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5,857회
작성일
2003-04-12 21:19
♡♥♡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 / 눅19:1-10
*** 들어가는 말
여러분, 옆의 네모 칸에 무엇이 보입니까? (사절지의 백지 가운데 콩알만한 점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검은 점이 보입니까?
또 다른 것은 없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흰 종이 가운데 있는 검은 점을 봅니다. 사실 검은 점은 흰 바탕에 비하면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넓은 흰 면보다는 작더라도 눈에 띄는 부분에 더 많은 관심을 나타냅니다. 이는 사람들의 좁은 시야와 부정적인 관점이 많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런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행하신 일과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삭개오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뒤따라 나오는 ‘므나의 비유’와 한 세트를 이루고 있습니다. 12-27절에 걸쳐 기록된 ‘므나의 비유’는 ‘주인의 명령에 대하여 긍정적이며 적극적이고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일군’과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염려 속에 사는 일군’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배경을 그려봅시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는 마지막 여행 중이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불과 25Km 정도 떨어진 ‘여리고’를 지나고 계셨습니다. 몇 시간 후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고에서 작은 사건이 생겼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를 만난 것입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집으로 가셨고 삭개오는 이 일을 계기로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명절을 지키려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모인 무리들에게 삭개오의 구원 과정을 보이시고, 특별한 의미를 담은 므나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 3년의 공생애를 마감하시는 자리에서 삭개오를 받아들이시고 므나 비유를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생애를 마감하는 마지막 한 주간의 시점에서 중요한 것을 가르치십니다. 9-11절에 그 열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예수님은 이제 며칠 후면 십자가에 달려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적어도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비참하고 처절하고 부끄러운 사형의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왕권을 차지하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부푼 가슴을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일 십자가는 실망과 좌절 그 자체일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하셨습니다. 그 방법으로 이론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죄인 중의 죄인이라고 하는 세리장 삭개오가 구원 받는 장면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장에 왕의 권세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함을 가르치시려고 므나 비유를 하셨습니다. 즉 주님이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 동안 그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비유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면서 좀 더 넓은 것을 생각할 줄 아는 신앙을 가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여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의미를 찾아봅시다.
1. 그리스도인의 삶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본문2-4절을 봅시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이 말씀에서 삭개오가 어떤 인물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직업이 ‘세무원’이며, 직위는 ‘세리장’이었고, 생활정도는 상류층으로 ‘부자’였습니다. 성격적으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성품’인 것으로 보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그토록 애를 쓴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 기록한 대로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 삭개오도 예수님의 활동에 대하여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제자 중에는 전직 ‘세무원’이나 ‘어부’도 있고, 신분과 형편을 따지지 않으시는 것과 소외된 자를 특별히 대하신다는 사실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나 보아야 되겠다.’는 호기심이 발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호기심 충족을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그의 행동이 너무나 적극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의 행동을 주시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자 수많은 유월절 순례 객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신체적으로 키가 작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고 저만큼 앞을 내다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겠다고 생각되는 지점을 계산하고는 저만큼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함께 몰려오니까 길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가로수로 서 있는 큰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생각이 치밀하고 열정적이지요? 이정도가 되면 호기심 충족이 아니라 어떤 기대감이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만일 단순한 호기심이었다면 상황이 그 정도가 되면 포기하거나, 자신의 신분이나 체면을 생각해서 길옆의 다른 높은 곳이나 집의 옥상을 택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행동은 자신의 신분과 체면을 무시한 대단히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것입니다. 자신의 신체적인 조건이나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환경에 대하여 어떤 불평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위치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의 생각이 긍정적임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있는 나무 아래를 지나시다가 삭개오를 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아마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법도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알아주고 위해주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세리를 큰 죄인으로 여겼기 때문에 아예 상종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선생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하루를 묵어야 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 삭개오는 땡 잡았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선택되었으니 어찌 황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피그말리온 효과’란 심리학 용어입니다. 이는 ‘지성이면 돌을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교육학에서도 피그말리온 효과는 아주 크다는 것이 실험으로 입증 되었습니다. ‘로젠탈’과 ‘제이콥스' 라는 사람이 선생님과 학생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이들은 실험에 앞서 대상 선생님들에게 “여러분들은 뛰어난 교수 능력 때문에 선발되었고, 또한 재능 있는 학생들이 여러분의 반에 배치될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일정 기간을 관찰했습니다. 실험 결과 학생들의 성적은 향상되었습니다. 실험이 끝난 후 선생님들은 “이런 학생들과 함께 수업하는 것은 기쁨 그 자체이고 , 항상 그처럼 재능 있는 학생들과 수업하면 바랄 것이 없겠다.”고 자신들의 느낌을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사자들은 “선생님들이 가르친 학생들은 여러 학교에서 무작위로 뽑았고, 선생님들 역시 무작위로 뽑았기 때문에 모두 유능한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실상을 털어놓았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괄목할 만한 실험 결과를 ‘교실에서의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불렀습니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하나님의 선언에서도 나타납니다. 여러 번 인용했던 민수기14:28절에서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고, 빌립보서4:13절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잘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긍정적인 생각과 적극적인 행동을 한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렇게 됩니다. 본문 다음에 나오는 므나 비유에서, 한 므나를 숨겨두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종은 있는 것마저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활동으로 열 므나를 남겼거나 다섯 므나를 남긴 종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1:12절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적극적으로 쟁취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모든 회개의 마지막은 돈 지갑에서 나온다.”라고 했습니다. 삭개오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삭개오는 대뜸 돈지갑을 열었습니다. 본문8절을 봅시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모든 굴욕을 돈을 위해 참고 살았을 삭개오가 애지중지하던 재물을 쏟아냈습니다. 이는 삭개오 식의 회개이며 헌신의 표시였습니다.
생활이 넉넉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농부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이 가정에서는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몹시 추운 겨울, 그 날도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대표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 중에 아버지는 특별히 ‘추운 겨울에 땔감이 없어 추위에 떠는 이웃들과 양식이 없어 굶주린 이웃들을 보호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예배가 끝났을 때,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달라고 기도한 일은 우리가 하나님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왜 그렇지?”라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그 이유는 그 사람들이 춥거나 굶주리지 않도록 아버지께서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에요.”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보다 아들의 신앙이 더 실질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는 신앙이 결코 생각이나 이론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바로 삭개오의 신앙이 행동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을 지금까지 쌓아왔던 부귀영화와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9절의 예수님의 선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 선언은 삭개오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의 선언입니다. 삭개오는 진정한 회개와 감격적인 영접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기쁨과 감격을 자기의 지갑을 터는 것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던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값진 진주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내용 그대로입니다.
소작농을 하던 농부가 밭을 갈다가 땅 속에 묻혀 있는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농부는 다시 숨겨두고는 즉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합법적을 자신의 보물로 만든 것입니다. 한편 진주 장사는 진주를 구하러 다니다가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그도 역시 자기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샀습니다. 이 비유들은 천국에 대한 비유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투자해서라도 가져야 하는 극히 값진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 기회가 자신에게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삭개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십자가 한 편의 강도도 자신에게 주어진 지극히 짧은 기회였지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아직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결단하기를 늦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대속의 죽음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영적으로 무장시키십니다. 지금 나의 삶은 주님을 의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열정적인지, 그리고 주어진 기회를 잡는 결단력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 들어가는 말
여러분, 옆의 네모 칸에 무엇이 보입니까? (사절지의 백지 가운데 콩알만한 점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검은 점이 보입니까?
또 다른 것은 없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흰 종이 가운데 있는 검은 점을 봅니다. 사실 검은 점은 흰 바탕에 비하면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넓은 흰 면보다는 작더라도 눈에 띄는 부분에 더 많은 관심을 나타냅니다. 이는 사람들의 좁은 시야와 부정적인 관점이 많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런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행하신 일과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삭개오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뒤따라 나오는 ‘므나의 비유’와 한 세트를 이루고 있습니다. 12-27절에 걸쳐 기록된 ‘므나의 비유’는 ‘주인의 명령에 대하여 긍정적이며 적극적이고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일군’과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염려 속에 사는 일군’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배경을 그려봅시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는 마지막 여행 중이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불과 25Km 정도 떨어진 ‘여리고’를 지나고 계셨습니다. 몇 시간 후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고에서 작은 사건이 생겼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를 만난 것입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집으로 가셨고 삭개오는 이 일을 계기로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명절을 지키려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모인 무리들에게 삭개오의 구원 과정을 보이시고, 특별한 의미를 담은 므나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 3년의 공생애를 마감하시는 자리에서 삭개오를 받아들이시고 므나 비유를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생애를 마감하는 마지막 한 주간의 시점에서 중요한 것을 가르치십니다. 9-11절에 그 열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예수님은 이제 며칠 후면 십자가에 달려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적어도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비참하고 처절하고 부끄러운 사형의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왕권을 차지하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부푼 가슴을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일 십자가는 실망과 좌절 그 자체일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하셨습니다. 그 방법으로 이론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죄인 중의 죄인이라고 하는 세리장 삭개오가 구원 받는 장면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장에 왕의 권세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함을 가르치시려고 므나 비유를 하셨습니다. 즉 주님이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 동안 그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비유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면서 좀 더 넓은 것을 생각할 줄 아는 신앙을 가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여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의미를 찾아봅시다.
1. 그리스도인의 삶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본문2-4절을 봅시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이 말씀에서 삭개오가 어떤 인물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직업이 ‘세무원’이며, 직위는 ‘세리장’이었고, 생활정도는 상류층으로 ‘부자’였습니다. 성격적으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성품’인 것으로 보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그토록 애를 쓴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 기록한 대로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 삭개오도 예수님의 활동에 대하여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제자 중에는 전직 ‘세무원’이나 ‘어부’도 있고, 신분과 형편을 따지지 않으시는 것과 소외된 자를 특별히 대하신다는 사실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나 보아야 되겠다.’는 호기심이 발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호기심 충족을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그의 행동이 너무나 적극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의 행동을 주시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자 수많은 유월절 순례 객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신체적으로 키가 작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고 저만큼 앞을 내다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겠다고 생각되는 지점을 계산하고는 저만큼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함께 몰려오니까 길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가로수로 서 있는 큰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생각이 치밀하고 열정적이지요? 이정도가 되면 호기심 충족이 아니라 어떤 기대감이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만일 단순한 호기심이었다면 상황이 그 정도가 되면 포기하거나, 자신의 신분이나 체면을 생각해서 길옆의 다른 높은 곳이나 집의 옥상을 택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행동은 자신의 신분과 체면을 무시한 대단히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것입니다. 자신의 신체적인 조건이나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환경에 대하여 어떤 불평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위치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의 생각이 긍정적임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있는 나무 아래를 지나시다가 삭개오를 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아마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법도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알아주고 위해주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세리를 큰 죄인으로 여겼기 때문에 아예 상종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선생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하루를 묵어야 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 삭개오는 땡 잡았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선택되었으니 어찌 황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피그말리온 효과’란 심리학 용어입니다. 이는 ‘지성이면 돌을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교육학에서도 피그말리온 효과는 아주 크다는 것이 실험으로 입증 되었습니다. ‘로젠탈’과 ‘제이콥스' 라는 사람이 선생님과 학생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이들은 실험에 앞서 대상 선생님들에게 “여러분들은 뛰어난 교수 능력 때문에 선발되었고, 또한 재능 있는 학생들이 여러분의 반에 배치될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일정 기간을 관찰했습니다. 실험 결과 학생들의 성적은 향상되었습니다. 실험이 끝난 후 선생님들은 “이런 학생들과 함께 수업하는 것은 기쁨 그 자체이고 , 항상 그처럼 재능 있는 학생들과 수업하면 바랄 것이 없겠다.”고 자신들의 느낌을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사자들은 “선생님들이 가르친 학생들은 여러 학교에서 무작위로 뽑았고, 선생님들 역시 무작위로 뽑았기 때문에 모두 유능한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실상을 털어놓았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괄목할 만한 실험 결과를 ‘교실에서의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불렀습니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하나님의 선언에서도 나타납니다. 여러 번 인용했던 민수기14:28절에서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고, 빌립보서4:13절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잘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긍정적인 생각과 적극적인 행동을 한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렇게 됩니다. 본문 다음에 나오는 므나 비유에서, 한 므나를 숨겨두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종은 있는 것마저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활동으로 열 므나를 남겼거나 다섯 므나를 남긴 종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1:12절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적극적으로 쟁취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모든 회개의 마지막은 돈 지갑에서 나온다.”라고 했습니다. 삭개오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삭개오는 대뜸 돈지갑을 열었습니다. 본문8절을 봅시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모든 굴욕을 돈을 위해 참고 살았을 삭개오가 애지중지하던 재물을 쏟아냈습니다. 이는 삭개오 식의 회개이며 헌신의 표시였습니다.
생활이 넉넉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농부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이 가정에서는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몹시 추운 겨울, 그 날도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대표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 중에 아버지는 특별히 ‘추운 겨울에 땔감이 없어 추위에 떠는 이웃들과 양식이 없어 굶주린 이웃들을 보호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예배가 끝났을 때,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달라고 기도한 일은 우리가 하나님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왜 그렇지?”라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그 이유는 그 사람들이 춥거나 굶주리지 않도록 아버지께서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에요.”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보다 아들의 신앙이 더 실질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는 신앙이 결코 생각이나 이론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바로 삭개오의 신앙이 행동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을 지금까지 쌓아왔던 부귀영화와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9절의 예수님의 선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 선언은 삭개오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의 선언입니다. 삭개오는 진정한 회개와 감격적인 영접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기쁨과 감격을 자기의 지갑을 터는 것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던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값진 진주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내용 그대로입니다.
소작농을 하던 농부가 밭을 갈다가 땅 속에 묻혀 있는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농부는 다시 숨겨두고는 즉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합법적을 자신의 보물로 만든 것입니다. 한편 진주 장사는 진주를 구하러 다니다가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그도 역시 자기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샀습니다. 이 비유들은 천국에 대한 비유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투자해서라도 가져야 하는 극히 값진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 기회가 자신에게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삭개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십자가 한 편의 강도도 자신에게 주어진 지극히 짧은 기회였지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아직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결단하기를 늦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대속의 죽음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영적으로 무장시키십니다. 지금 나의 삶은 주님을 의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열정적인지, 그리고 주어진 기회를 잡는 결단력이 있는지 돌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