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의 나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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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04-05 20:21
♡♥♡ 세상에서의 나 / 막6:45-52
*** 들어가는 말
본문의 이야기는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이적입니다. 이 이적은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각 복음서마다 강조점이 조금씩 다릅니다. 마태복음14:22-33절에는 물위로 뛰어내린 베드로를 등장시켜서 베드로의 의심을 통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제자들의 깨닫지 못하는 마음으로 인한 불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6:16-20절에는 간략하게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으신 사건 자체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복음서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입니다.
이 이적의 사건을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사건의 성격이 자연을 복종케 하는 특별한 능력과 연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예수님과 제자들과 세상과의 관점적인 차원에서 이 사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벳세다 들녘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장정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긴 이적사건 이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였던 무리를 보내는 동안 제자들에게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가도록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호수에 바람까지 거칠어지면서 호수 한 가운데서 제자들은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그 모습을 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보셨으며,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제자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관심이 돋보이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신 것은 ‘고난 받는 제자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모든 일에서 예수님의 눈과 관심은 제자들을 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칠십 명의 제자를 파송했을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돌아와서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신나게 보고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는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제자들이 활동하는 모든 상황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파는 상황도, 베드로가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상황도 낱낱이 보고 계셨습니다.
1. 주님은 세상에서 활동하는 제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당신께서 사람들을 보내는 동안 제자들을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가도록 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보낸 후에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제자들을 위한 내용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 중에도 제자들의 상황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육신적인 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인 능력으로서의 감찰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감찰은 제자들의 육신적인 현실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영의 상황까지도 보고 계셨습니다. 본문 앞 쪽의 31절에서,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고 당시의 분주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4절에서는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고 했습니다.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의 속사정까지 보시며 안쓰러워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성도를 향하시는 주님의 관심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모르시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생활이 힘들고 환경이나 여건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괴롭게 노를 젓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라 할지라도 주님의 관심은 여전히 성도를 향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11:12절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고 하셨으며, 마태복음28:22절에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잊혀지지도, 취소되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마치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사야59:1-2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팔이 짧아서 너희를 구원하지 못하시며 귀가 어두워서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너희의 호소를 듣지 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너희의 죄악이 너희를 하나님과 갈라놓았다. 너희의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에 장벽처럼 쌓여 있기 때문에 너희가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들으실 수가 없다. 너희의 온갖 악행이 쌓여서 하나님의 얼굴을 가려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희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실 수가 없다.”
2.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알고자 하십니다.
주님은 물위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에게 곧장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48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괴롭게 노 젓는 현장을 그냥 지나치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주님은 분명히 제자들의 사정을 보시고 제자들에게로 향하셨는데 말입니다.
이는 제자들의 믿음을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52절에서 그 상황을 “이는 저희가 그 떡을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고 표현합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작은 도시락 하나로 장정만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던 이적을 직접 겪었던 그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몇 시간 사이에 그 사실을 잊어버렸겠습니까? 잊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둔하여져서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다. 왜 마음이 둔하여졌습니까?
누가복음21:34절을 봅시다. 주님은 말세를 사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경고하십니다. 또한 이처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을 마태복음13:22절에서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표현합니다.
즉 마음이 둔하여지는 것은 세상적인 염려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눈앞에 벌어진 위기의 상황에 온 마음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표현한 대로 베드로가 물 속으로 빠져 들게 된 이유도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인 위기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염려와 두려움으로 가득한 제자들에게 물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은 ‘유령’일 뿐이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제자들을 도우려 급하게 물위로 오신 능력의 주님을 제자들은 유령 취급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믿음의 현주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직은 어린아이와 같은 제자들의 믿음을 보시면서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들을 안심하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주님은 주장하는 자세로 제자들 위에 군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언제나 제자들보다 앞서 가시면서 기도와 생활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책망보다는 위하여 기도해주셨습니다. 베드로의 배반을 미리 아셨지만, 주님은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로 인하여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어두운 갈릴리 호수를 노 저어 항해하던 제자들처럼,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들이 밀려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이러한 세상의 풍파 속에 나 홀로 버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능력의 주님께서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감찰하십니다. 다만 눈앞의 환경과 상황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두려움과 염려는 불신이기 때문입니다. 곧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신뢰합시다. 주님은 신뢰하고 다가오는 성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으로 더욱 풍성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본문의 이야기는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이적입니다. 이 이적은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각 복음서마다 강조점이 조금씩 다릅니다. 마태복음14:22-33절에는 물위로 뛰어내린 베드로를 등장시켜서 베드로의 의심을 통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제자들의 깨닫지 못하는 마음으로 인한 불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6:16-20절에는 간략하게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으신 사건 자체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복음서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입니다.
이 이적의 사건을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사건의 성격이 자연을 복종케 하는 특별한 능력과 연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예수님과 제자들과 세상과의 관점적인 차원에서 이 사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벳세다 들녘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장정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긴 이적사건 이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였던 무리를 보내는 동안 제자들에게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가도록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호수에 바람까지 거칠어지면서 호수 한 가운데서 제자들은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그 모습을 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보셨으며,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제자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관심이 돋보이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신 것은 ‘고난 받는 제자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모든 일에서 예수님의 눈과 관심은 제자들을 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칠십 명의 제자를 파송했을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돌아와서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신나게 보고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는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제자들이 활동하는 모든 상황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파는 상황도, 베드로가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상황도 낱낱이 보고 계셨습니다.
1. 주님은 세상에서 활동하는 제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당신께서 사람들을 보내는 동안 제자들을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가도록 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보낸 후에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제자들을 위한 내용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 중에도 제자들의 상황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육신적인 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인 능력으로서의 감찰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감찰은 제자들의 육신적인 현실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영의 상황까지도 보고 계셨습니다. 본문 앞 쪽의 31절에서,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고 당시의 분주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4절에서는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고 했습니다.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의 속사정까지 보시며 안쓰러워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성도를 향하시는 주님의 관심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모르시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생활이 힘들고 환경이나 여건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괴롭게 노를 젓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라 할지라도 주님의 관심은 여전히 성도를 향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11:12절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고 하셨으며, 마태복음28:22절에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잊혀지지도, 취소되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마치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사야59:1-2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팔이 짧아서 너희를 구원하지 못하시며 귀가 어두워서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너희의 호소를 듣지 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너희의 죄악이 너희를 하나님과 갈라놓았다. 너희의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에 장벽처럼 쌓여 있기 때문에 너희가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들으실 수가 없다. 너희의 온갖 악행이 쌓여서 하나님의 얼굴을 가려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희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실 수가 없다.”
2.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알고자 하십니다.
주님은 물위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에게 곧장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48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괴롭게 노 젓는 현장을 그냥 지나치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주님은 분명히 제자들의 사정을 보시고 제자들에게로 향하셨는데 말입니다.
이는 제자들의 믿음을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52절에서 그 상황을 “이는 저희가 그 떡을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고 표현합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작은 도시락 하나로 장정만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던 이적을 직접 겪었던 그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몇 시간 사이에 그 사실을 잊어버렸겠습니까? 잊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둔하여져서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다. 왜 마음이 둔하여졌습니까?
누가복음21:34절을 봅시다. 주님은 말세를 사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경고하십니다. 또한 이처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을 마태복음13:22절에서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표현합니다.
즉 마음이 둔하여지는 것은 세상적인 염려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눈앞에 벌어진 위기의 상황에 온 마음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표현한 대로 베드로가 물 속으로 빠져 들게 된 이유도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인 위기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염려와 두려움으로 가득한 제자들에게 물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은 ‘유령’일 뿐이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제자들을 도우려 급하게 물위로 오신 능력의 주님을 제자들은 유령 취급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믿음의 현주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직은 어린아이와 같은 제자들의 믿음을 보시면서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들을 안심하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주님은 주장하는 자세로 제자들 위에 군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언제나 제자들보다 앞서 가시면서 기도와 생활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책망보다는 위하여 기도해주셨습니다. 베드로의 배반을 미리 아셨지만, 주님은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로 인하여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어두운 갈릴리 호수를 노 저어 항해하던 제자들처럼,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들이 밀려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이러한 세상의 풍파 속에 나 홀로 버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능력의 주님께서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감찰하십니다. 다만 눈앞의 환경과 상황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두려움과 염려는 불신이기 때문입니다. 곧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신뢰합시다. 주님은 신뢰하고 다가오는 성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으로 더욱 풍성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