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많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다 보니 눈치를 살피면서 지키는 척이라도 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23:27-28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경건파’들이 있어서 그들은 스스로의 생활을 세상과 격리시켰습니다. 그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했는데, 결혼을 금하고 쾌락을 멀리했습니다. 심지어는 안식일이면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금지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용변을 볼 수가 없으니 자연히 먹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살맛이 나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이러한 고통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살려주시려고 제정하신 율법이 오히려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후로 하나님의 희생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런 괴로움에 빠진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함입니다. 메시아의 사역을 예언한 이사야61:1-2절의 말씀을 인용한 누가복음4:18-19절에서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8:32절에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하여 죽음이 확정된 사람에게 주어진 사면장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다리가 되셨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너무나 고마워서 주님을 따르며 섬기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새 포도주’입니다. 그리고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가는 것이 ‘새롭게 짜여진 천이며 새 부대’입니다.
마음에 부담감을 안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억지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율법이 주도하던 세상에서 행하던 옛 행실들이며 ‘낡은 부대이며 낡은 천’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움으로 구원을 받아야만 했던 행실의 법이 율법입니다.
오늘에 있어서는 자신의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곧 낡은 천이며 낡은 부대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2:8-9절을 기억합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것, 기도하고, 말씀 읽고, 헌금하고, 섬김과 봉사 하는 모든 신앙의 행위는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생각하시는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따름으로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인 복음을 담기에 합당한 새 부대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나를 위하여 희생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 따릅시다. 그리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