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하신 하나님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869회
작성일
2003-05-31 18:32
♡♥♡ 자비하신 하나님 / 창 38:12-19
*** 들어가는 말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내 주 예수 여전히 날 부르사 그 참되신 사랑을 베푸시나니 내 형제여 주님을 곧 따르라. 주 널 위해 비네. 늘 빌으시네.” 자비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노래하는 찬송가 412장의 가사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성품입니다. 출애굽기34:6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 앞을 지나시며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이 분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본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중심인물은 ‘다말’이라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야곱의 네 번째 아들인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유다에게는 ‘엘’, ‘오난’, ‘셀라’ 이렇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다말’은 맏이인 ‘엘’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이 다말이라는 여인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1. 먼저 이 사건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야곱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난 ‘유다’는 가나안 사람인 ‘수아’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장남인 ‘엘’은 유대 산지인 딤나 지역출신의 ‘다말’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엘은 하나님께 악을 행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졸지에 과부가 된 다말은 당시의 ‘형사취수제도’에 따라 유다의 두 번째 아들인 ‘오난’을 신랑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오난’마저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 번째 아들인 ‘셀라’인데, 셀라는 아직 어려서 결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시아버지의 명으로 친정에서 수절하고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셀라가 장성했지만 유다는 다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다는 자신의 소유 양떼의 양털을 깎기 위하여 다말이 살고 있는 근처인 ‘딤나’로 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말은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다말은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을 취하고 딤나 길거리에서 유다를 기다렸습니다. 마침 유다는 상처를 하고 적적해 하던 차에 창녀로 변장한 다말을 보고는 동침을 했습니다. 다말은 곧장 잉태하게 되었고, 그 소문은 온 마을에 퍼지고, 시아버지인 유다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유다는 다말을 화형에 처하라고 했습니다.
다말이 불에 태워지기 위해 끌려갈 때에 자기가 잉태한 것은 자신의 시아버지인 유다로 인함인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유다가 동침할 때 증거물로 준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놓았습니다. 이것을 본 유다는 자신의 것임을 확인했고, 자신이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인정했습니다. 다말이 해산하고 보니 아들 쌍둥이였는데 각각 ‘베레스’와 ‘세라’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중의 ‘베레스’가 예수님의 계보에 올랐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2. 의미를 알기 위해 이해해야할 문제를 봅시다.
형사취수제도가 있습니다. 형사취수제도란 가문을 이어주기 위한 관습법입니다. 즉 형이 결혼하여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남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낳은 첫 아들을 형의 자식으로 주어, 형의 가문을 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아들은 자신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흔히 수혼(㛮婚)이라고도 하는 이 법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의 고대 근동에서는 많은 민족이 이러한 법을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신명기25:5-6절입니다.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다음으로, 유다의 둘째 아들인 오난이 죽은 이유입니다. 본문 앞부분의 8-10절을 보면, 오난은 형수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형의 가문에 자식을 주지 않으려고, 잉태되지 못하도록 땅에다 설정을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행위였습니다. 이 일이 왜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일까요? 물론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생각이 악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형의 자식이 없으면, 부모의 모든 유산은 장자의 권한을 승계한 자신의 것이고, 자신과 자신의 자식들이 가문의 대를 이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자의 권한은 대단한 것입니다.
(참고/ 자위행위를 영어로 masturbation이라고 하며, 프랑스어로는 ‘오나니(onanie)'라고 한다. 이 두 단어가 자위, 수음이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이 중에서 『오나니』라는 말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의 둘째 아들이자 땅에 설정한 「오난」의 이름을 따 온 말이다.)
다음으로, 다말이 창녀로 변장한 이유입니다. 다말은 오난이 죽자 어린 ‘셀라’하고 결혼을 해야 하는데, 시아버지가 셀라마저 죽을까 겁을 내게 되어,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습니다. 셋째와의 결혼이 지연되자 다말은 일단의 결심을 합니다. 다말은 창녀로 변신을 하고 시아버지인 유다를 유혹해서 엘의 대를 잇게 합니다. 즉 다말이 창녀로 변신한 이유는 엘의 가문을 잇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것이 정당화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말과 유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길을 통해서도 섭리하시며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로움이며 자비하심입니다.
3.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봅시다.
다말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계보에 올랐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죄를 승인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패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웅전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심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계획에 쓰임 받은 사람들의 경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반드시 뜻을 이루십니다. 즉, 인간이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다 할지라도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서로를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14:24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하셨으며, 로마서14:10-13절에서는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가문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겠다고 계획하셨습니다. 야곱이 임종 전에 열 두 아들에게 축복했는데, 유다에게 축복한 내용입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실로”란? 약속하신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계획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 속에 다말이 들었습니다. 비록 유다의 두 아들이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통하여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며, 사람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뜻에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욥기35:6-8절입니다. “네가 범죄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하는 길뿐입니다. 이사야48:17절에서,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영원토록 의지하며 순종하고 따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내 주 예수 여전히 날 부르사 그 참되신 사랑을 베푸시나니 내 형제여 주님을 곧 따르라. 주 널 위해 비네. 늘 빌으시네.” 자비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노래하는 찬송가 412장의 가사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성품입니다. 출애굽기34:6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 앞을 지나시며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이 분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본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중심인물은 ‘다말’이라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야곱의 네 번째 아들인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유다에게는 ‘엘’, ‘오난’, ‘셀라’ 이렇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다말’은 맏이인 ‘엘’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이 다말이라는 여인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1. 먼저 이 사건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야곱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난 ‘유다’는 가나안 사람인 ‘수아’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장남인 ‘엘’은 유대 산지인 딤나 지역출신의 ‘다말’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엘은 하나님께 악을 행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졸지에 과부가 된 다말은 당시의 ‘형사취수제도’에 따라 유다의 두 번째 아들인 ‘오난’을 신랑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오난’마저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 번째 아들인 ‘셀라’인데, 셀라는 아직 어려서 결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시아버지의 명으로 친정에서 수절하고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셀라가 장성했지만 유다는 다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다는 자신의 소유 양떼의 양털을 깎기 위하여 다말이 살고 있는 근처인 ‘딤나’로 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말은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다말은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을 취하고 딤나 길거리에서 유다를 기다렸습니다. 마침 유다는 상처를 하고 적적해 하던 차에 창녀로 변장한 다말을 보고는 동침을 했습니다. 다말은 곧장 잉태하게 되었고, 그 소문은 온 마을에 퍼지고, 시아버지인 유다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유다는 다말을 화형에 처하라고 했습니다.
다말이 불에 태워지기 위해 끌려갈 때에 자기가 잉태한 것은 자신의 시아버지인 유다로 인함인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유다가 동침할 때 증거물로 준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놓았습니다. 이것을 본 유다는 자신의 것임을 확인했고, 자신이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인정했습니다. 다말이 해산하고 보니 아들 쌍둥이였는데 각각 ‘베레스’와 ‘세라’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중의 ‘베레스’가 예수님의 계보에 올랐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2. 의미를 알기 위해 이해해야할 문제를 봅시다.
형사취수제도가 있습니다. 형사취수제도란 가문을 이어주기 위한 관습법입니다. 즉 형이 결혼하여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남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낳은 첫 아들을 형의 자식으로 주어, 형의 가문을 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아들은 자신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흔히 수혼(㛮婚)이라고도 하는 이 법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의 고대 근동에서는 많은 민족이 이러한 법을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신명기25:5-6절입니다.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다음으로, 유다의 둘째 아들인 오난이 죽은 이유입니다. 본문 앞부분의 8-10절을 보면, 오난은 형수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형의 가문에 자식을 주지 않으려고, 잉태되지 못하도록 땅에다 설정을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행위였습니다. 이 일이 왜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일까요? 물론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생각이 악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형의 자식이 없으면, 부모의 모든 유산은 장자의 권한을 승계한 자신의 것이고, 자신과 자신의 자식들이 가문의 대를 이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자의 권한은 대단한 것입니다.
(참고/ 자위행위를 영어로 masturbation이라고 하며, 프랑스어로는 ‘오나니(onanie)'라고 한다. 이 두 단어가 자위, 수음이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이 중에서 『오나니』라는 말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의 둘째 아들이자 땅에 설정한 「오난」의 이름을 따 온 말이다.)
다음으로, 다말이 창녀로 변장한 이유입니다. 다말은 오난이 죽자 어린 ‘셀라’하고 결혼을 해야 하는데, 시아버지가 셀라마저 죽을까 겁을 내게 되어,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습니다. 셋째와의 결혼이 지연되자 다말은 일단의 결심을 합니다. 다말은 창녀로 변신을 하고 시아버지인 유다를 유혹해서 엘의 대를 잇게 합니다. 즉 다말이 창녀로 변신한 이유는 엘의 가문을 잇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것이 정당화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말과 유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길을 통해서도 섭리하시며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로움이며 자비하심입니다.
3.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봅시다.
다말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계보에 올랐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죄를 승인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패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웅전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심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계획에 쓰임 받은 사람들의 경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반드시 뜻을 이루십니다. 즉, 인간이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다 할지라도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서로를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14:24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하셨으며, 로마서14:10-13절에서는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가문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겠다고 계획하셨습니다. 야곱이 임종 전에 열 두 아들에게 축복했는데, 유다에게 축복한 내용입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실로”란? 약속하신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계획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 속에 다말이 들었습니다. 비록 유다의 두 아들이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통하여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며, 사람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뜻에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욥기35:6-8절입니다. “네가 범죄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하는 길뿐입니다. 이사야48:17절에서,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영원토록 의지하며 순종하고 따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