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을 잃은 세대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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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08-30 21:12
♡♥♡ 감각을 잃은 세대 / 마11:16-19
*** 들어가는 말
본문의 짧은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아이들이 놀이를 하는 모습을 통하여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현실을 비유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영적인 현실을 무감각하고 단절된 상태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생활에 빠져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여년을 하나님과 단절된 채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처럼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살면서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에서 나는 꿀을 먹으면서 사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즉 자신들처럼 살지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군중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의 삶은 이해했습니까?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들과 동떨어져 세속적인 삶을 거부한다고 비난했지만, 예수님에 대하여는 자신들처럼 먹고 마신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정작 메시아가 오시자 자신들의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를 따라서 시장에 온 아이들이 부모가 물건을 사거나 파는 동안에 시장 옆의 빈터에서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늘과 같은 놀이기구를 갖춘 놀이터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도 3-40년 전만 해도 거의 같은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모여서 편을 가르고는 그 당시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피리를 불고 춤을 추는 것은 결혼식의 광경입니다. 그리고 ‘아이고, 아이고’하는 애곡과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것은 장례식 광경입니다. 그들의 놀이는 한 편이 피리를 부는 시늉을 하면 다른 한 편은 춤을 추어야 하며, 다른 편이 곡을 하는 시늉을 하면 이쪽 편은 가슴을 치고 슬피 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서로가 마음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한 편이 피리를 부는 시늉을 해도 다른 편이 춤추지 않았습니다. 곡하는 시늉을 해도 가슴을 치며 슬피 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유대인들의 영적인 단절과 무감각을 나무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린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감각이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쳐도 예전처럼 옷을 찢으며 재를 덮어쓰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가르쳐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기대와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과 비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마치 오늘의 우리 사회를 보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마음만 먹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서든지 읽을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고와 권면의 말씀들이 넘쳐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맞는 말씀만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기대와 생각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외면하거나 비난을 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가 되면 이러한 세대가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4:3-4절(현대어성경)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들으려 하기보다는 오직 자신의 비위에 맞는 말을 하는 교사들을 찾아다니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상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따라갑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가 답답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이나 안전, 편안함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느라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 정부와 국민사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이웃 서로 간에 단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크고 근본적인 단절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세상은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재미있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잠언23:29-35절입니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술 취한 사람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들이 자신의 욕망에 빠져서 감각을 잃어버리고 죽음으로 달려가듯 이 세대가 그러합니다. 이 세대에 함께 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도 똑같이 감각 없는 채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해답은 본문의 앞 쪽 12절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쉽게 풀이해서 다시 읽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용기 있는 자들 또는 강한 집념을 지닌 강한 자들이 그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혹 소심하거나 쉽게 낙담하는 자는 그 나라를 얻을 수 없다.” 특히 본문에서 “빼앗느니라.”에 해당하는 단어는 ‘마치 맹수나 강력한 군사들처럼 무엇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사력(死力)을 다하여 움켜잡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원한 생명,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얻는 것이 누워서 떡먹기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들의 욕망을 다 채우며 자기 생각과 뜻대로 살고서도 차지할 수 있는 그런 값싼 나라가 아닙니다. 젖 먹던 힘을 다하고, 죽을 힘을 다하여 쟁취해야만 하는 고귀하고 값비싼 나라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기대와 생각만을 앞세우면서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를 거부했으니 감각이 없는 사람들임에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됩니다.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 합니다. 교통사고나 중병으로 인하여 팔이나 다리가 마비되었던 사람이 그 감각과 운동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피나는 재활 훈련을 하는 것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영적인 회복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루 이틀, 한달 두 달, 기도해보고 안 되니까 그만둬버리고, 힘들고 어려워서 그만둬버리고, 생활이 여의치 않아서 그만둬버린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감각을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예비 된 영광은 지금 우리의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얻어야 할 위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위하여 영원한 것을 버리시겠습니까? 점점 더 무감각해져가는 세상에 살지만, 깨어 있어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달음박질하는 신실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본문의 짧은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아이들이 놀이를 하는 모습을 통하여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현실을 비유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영적인 현실을 무감각하고 단절된 상태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생활에 빠져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여년을 하나님과 단절된 채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처럼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살면서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에서 나는 꿀을 먹으면서 사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즉 자신들처럼 살지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군중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의 삶은 이해했습니까?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들과 동떨어져 세속적인 삶을 거부한다고 비난했지만, 예수님에 대하여는 자신들처럼 먹고 마신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정작 메시아가 오시자 자신들의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를 따라서 시장에 온 아이들이 부모가 물건을 사거나 파는 동안에 시장 옆의 빈터에서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늘과 같은 놀이기구를 갖춘 놀이터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도 3-40년 전만 해도 거의 같은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모여서 편을 가르고는 그 당시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피리를 불고 춤을 추는 것은 결혼식의 광경입니다. 그리고 ‘아이고, 아이고’하는 애곡과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것은 장례식 광경입니다. 그들의 놀이는 한 편이 피리를 부는 시늉을 하면 다른 한 편은 춤을 추어야 하며, 다른 편이 곡을 하는 시늉을 하면 이쪽 편은 가슴을 치고 슬피 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서로가 마음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한 편이 피리를 부는 시늉을 해도 다른 편이 춤추지 않았습니다. 곡하는 시늉을 해도 가슴을 치며 슬피 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유대인들의 영적인 단절과 무감각을 나무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린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감각이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쳐도 예전처럼 옷을 찢으며 재를 덮어쓰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가르쳐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기대와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과 비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마치 오늘의 우리 사회를 보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마음만 먹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서든지 읽을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고와 권면의 말씀들이 넘쳐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맞는 말씀만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기대와 생각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외면하거나 비난을 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가 되면 이러한 세대가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4:3-4절(현대어성경)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들으려 하기보다는 오직 자신의 비위에 맞는 말을 하는 교사들을 찾아다니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상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따라갑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가 답답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이나 안전, 편안함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느라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 정부와 국민사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이웃 서로 간에 단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크고 근본적인 단절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세상은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재미있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잠언23:29-35절입니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술 취한 사람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들이 자신의 욕망에 빠져서 감각을 잃어버리고 죽음으로 달려가듯 이 세대가 그러합니다. 이 세대에 함께 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도 똑같이 감각 없는 채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해답은 본문의 앞 쪽 12절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쉽게 풀이해서 다시 읽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용기 있는 자들 또는 강한 집념을 지닌 강한 자들이 그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혹 소심하거나 쉽게 낙담하는 자는 그 나라를 얻을 수 없다.” 특히 본문에서 “빼앗느니라.”에 해당하는 단어는 ‘마치 맹수나 강력한 군사들처럼 무엇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사력(死力)을 다하여 움켜잡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원한 생명,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얻는 것이 누워서 떡먹기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들의 욕망을 다 채우며 자기 생각과 뜻대로 살고서도 차지할 수 있는 그런 값싼 나라가 아닙니다. 젖 먹던 힘을 다하고, 죽을 힘을 다하여 쟁취해야만 하는 고귀하고 값비싼 나라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기대와 생각만을 앞세우면서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를 거부했으니 감각이 없는 사람들임에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됩니다.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 합니다. 교통사고나 중병으로 인하여 팔이나 다리가 마비되었던 사람이 그 감각과 운동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피나는 재활 훈련을 하는 것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영적인 회복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루 이틀, 한달 두 달, 기도해보고 안 되니까 그만둬버리고, 힘들고 어려워서 그만둬버리고, 생활이 여의치 않아서 그만둬버린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감각을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예비 된 영광은 지금 우리의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얻어야 할 위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위하여 영원한 것을 버리시겠습니까? 점점 더 무감각해져가는 세상에 살지만, 깨어 있어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달음박질하는 신실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