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적인 부끄러움을 벗기셨습니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580회
작성일
2003-03-29 21:52
♡♥♡ 세상적인 부끄러움을 벗기셨습니다. / 여호수아5:2-9
*** 들어가는 말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버릇들이 있습니다. 습관화 된 버릇 중에는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쁜 것도 있습니다. 그 나쁜 버릇 중에는 사람의 생각이나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좋지 않은 한 가지가 “옛날에는…”이라는 ‘과거집착증’이 강한 버릇입니다. 이 버릇은 지나온 과거에 대한 향수로 인하여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게 합니다. 출애굽 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렸던 영적인 병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의 일입니다.
마틴 루터는 수도원에서 철야기도와 성경읽기 그리고 노동, 수도원 규칙의 준수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구원”에 대한 의문은 깊어만 갔습니다. 고뇌의 나날은 깊어갔지만 아무런 만족스런 깨달음도 얻지 못한 채 ‘죄의 문제’는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는 에르푸르트 수도원의 탑에 있는 작은 방에서 성경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1: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읽는 순간 그의 캄캄했던 영에 빛이 비쳤습니다.
루터는 말씀을 깨달은 후, 가톨릭교회의 중대한 오류 95개 조항을 기록하여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의 게시판에 붙이고, 길고 긴 종교개혁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원인도 결국은 죽어 있는 영의 옛 습관에 매어있던 사슬을 끊고자 했던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죄의 문제’는 등한시 하고, 세상의 권력과 결탁하여 세상적인 것만 탐닉하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의 문제를 해결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의 문제”와 “영원한 생명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적인 육신의 습관에 매여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을 구원하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중요한 문제는 버려두고, 세상적인 부요와 안일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6:33절에서 말씀하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과 요한삼서1:2절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문제가 무엇임을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에도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다 중요한 문제를 먼저 해결하도록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지경의 첫 성인 여리고의 함락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행하라고 하신 ‘언약의 백성 된 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지금 가나안을 점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터전인 가나안에서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정체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란 자신의 현재 신분과 가치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거지라고 아는 사람은 그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까지도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며, 저속한 품행을 나타냅니다. 세일즈맨은 세일즈맨으로서의 행동이 나타나고, 교수는 매사에 가르치려들고, 과학자는 관찰하고 분석하는 일에 능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사람들은 ‘근성’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지 못한다면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만나는 환경을 따라서 금방 세속화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생활을 통하여 수없이 훈련되고 교육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겨우 한 세대를 넘겼을 뿐이었습니다. 죄의 근성은 이처럼 끈질기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앞에 두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 된 표를 상기시켜야 했습니다.
이들이 다시 할례를 행하여야 하는 이유는 할례를 행하였던 출애굽 때의 사람들은 광야 40년 동안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된 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그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는 ‘언약의 백성’임을 깨닫는 것이 먼저였던 것입니다.
본문9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할례를 행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애굽의 수치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아픈 기억이며, 하나님 없이 살았던 세상적인 삶의 부끄러움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모든 죄악 된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는 표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살 때에 자손대대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단을 건너면서 각 지파대로 요단 강 바닥에서 돌을 하나씩 취하도록 하셨고, 건넌 다음에 그 돌을 쌓아서 기념물을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여호수아4:20-24절의 내용에서 돌단의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24절입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하심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성도들이 비록 혼탁한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구나.’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과 가치를 깨닫고 그렇게 생활할 때에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를 행한 후에 가나안을 차지했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순서가 있습니다.
엉뚱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불교 사찰에는 반드시 대웅전, 명부전, 삼성각 이 세 건물이 있습니다. 대웅전은 소위 ‘붓다’를 예배하는 곳이고, 명부전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제사하는 곳이며, 삼성각은 삼신 즉 칠성신, 산신, 독성신을 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불교인들에게 제일 인기가 있는 곳이 바로 삼성각입니다. 그들은 그 삼신들에게 ‘장사 잘되게 해주십시오, 자식 잘되게 해주십시오, 오래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불교에는 삼성각이란 것이 없습니다. 삼성각은 무당종교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은 완전히 불교 고유의 것인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휴암 스님이 이런 사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불교개혁을 부르짖는 내용을 담은 ‘한국불교의 새 얼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내용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복에 환장한 한국 불교인들아! 너희 스승은 너희들이 구하는 왕궁을 버렸는데, 너희는 그 스승에게서 무엇을 구하느냐? 나는 오늘의 불교인들의 생리에 저항하고 싶다. 설령 불교가 오늘의 병든 복 사상에 저항하다가 설사 신자가 천삼백 만 명에서 백삼십 명으로 줄어들지라도, 여지없이 타락된 물질주의 복 사상을 철폐하는 데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된다. 복에 환장한 불교 신자들아.”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복에 환장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실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고, 또한 사람들이 복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복을 받고 싶다면 당연히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문제는 복은 받고 싶어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하는 것, 즉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 된 표를 가질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에 있어서 할례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 된 표는 ‘세례’입니다. 세례는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다시 태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즉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의 부끄러움을 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분에 걸맞은 생활로 하나님께는 영광이며, 우리 자신은 은혜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버릇들이 있습니다. 습관화 된 버릇 중에는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쁜 것도 있습니다. 그 나쁜 버릇 중에는 사람의 생각이나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좋지 않은 한 가지가 “옛날에는…”이라는 ‘과거집착증’이 강한 버릇입니다. 이 버릇은 지나온 과거에 대한 향수로 인하여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게 합니다. 출애굽 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렸던 영적인 병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의 일입니다.
마틴 루터는 수도원에서 철야기도와 성경읽기 그리고 노동, 수도원 규칙의 준수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구원”에 대한 의문은 깊어만 갔습니다. 고뇌의 나날은 깊어갔지만 아무런 만족스런 깨달음도 얻지 못한 채 ‘죄의 문제’는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는 에르푸르트 수도원의 탑에 있는 작은 방에서 성경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1: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읽는 순간 그의 캄캄했던 영에 빛이 비쳤습니다.
루터는 말씀을 깨달은 후, 가톨릭교회의 중대한 오류 95개 조항을 기록하여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의 게시판에 붙이고, 길고 긴 종교개혁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원인도 결국은 죽어 있는 영의 옛 습관에 매어있던 사슬을 끊고자 했던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죄의 문제’는 등한시 하고, 세상의 권력과 결탁하여 세상적인 것만 탐닉하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의 문제를 해결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의 문제”와 “영원한 생명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적인 육신의 습관에 매여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을 구원하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중요한 문제는 버려두고, 세상적인 부요와 안일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6:33절에서 말씀하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과 요한삼서1:2절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문제가 무엇임을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에도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다 중요한 문제를 먼저 해결하도록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지경의 첫 성인 여리고의 함락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행하라고 하신 ‘언약의 백성 된 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지금 가나안을 점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터전인 가나안에서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정체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란 자신의 현재 신분과 가치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거지라고 아는 사람은 그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까지도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며, 저속한 품행을 나타냅니다. 세일즈맨은 세일즈맨으로서의 행동이 나타나고, 교수는 매사에 가르치려들고, 과학자는 관찰하고 분석하는 일에 능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사람들은 ‘근성’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지 못한다면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만나는 환경을 따라서 금방 세속화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생활을 통하여 수없이 훈련되고 교육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겨우 한 세대를 넘겼을 뿐이었습니다. 죄의 근성은 이처럼 끈질기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앞에 두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 된 표를 상기시켜야 했습니다.
이들이 다시 할례를 행하여야 하는 이유는 할례를 행하였던 출애굽 때의 사람들은 광야 40년 동안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된 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그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는 ‘언약의 백성’임을 깨닫는 것이 먼저였던 것입니다.
본문9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할례를 행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애굽의 수치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아픈 기억이며, 하나님 없이 살았던 세상적인 삶의 부끄러움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모든 죄악 된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는 표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살 때에 자손대대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단을 건너면서 각 지파대로 요단 강 바닥에서 돌을 하나씩 취하도록 하셨고, 건넌 다음에 그 돌을 쌓아서 기념물을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여호수아4:20-24절의 내용에서 돌단의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24절입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하심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성도들이 비록 혼탁한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구나.’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과 가치를 깨닫고 그렇게 생활할 때에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를 행한 후에 가나안을 차지했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순서가 있습니다.
엉뚱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불교 사찰에는 반드시 대웅전, 명부전, 삼성각 이 세 건물이 있습니다. 대웅전은 소위 ‘붓다’를 예배하는 곳이고, 명부전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제사하는 곳이며, 삼성각은 삼신 즉 칠성신, 산신, 독성신을 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불교인들에게 제일 인기가 있는 곳이 바로 삼성각입니다. 그들은 그 삼신들에게 ‘장사 잘되게 해주십시오, 자식 잘되게 해주십시오, 오래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불교에는 삼성각이란 것이 없습니다. 삼성각은 무당종교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은 완전히 불교 고유의 것인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휴암 스님이 이런 사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불교개혁을 부르짖는 내용을 담은 ‘한국불교의 새 얼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내용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복에 환장한 한국 불교인들아! 너희 스승은 너희들이 구하는 왕궁을 버렸는데, 너희는 그 스승에게서 무엇을 구하느냐? 나는 오늘의 불교인들의 생리에 저항하고 싶다. 설령 불교가 오늘의 병든 복 사상에 저항하다가 설사 신자가 천삼백 만 명에서 백삼십 명으로 줄어들지라도, 여지없이 타락된 물질주의 복 사상을 철폐하는 데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된다. 복에 환장한 불교 신자들아.”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복에 환장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실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고, 또한 사람들이 복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복을 받고 싶다면 당연히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문제는 복은 받고 싶어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하는 것, 즉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 된 표를 가질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에 있어서 할례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 된 표는 ‘세례’입니다. 세례는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다시 태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즉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의 부끄러움을 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분에 걸맞은 생활로 하나님께는 영광이며, 우리 자신은 은혜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