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초장, 쉴만한 물 가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216회
작성일
2003-06-28 20:57
♡♥♡ 푸른 초장, 쉴만한 물 가 / 시편 23:1-6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누구나가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원합니다. 물론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도 일반적인 생활은 안전하고 평안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평안이나 안전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많이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이 아마도 염려일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인 ‘카알라일’의 일화입니다. 그는 항상 생각하고 글을 쓰며, 조용한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옆집에서 닭을 몇 마리 기르는데 새벽마다 ‘꼬끼오’ 하며 우는 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결심을 하고 옆집의 주인을 만나서 사정을 말했습니다. 카알라일의 사정을 들은 그 주인은 “하룻밤에 기껏 서너 번 밖에 울지 않은 것을 뭐 그러시오.”라며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습니다. 카알라일은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닭 울음소리를 기다리느라고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소.”라고 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하룻밤에 서너 번 우는 소리이지만 카알라일은 ‘닭이 곧 울 텐데.’라는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강박증’이라고 합니다. 즉 염려하지 않아도 될 일을 쓸데없이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걱정을 사서하고 있는 형상입니다.
염려와 걱정은 사람의 마음을 태우고 뼈를 마르게 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걱정’이라는 말은 ‘마음이 둘로 갈라져 있음’을 의미하며, ‘염려’라는 말은 ‘물어뜯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맹수들이 짐승을 사냥하면서 사냥감의 목을 물어 질식시킬 때 사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염려는 사람의 목을 물어 숨을 틀어막는 것과도 같은 위험한 병입니다. 이처럼 염려 병에 걸리면 육신적으로는 힘과 기능을 잃게 되며, 영적으로도 무력증에 빠지게 됩니다. 현대인의 수많은 질병 중에서 60-70%가 염려와 근심과 같은 심리적인 원인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염려와 걱정이 ‘불신’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가복음21:34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고 하셨으며, 요한복음14:1절에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경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염려가 안 됩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도 무엇인가를 염려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생활의 염려와 근심을 떨어버릴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이 본문 말씀에서 다윗의 삶의 고백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에 함께 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며, 내게는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깊이 상고해 봅시다.
1. 하나님은 자녀를 돌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자신을 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양에게 있어서의 목자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목자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양은 자신을 위하여 염려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목자가 양의 필요를 알고 때를 따라서 공급하고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는 것은 양들이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좋은 꼴을 먹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양들을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은 양들이 물을 마시도록 함도 있지만 안전하고 평안한 쉼을 위함입니다. 양은 흐르는 냇물에서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양의 습성을 아는 목자는 양들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물을 마시게 하며, 쉬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목자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아버지이십니다. 갈라디아4:6절에서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들의 모든 부분을 낱낱이 알고 계시며,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누가복음12:7절에서는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마태복음6:32절에서는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우리의 삶을 완전하게 돌보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의심하는 무리들을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7:9-11절(현대어성경)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고 하는데 그 아버지가 떡 대신에 돌을 주겠느냐? 또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그 아버지가 뱀을 주겠느냐? 악한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애쓰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더욱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처럼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이라 할지라도 이 아버지의 돌보심을 막는 것은 바로 의심의 또 다른 표현인 염려와 근심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양이 목자를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합니다. 목자가 양들을 위험한 곳, 고통스러운 곳으로 인도하겠습니까? 목자는 양의 습성과 양의 체질적인 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양이 좋아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곳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입니다. 이 곳은 양에게 있어서 가장 편안하고 안전하며 풍성한 생활의 터전입니다. 때때로 거칠고 황량하고 햇볕이 뜨거운 광야를 지나야 합니다. 때로는 목마르고 배고픈 과정을 겪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들이 먹어야 할 때와 쉬어야 할 때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쉼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즉 때때로 겪게 되는 고통스러운 과정조차 더 안전하고 더욱 풍성한 삶의 자리에 이르는 과정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29: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그런데 사람들이 꾀를 냅니다. 오늘만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내년에도 십년 후에도 이렇게 평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려고 꾀를 내었습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미리 저축해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들이 내일 먹을 것과 쉴 자리를 미리 데려가지는 않습니다.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준비하고 계획하지만 그 곳을 미리 보여주거나 미리 데려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양들도 그곳을 미리 보여 달라거나 미리 그 곳에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를 믿고 따릅니다. 오늘을 인도하시듯이 내일도 그렇게 인도하실 것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중에 오직 사람만 염려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오히려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함을 뜻합니다. 단지 지금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세계적인 부흥사인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동행하며 함께 사역하는 분 가운데 재미 교포인 한국인 아가씨가 한 사람 있습니다. ‘킴 윅스’라는 맹인 아가씨입니다. 한국전쟁 때 실명을 했고,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당시 참전 했던 어느 미군 중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인디애나 주립대학을 나와서 오스트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하여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이 아가씨가 예수님을 영접하고는 자신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신앙을 간증했습니다. 이 간증으로 인하여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집회를 다니면서 간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의 간증 중에 이런 고백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장님인 나를 인도할 때, 저 100미터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뛰라.’고 말하고,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말합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분을 내가 믿고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성실 할 때, 나는 내가 가고자하는 목적지에 꼭 도착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1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20년 후도 알지 못합니다. 또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보이시는 그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오늘을 살면, 하나님은 내일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내 생애를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그곳에 도달케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하루하루 한걸음씩 인도하십니다. 내일의 것을 미리 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6:34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때로는 자기 마음대로 가다가 가시덤불에 걸린 양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게 행하여 낙심할 때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 때문에 우리를 다시 소생하게 하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믿고 의지합니까?
3.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목자이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양을 인도하며 보호하는 도구입니다. 양들은 시력도 약하고 방향감각도 약해서 곁길로 가기가 쉽습니다. 목자는 곁길로 가는 양에게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합니다. 끝이 둥글게 구부러져 있는 지팡이는 무리에서 이탈해 딴 길로 가려는 양의 목을 잡아끌어 당기거나, 양이 웅덩이에 빠졌을 때 양의 목을 걸어 끌어올립니다. 막대기는 짧고 단단하게 생겼는데, 길에서 벗어나는 양을 툭툭 쳐서 제 길로 가게하고, 사나운 짐승이 양을 공격할 때면 양을 지키는 무기가 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주신 주님이 목자이십니다. 생명까지 주신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앞서 보았던 대로 주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에서는 ‘세상의 어떤 세력도 우리를 주님의 손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로마서8:38-39절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위하여 생명까지 주시며 사랑하시지만, 목자의 말을 끝내 듣지 않을 때에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목자가 곁길로 가는 양을 달래도 끝까지 말을 듣지 않는 양이 있으면, 막대기로 양의 다리를 부러뜨린다고 합니다. 더 이상 마음대로 가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가다가 맹수의 먹이가 되거나,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7:14절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우리도 때대로 곁길로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막대기를 사용하십니다. 그 막대기는 사람 막대기이며, 인생의 고통스러움이 채찍이 됩니다. 좋게 말할 때 들어야지 정도가 지나치면 결국 막대기를 맞게 됩니다. 막대기를 맞고 돌아온 간증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사야1:5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애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고 이렇게 확신 있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이 하나님의 집에 살겠다고 소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의 생애를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지금은 어떠합니까? 나를 돌보시며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기쁨으로 순종하고 따르는 생활을 합니까? 세상이 주는 모든 염려를 다 떨쳐버리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쁨으로 따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누구나가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원합니다. 물론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도 일반적인 생활은 안전하고 평안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평안이나 안전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많이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이 아마도 염려일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인 ‘카알라일’의 일화입니다. 그는 항상 생각하고 글을 쓰며, 조용한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옆집에서 닭을 몇 마리 기르는데 새벽마다 ‘꼬끼오’ 하며 우는 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결심을 하고 옆집의 주인을 만나서 사정을 말했습니다. 카알라일의 사정을 들은 그 주인은 “하룻밤에 기껏 서너 번 밖에 울지 않은 것을 뭐 그러시오.”라며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습니다. 카알라일은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닭 울음소리를 기다리느라고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소.”라고 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하룻밤에 서너 번 우는 소리이지만 카알라일은 ‘닭이 곧 울 텐데.’라는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강박증’이라고 합니다. 즉 염려하지 않아도 될 일을 쓸데없이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걱정을 사서하고 있는 형상입니다.
염려와 걱정은 사람의 마음을 태우고 뼈를 마르게 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걱정’이라는 말은 ‘마음이 둘로 갈라져 있음’을 의미하며, ‘염려’라는 말은 ‘물어뜯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맹수들이 짐승을 사냥하면서 사냥감의 목을 물어 질식시킬 때 사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염려는 사람의 목을 물어 숨을 틀어막는 것과도 같은 위험한 병입니다. 이처럼 염려 병에 걸리면 육신적으로는 힘과 기능을 잃게 되며, 영적으로도 무력증에 빠지게 됩니다. 현대인의 수많은 질병 중에서 60-70%가 염려와 근심과 같은 심리적인 원인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염려와 걱정이 ‘불신’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가복음21:34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고 하셨으며, 요한복음14:1절에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경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염려가 안 됩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도 무엇인가를 염려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생활의 염려와 근심을 떨어버릴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이 본문 말씀에서 다윗의 삶의 고백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에 함께 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며, 내게는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깊이 상고해 봅시다.
1. 하나님은 자녀를 돌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자신을 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양에게 있어서의 목자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목자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양은 자신을 위하여 염려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목자가 양의 필요를 알고 때를 따라서 공급하고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는 것은 양들이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좋은 꼴을 먹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양들을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은 양들이 물을 마시도록 함도 있지만 안전하고 평안한 쉼을 위함입니다. 양은 흐르는 냇물에서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양의 습성을 아는 목자는 양들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물을 마시게 하며, 쉬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목자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아버지이십니다. 갈라디아4:6절에서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들의 모든 부분을 낱낱이 알고 계시며,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누가복음12:7절에서는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마태복음6:32절에서는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우리의 삶을 완전하게 돌보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의심하는 무리들을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7:9-11절(현대어성경)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고 하는데 그 아버지가 떡 대신에 돌을 주겠느냐? 또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그 아버지가 뱀을 주겠느냐? 악한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애쓰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더욱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처럼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이라 할지라도 이 아버지의 돌보심을 막는 것은 바로 의심의 또 다른 표현인 염려와 근심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양이 목자를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합니다. 목자가 양들을 위험한 곳, 고통스러운 곳으로 인도하겠습니까? 목자는 양의 습성과 양의 체질적인 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양이 좋아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곳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입니다. 이 곳은 양에게 있어서 가장 편안하고 안전하며 풍성한 생활의 터전입니다. 때때로 거칠고 황량하고 햇볕이 뜨거운 광야를 지나야 합니다. 때로는 목마르고 배고픈 과정을 겪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들이 먹어야 할 때와 쉬어야 할 때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쉼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즉 때때로 겪게 되는 고통스러운 과정조차 더 안전하고 더욱 풍성한 삶의 자리에 이르는 과정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29: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그런데 사람들이 꾀를 냅니다. 오늘만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내년에도 십년 후에도 이렇게 평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려고 꾀를 내었습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미리 저축해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들이 내일 먹을 것과 쉴 자리를 미리 데려가지는 않습니다.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준비하고 계획하지만 그 곳을 미리 보여주거나 미리 데려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양들도 그곳을 미리 보여 달라거나 미리 그 곳에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를 믿고 따릅니다. 오늘을 인도하시듯이 내일도 그렇게 인도하실 것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중에 오직 사람만 염려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오히려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함을 뜻합니다. 단지 지금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세계적인 부흥사인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동행하며 함께 사역하는 분 가운데 재미 교포인 한국인 아가씨가 한 사람 있습니다. ‘킴 윅스’라는 맹인 아가씨입니다. 한국전쟁 때 실명을 했고,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당시 참전 했던 어느 미군 중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인디애나 주립대학을 나와서 오스트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하여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이 아가씨가 예수님을 영접하고는 자신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신앙을 간증했습니다. 이 간증으로 인하여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집회를 다니면서 간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의 간증 중에 이런 고백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장님인 나를 인도할 때, 저 100미터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뛰라.’고 말하고,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말합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분을 내가 믿고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성실 할 때, 나는 내가 가고자하는 목적지에 꼭 도착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1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20년 후도 알지 못합니다. 또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보이시는 그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오늘을 살면, 하나님은 내일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내 생애를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그곳에 도달케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하루하루 한걸음씩 인도하십니다. 내일의 것을 미리 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6:34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때로는 자기 마음대로 가다가 가시덤불에 걸린 양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게 행하여 낙심할 때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 때문에 우리를 다시 소생하게 하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믿고 의지합니까?
3.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목자이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양을 인도하며 보호하는 도구입니다. 양들은 시력도 약하고 방향감각도 약해서 곁길로 가기가 쉽습니다. 목자는 곁길로 가는 양에게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합니다. 끝이 둥글게 구부러져 있는 지팡이는 무리에서 이탈해 딴 길로 가려는 양의 목을 잡아끌어 당기거나, 양이 웅덩이에 빠졌을 때 양의 목을 걸어 끌어올립니다. 막대기는 짧고 단단하게 생겼는데, 길에서 벗어나는 양을 툭툭 쳐서 제 길로 가게하고, 사나운 짐승이 양을 공격할 때면 양을 지키는 무기가 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주신 주님이 목자이십니다. 생명까지 주신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앞서 보았던 대로 주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에서는 ‘세상의 어떤 세력도 우리를 주님의 손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로마서8:38-39절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위하여 생명까지 주시며 사랑하시지만, 목자의 말을 끝내 듣지 않을 때에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목자가 곁길로 가는 양을 달래도 끝까지 말을 듣지 않는 양이 있으면, 막대기로 양의 다리를 부러뜨린다고 합니다. 더 이상 마음대로 가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가다가 맹수의 먹이가 되거나,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7:14절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우리도 때대로 곁길로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막대기를 사용하십니다. 그 막대기는 사람 막대기이며, 인생의 고통스러움이 채찍이 됩니다. 좋게 말할 때 들어야지 정도가 지나치면 결국 막대기를 맞게 됩니다. 막대기를 맞고 돌아온 간증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사야1:5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애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고 이렇게 확신 있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이 하나님의 집에 살겠다고 소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의 생애를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지금은 어떠합니까? 나를 돌보시며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기쁨으로 순종하고 따르는 생활을 합니까? 세상이 주는 모든 염려를 다 떨쳐버리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쁨으로 따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