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위로하심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043회
작성일
2003-06-14 22:34
♡♥♡ 하나님의 위로하심 / 행20:7-12
***들어가는 말
오늘처럼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외롭기 마련입니다. 일에 쫓기다 보면 서로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 심리학자들은 삶에 지쳐 상담하러 오는 내담자들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의 말을 그냥 들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마음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고 외로워진다고 했습니다.
신학생 때에 상담학을 가르치던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교수님은 가장 훌륭한 상담자는 문제를 해결하고 길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내담자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교수님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상담하러 오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으며, 문제를 해결할 방법까지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상담하러 오거든 그의 마지막 부분의 말을 반복해서 말해주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내담자가, ‘우리 아이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서 공부는 하지 않고 말썽을 일으켜서 속이 상해 죽겠습니다.’라고 하면, ‘그렇습니까? 정말 속이 많이 상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 있는 말을 다 하고, 나중에는 해결점까지 다 말하고는 ‘감사합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라고 하고는 돈을 내고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나는 그저 말만 들어주고 돈을 받는다.’”
라고 해서 모두가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지금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위로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두 아이의 어머니인 성도가 아이들에게 책과 장난감을 주고는 방을 정리하기 위하여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한 30분은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그런 후에 아래층에서 아이가, “엄마, 거기 계셔요?”라고 물어왔습니다. 엄마는 “그래, 여기 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됐어요.”라고 는 다시 조용해 졌습니다. 이 짧은 물음과 대답은 엄마가 일을 끝내고 내려올 때까지 주기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로가 되고 평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사도행전17:11절에는 베뢰아 교회 성도들의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베뢰아 사람들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대부분 말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시간의 본문의 내용도 그러한 열정을 반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유두고’라는 평범한 청년입니다. 바울 일행이 전도여행 중에, 년초의 무교절 절기가 지난 어느 날 ‘드로아’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며 드로아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안식 후 첫날, 지금의 주일이었습니다.
주일 예배는 어느 가정의 윗 다락에서 열렸습니다. 다락방이란, 일층이 주거 공간이고, 주거 공간 위에 다락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던 곳입니다(마가의 다락방). 윗 다락은 2층을 이루는 다락방의 또 다른 다락방입니다. 이 윗 다락은 그리 넓지 않은 곳이며, 삼층에 해당합니다. 아마도 바울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예배 처소를 미처 마련하지 못하여 임시로 빌린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앉을 자리가 없도록 많이 모였습니다. 이는 드로아 교회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은 늦게 들어온 까닭에, 앉을 자리가 없어서 겨우 창문턱에 걸터앉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위험한 곳에 앉아서 깊이 졸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무척 피곤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로 보아 이 청년은 아마도 당시의 노예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의 이름도 당시의 노예들에게 흔히 붙여졌던 이름입니다.
바울의 설교는 밤이 깊은 시간까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창문턱에 걸터앉아 있던 유두고는 그만 깊이 졸다가 창 밖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나가보니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고는 그 청년 위에 엎드려 생명이 다시 돌아오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살아난 유두고를 통하여 지금까지 가르침을 받았던 말씀들을 깊이 체험했고, 하나님이 함께 계심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유두고가 다시 살리심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지만, 말씀을 통하여 그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1.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유두고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노예 신분이었다면, 비록 저녁시간이라 할지라도 시간 내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시간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교회로 오기가 쉽지는 않았겠지요. 아무튼 유두고는 늦은 밤에 말씀을 듣기 위하여 교회로 왔고 자리가 없어서 창문턱에 걸터앉아서라도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11:12절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방해 세력들과 싸우면서까지 쟁취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유두고는 이런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마저 식어질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인 저 역시 피곤하다는 이유로 기도와 말씀에 소홀히 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목적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어떤 이유로도 뒤로 물러 설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10:38절에서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사무엘상12:23절에서 선지자 사무엘은 고백하기를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열심을 내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2. 열정도 잠깐의 방심으로 인하여 낭패를 당합니다.
유두고가 비록 말씀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말씀을 듣지 못하는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당시 초대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비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노동을 통하여 삶을 영위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주 1일 휴무제가 실시되기 전이었고,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노예나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격무에 시달리다가 참석한 저녁 집회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힘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그런 것에는 상관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습니다. 한 밤중이 되자 유두고는 엄습해 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끝내는 떨어졌고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유두고는 생명의 말씀이 넘치는 곳에서도 생명을 소유하지 못하고 세상으로 추락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할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능력이지만, 그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아무런 능력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도들이 예배에 참석은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하는 자리에 몸은 있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 결국은 사단의 방해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 가’와 같은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길 가에 떨어진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단이 제거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나 예배나 어떤 신앙의 행위보다도 더 기뻐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9:24절에서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셨으며, 호세아6:6절에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셨고, 요한복음17:3절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에게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일어나 사망사고는 사람들을 술렁거리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써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유두고를 바울을 통하여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소동하던 성도들은 오히려 밤이 새도록 바울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다시 살아난 유두고로 인하여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약속하십니다. 시편107:9절입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큰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유두고에게는 다시 살리심을 받는 은총을 베푸셨고, 말씀을 사모하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의 확신과 죽음의 고통에서도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를 받게 하셨습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는 이러한 은총을 입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세상에서의 승리를 약속 받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크신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더욱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을 내며,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임신한 여인이 어떤 사람을 미워하면 아이가 미워하는 사람을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을 깊이 생각하면 그 사람을 닮는 아이를 낳는다고도 합니다.
‘토마스 하디’가 쓴 ‘환상의 여인’이라는 작품에도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시인을 마음 깊이 사모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그 시인을 닮았습니다. 여인은 남편에게 오해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여인은 단 한 번도 그 시인을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사모한 결과 마치 그 사람의 아이를 가진 것처럼 닮은 자녀를 출산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하여 그렇게 예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사모할 때에 비록 실수하고 방심하여 사단의 조롱을 받을 때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총은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이처럼 하나님을 사모하는 진실한 마음이 늘 충만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는 말
오늘처럼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외롭기 마련입니다. 일에 쫓기다 보면 서로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 심리학자들은 삶에 지쳐 상담하러 오는 내담자들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의 말을 그냥 들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마음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고 외로워진다고 했습니다.
신학생 때에 상담학을 가르치던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교수님은 가장 훌륭한 상담자는 문제를 해결하고 길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내담자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교수님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상담하러 오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으며, 문제를 해결할 방법까지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상담하러 오거든 그의 마지막 부분의 말을 반복해서 말해주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내담자가, ‘우리 아이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서 공부는 하지 않고 말썽을 일으켜서 속이 상해 죽겠습니다.’라고 하면, ‘그렇습니까? 정말 속이 많이 상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 있는 말을 다 하고, 나중에는 해결점까지 다 말하고는 ‘감사합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라고 하고는 돈을 내고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나는 그저 말만 들어주고 돈을 받는다.’”
라고 해서 모두가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지금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위로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두 아이의 어머니인 성도가 아이들에게 책과 장난감을 주고는 방을 정리하기 위하여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한 30분은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그런 후에 아래층에서 아이가, “엄마, 거기 계셔요?”라고 물어왔습니다. 엄마는 “그래, 여기 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됐어요.”라고 는 다시 조용해 졌습니다. 이 짧은 물음과 대답은 엄마가 일을 끝내고 내려올 때까지 주기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로가 되고 평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사도행전17:11절에는 베뢰아 교회 성도들의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베뢰아 사람들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대부분 말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시간의 본문의 내용도 그러한 열정을 반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유두고’라는 평범한 청년입니다. 바울 일행이 전도여행 중에, 년초의 무교절 절기가 지난 어느 날 ‘드로아’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며 드로아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안식 후 첫날, 지금의 주일이었습니다.
주일 예배는 어느 가정의 윗 다락에서 열렸습니다. 다락방이란, 일층이 주거 공간이고, 주거 공간 위에 다락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던 곳입니다(마가의 다락방). 윗 다락은 2층을 이루는 다락방의 또 다른 다락방입니다. 이 윗 다락은 그리 넓지 않은 곳이며, 삼층에 해당합니다. 아마도 바울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예배 처소를 미처 마련하지 못하여 임시로 빌린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앉을 자리가 없도록 많이 모였습니다. 이는 드로아 교회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은 늦게 들어온 까닭에, 앉을 자리가 없어서 겨우 창문턱에 걸터앉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위험한 곳에 앉아서 깊이 졸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무척 피곤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로 보아 이 청년은 아마도 당시의 노예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의 이름도 당시의 노예들에게 흔히 붙여졌던 이름입니다.
바울의 설교는 밤이 깊은 시간까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창문턱에 걸터앉아 있던 유두고는 그만 깊이 졸다가 창 밖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나가보니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고는 그 청년 위에 엎드려 생명이 다시 돌아오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살아난 유두고를 통하여 지금까지 가르침을 받았던 말씀들을 깊이 체험했고, 하나님이 함께 계심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유두고가 다시 살리심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지만, 말씀을 통하여 그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1.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유두고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노예 신분이었다면, 비록 저녁시간이라 할지라도 시간 내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시간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교회로 오기가 쉽지는 않았겠지요. 아무튼 유두고는 늦은 밤에 말씀을 듣기 위하여 교회로 왔고 자리가 없어서 창문턱에 걸터앉아서라도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11:12절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방해 세력들과 싸우면서까지 쟁취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유두고는 이런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마저 식어질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인 저 역시 피곤하다는 이유로 기도와 말씀에 소홀히 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목적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어떤 이유로도 뒤로 물러 설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10:38절에서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사무엘상12:23절에서 선지자 사무엘은 고백하기를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열심을 내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2. 열정도 잠깐의 방심으로 인하여 낭패를 당합니다.
유두고가 비록 말씀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말씀을 듣지 못하는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당시 초대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비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노동을 통하여 삶을 영위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주 1일 휴무제가 실시되기 전이었고,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노예나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격무에 시달리다가 참석한 저녁 집회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힘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그런 것에는 상관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습니다. 한 밤중이 되자 유두고는 엄습해 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끝내는 떨어졌고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유두고는 생명의 말씀이 넘치는 곳에서도 생명을 소유하지 못하고 세상으로 추락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할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능력이지만, 그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아무런 능력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도들이 예배에 참석은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하는 자리에 몸은 있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 결국은 사단의 방해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 가’와 같은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길 가에 떨어진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단이 제거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나 예배나 어떤 신앙의 행위보다도 더 기뻐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9:24절에서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셨으며, 호세아6:6절에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셨고, 요한복음17:3절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에게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일어나 사망사고는 사람들을 술렁거리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써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유두고를 바울을 통하여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소동하던 성도들은 오히려 밤이 새도록 바울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다시 살아난 유두고로 인하여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약속하십니다. 시편107:9절입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큰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유두고에게는 다시 살리심을 받는 은총을 베푸셨고, 말씀을 사모하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의 확신과 죽음의 고통에서도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를 받게 하셨습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는 이러한 은총을 입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세상에서의 승리를 약속 받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크신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더욱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을 내며,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임신한 여인이 어떤 사람을 미워하면 아이가 미워하는 사람을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을 깊이 생각하면 그 사람을 닮는 아이를 낳는다고도 합니다.
‘토마스 하디’가 쓴 ‘환상의 여인’이라는 작품에도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시인을 마음 깊이 사모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그 시인을 닮았습니다. 여인은 남편에게 오해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여인은 단 한 번도 그 시인을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깊이 사모한 결과 마치 그 사람의 아이를 가진 것처럼 닮은 자녀를 출산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하여 그렇게 예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사모할 때에 비록 실수하고 방심하여 사단의 조롱을 받을 때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총은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이처럼 하나님을 사모하는 진실한 마음이 늘 충만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