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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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05-31 18:31
♡♥♡ 이제는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 사60:1-9
*** 들어가는 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로마서13:11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때가 벌써 2000여 년 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그 때부터 이미 마지막 세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계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잃어가고 있는 자연의 움직임을 보면, 분명히 마지막 세대 중에서도 거의 끝부분임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지금까지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데, 그 때마다 사람들은 종말이라고 떠들어대지 않았느냐?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불로 심판을 받을 때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으며, 또한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실 그 때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8:22절에서,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어라고 하셨는지 누가복음17:26-29절을 봅시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이 느끼고 준비할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는 번개가 동에서 서에까지 번뜩이듯이 그렇게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안전한 길은 미리 준비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본문의 배경을 봅시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직 이르지 않은 예언이지만,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포로 생활을 한지 70년이 지났습니다. 정말 참혹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굴욕스러운 시간들은 차라리 서러움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돌아가야 할 땅은 이미 폐허가 된지 오래였습니다. 이제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아니한 이스라엘에게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은 참담함이며 깊은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픔은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으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폐허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들을 향하여 “일어나라! 빛을 비추어라!”고 선포합니다. 일어나서 빛을 비출 수 있는 이유는 어두운 그늘은 지나갔고 이스라엘의 빛이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지금까지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어두움이 모두 걷히고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은, 실패와 고난과 좌절과 폐허의 얼룩 속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날 뿐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용기를 내어 다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지금의 우리가 찾아야 할 의미는 무엇입니까?
2.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일어나야 할 자리는 죽음과 절망의 자리입니다. 즉 영적인 죽음을 초래하는 자리, 그리고 영생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자리에서부터 떨치고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는 세상의 편안함과 쾌락에 젖어있는 자리이며, 세상일에 얽매어 있는 자리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따르는 제자 중 한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 제자는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예수님께 결단할 수 있는 말미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가 대답한 말의 의미는 ‘자신의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즉 결단을 머뭇거리는 사람에게 생명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주변의 사람들은 바디매오를 무시했으며,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윽박질렀습니다. 그러나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바디매오는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멈추어 서셨고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이 부르신다고 하자, 그는 자신의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로 갔습니다.
이는 바디매오의 결단이 대단한 것임을 나타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신분처럼 입고 있던 거지의 겉옷을 벗어버렸습니다. 이는 소경의 자리에 다시는 앉지 않겠다는 확고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믿음대로 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즉시 눈을 떴으며 자신의 믿음과 결단대로 더 이상 소경도 거지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세상일에 얽매여서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등한히 하다가는 영영 생명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머뭇거리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아합 왕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싫어도 우상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왕후인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수호자처럼 버티고 서서 백성들을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하나님과 우상 사이를 오락가락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엘리야 선지자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라고 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고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마음을 정하지 못하여 아무 대답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지금 눈에 보이고 느낄 수 있는 생활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초월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하지만 어렵다고 머뭇거린다면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삶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꾸만 편안하고 싶어 하는 육신을 다시 일어나게 하십시오. 세상일에 빼앗겨 있는 마음을 다시 주님께로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을 곁눈질 하다가 주님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8:13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야 합니까?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나타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을 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오늘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즉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사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선포하고 실천해야 할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일어나야 하고, 용기를 가지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잠자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상 사람들이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 대복교회도 이제 더 늦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입니까? 누가복음3:9-14절을 봅시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料)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웃을 향하여 봉사하고, 나누고,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2:15절에서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했고, 3: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의 생활에서 인격으로, 말로, 실천하는 행동으로 신앙이 나타나야 합니다.
자신의 등불이 꺼져 있으면 너무도 당연하지만 길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믿음의 등불이 켜져 있는지를 살펴야 하며, 등불에 사용할 기름을 여유 있게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그것도 지금 아직 기회가 있고 여유가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나타내야 할 이유는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 위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따르면 세상이 어두워지고 캄캄해지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충만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본문2-9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시대가 비록 어둡고 혼란스럽지만, 이 때야 말로 진실한 신앙이 빛을 발할 때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결코 다함이 없으며, 사랑하시는 성도들에게 아끼지도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한 달 동안 진력이 나도록 먹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가 하나님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은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일 개월 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라고 이 많은 백성에게 한 달 동안 고기를 먹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토로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일어납시다. 그리하여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로마서13:11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때가 벌써 2000여 년 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그 때부터 이미 마지막 세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계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잃어가고 있는 자연의 움직임을 보면, 분명히 마지막 세대 중에서도 거의 끝부분임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지금까지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데, 그 때마다 사람들은 종말이라고 떠들어대지 않았느냐?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불로 심판을 받을 때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으며, 또한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실 그 때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8:22절에서,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어라고 하셨는지 누가복음17:26-29절을 봅시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이 느끼고 준비할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는 번개가 동에서 서에까지 번뜩이듯이 그렇게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안전한 길은 미리 준비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본문의 배경을 봅시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직 이르지 않은 예언이지만,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포로 생활을 한지 70년이 지났습니다. 정말 참혹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굴욕스러운 시간들은 차라리 서러움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돌아가야 할 땅은 이미 폐허가 된지 오래였습니다. 이제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아니한 이스라엘에게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은 참담함이며 깊은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픔은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으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폐허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들을 향하여 “일어나라! 빛을 비추어라!”고 선포합니다. 일어나서 빛을 비출 수 있는 이유는 어두운 그늘은 지나갔고 이스라엘의 빛이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지금까지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어두움이 모두 걷히고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은, 실패와 고난과 좌절과 폐허의 얼룩 속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날 뿐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용기를 내어 다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지금의 우리가 찾아야 할 의미는 무엇입니까?
2.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일어나야 할 자리는 죽음과 절망의 자리입니다. 즉 영적인 죽음을 초래하는 자리, 그리고 영생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자리에서부터 떨치고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는 세상의 편안함과 쾌락에 젖어있는 자리이며, 세상일에 얽매어 있는 자리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따르는 제자 중 한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 제자는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예수님께 결단할 수 있는 말미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가 대답한 말의 의미는 ‘자신의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즉 결단을 머뭇거리는 사람에게 생명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주변의 사람들은 바디매오를 무시했으며,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윽박질렀습니다. 그러나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바디매오는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멈추어 서셨고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이 부르신다고 하자, 그는 자신의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로 갔습니다.
이는 바디매오의 결단이 대단한 것임을 나타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신분처럼 입고 있던 거지의 겉옷을 벗어버렸습니다. 이는 소경의 자리에 다시는 앉지 않겠다는 확고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믿음대로 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즉시 눈을 떴으며 자신의 믿음과 결단대로 더 이상 소경도 거지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세상일에 얽매여서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등한히 하다가는 영영 생명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머뭇거리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아합 왕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싫어도 우상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왕후인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수호자처럼 버티고 서서 백성들을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하나님과 우상 사이를 오락가락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엘리야 선지자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라고 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고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마음을 정하지 못하여 아무 대답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지금 눈에 보이고 느낄 수 있는 생활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초월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하지만 어렵다고 머뭇거린다면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삶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꾸만 편안하고 싶어 하는 육신을 다시 일어나게 하십시오. 세상일에 빼앗겨 있는 마음을 다시 주님께로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을 곁눈질 하다가 주님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8:13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야 합니까?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나타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을 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오늘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즉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사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선포하고 실천해야 할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일어나야 하고, 용기를 가지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잠자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상 사람들이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 대복교회도 이제 더 늦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입니까? 누가복음3:9-14절을 봅시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料)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웃을 향하여 봉사하고, 나누고,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2:15절에서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했고, 3: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의 생활에서 인격으로, 말로, 실천하는 행동으로 신앙이 나타나야 합니다.
자신의 등불이 꺼져 있으면 너무도 당연하지만 길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믿음의 등불이 켜져 있는지를 살펴야 하며, 등불에 사용할 기름을 여유 있게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그것도 지금 아직 기회가 있고 여유가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나타내야 할 이유는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 위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따르면 세상이 어두워지고 캄캄해지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충만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본문2-9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시대가 비록 어둡고 혼란스럽지만, 이 때야 말로 진실한 신앙이 빛을 발할 때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결코 다함이 없으며, 사랑하시는 성도들에게 아끼지도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한 달 동안 진력이 나도록 먹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가 하나님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은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일 개월 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라고 이 많은 백성에게 한 달 동안 고기를 먹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토로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일어납시다. 그리하여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