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 되는 사람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245회
작성일
2003-08-24 20:34
♡♥♡ 기쁨이 되는 사람 / 롬15:1-7
*** 들어가는 말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무척 복잡합니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다원화 사회’, 또는‘정보사회’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향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소달구지를 타고 다니던 옛 사회는 사는 것이 단순했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밀림지대에 사는 미개종족들은 단순한 동물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열매를 따고, 뿌리를 캐고, 사냥을 합니다. 또한 종족 번식을 위하여 싸우고 땅을 차지하려 합니다. 그들은 인류의 발전과 행복을 위하여 일한다든지 문화, 예술, 과학, 학문, 미래정보 등은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끈끈한 정이 있으며, 동족간의 관용과 이해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개인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즉 서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과 이익과 평안을 위하여 서로를 배척하고 감시하고 싸우려는 마음이 지배적입니다. 가장 관용하고 배려하고 이해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마저 밴댕이 속처럼 좁아터져 가는 것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며칠 전에 동역 자들이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으로 갔습니다. 마침 옆 테이블에 세 사람이 식사를 하면서 대화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성도인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이 술을 가장 많이 마신 듯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이 ‘교인이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면서 나름대로 주워들은 신앙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도인 것 같은 사람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 본 바로는 기독교인의 80%가 비기독교 인들보다 더 속이 좁고 비협조적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맞다. 그 말에는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라고 했습니다.
마침 식탁이 준비 되어서 친구가 대표로 기도를 했는데, 그 술 취한 성도도 ‘아멘’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구차하게 변명하면서 자신도 교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사들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다른 두 사람은 우리가 목사들인 줄 모르고 실례를 했다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면서 일찍 자리를 떴습니다.
이탈이고 탈선입니다. 오늘의 사회가 삶의 도리에서 이탈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에서 이탈했습니다. 이사야1:2-3절에서 하나님께서 탄식하셨습니다.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자식이라 기르고 키웠더니 도리어 나에게 반항하는구나.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만들어 준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철없이 구는구나.”
오랜 정치생활을 한 어느 정치인이 “무슨 나라가 이러냐?”라고 한 말이 사회에서 유행어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대통령도 어느 사석에서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해서 비난을 산적도 있었습니다. 불신자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올 정도로 지금 이 사회는 병들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현실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돌아서야 합니다. 누구부터 해야 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해야 합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시국이 어지러운 때에 사역했던 남 유다의 선지자입니다.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이자 문둥병자였던 나아만을 고쳐주고서도 그가 드리는 예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의 심부름꾼이었던 게하시가 그것을 보고는 돌아가는 나아만 일행을 따라가서 엘리사의 심부름이라 하면서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요구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었고, 게하시는 그것을 숨기고는 시치미를 떼고 엘리사에게 왔을 때입니다. 열왕기하5:26절입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라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지금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마음을 둘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국이 어지러운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이나 채우려 했던 게하시는 나아만에게 있던 문둥병이 들고 쫓겨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에서는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살지 말고, 다른 사람의 기쁨이 되며,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는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길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며,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습니까?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본문5절 이하에서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을 같이하며,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아무런 조건도 없이 받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그러했습니다. 핍박과 환난이 심했지만 교회는 한 마음이 되어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하며 아끼고 배려했습니다. 어려운 교회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당시의 마게도냐 교회는 무척 가난했으며 핍박이 극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기쁨으로 헌금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8:2-3절(현대어성경)입니다. “그들은 많은 어려움과 역경을 당하고 극도의 빈곤을 겪으면서도 기쁨에 넘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쓰라고 돈을 내놓았습니다. 그것도 자기네 힘이 미치는 한도 내에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자진해서 내놓았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하나가 되고 사랑으로 서로 돌아보며 아끼고 배려할 때, 세상은 교회를 칭찬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이렇게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고 기쁨이 넘치면 성도는 힘을 얻습니다. 즉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이웃들에게 선을 행하고 덕을 세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고 덕을 세울 때에 이웃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5:16절(현대어성경)에서 “너희 빛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환하게 비추어라. 모든 사람에게 착하게 행동하라. 그래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여인이 전염병에 걸려 기독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임시 간호원이 자신을 병실로 안내하고 여러 가지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임시 간호원은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간호사를 보조하는 간병인을 말합니다. 그 여인은 회진을 온 의사에게 자신이 보았던 한 임시간호원으로 자신을 간호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의사는 “자격증이 있는 다른 간호원들이 많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임시간호원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나는 그 임시 간호원에게서 따뜻한 사랑의 눈길과 주체하지 못하는 기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임시간호원에게 그 기쁨의 이유를 물었더니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대답했었습니다. 나도 임시 간호원의 기쁨과 사랑을 체험해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여인은 병이 나아서 퇴원하며 담당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이제 가족들과 함께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간병인은 기쁨과 배려하고 보살피는 자신의 생활의 모습으로 환자를 전도한 것입니다. 오늘의 사회에는 그 반대로 입으로는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거짓된 생활과 좁은 마음, 거친 말투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선한 행동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세상에서 이렇게 살려면 손해 보는 일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희생이 없이는 다른 사람의 기쁨이 될 수도 없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의 복음송 중에 “손해 보지 않으면 어떻게 형제를 사랑하나, 내 마음의 아픔이 없이도 어떻게 자매를 사랑하나, 우리의 사랑은 따지는 게 없어요. 아까운 게 있다면 사랑 않는거야…”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비록 혼란스럽고 이기적이고 복잡한 세상이지만 우리가 먼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룹시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선을 행하며 덕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무척 복잡합니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다원화 사회’, 또는‘정보사회’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향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소달구지를 타고 다니던 옛 사회는 사는 것이 단순했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밀림지대에 사는 미개종족들은 단순한 동물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열매를 따고, 뿌리를 캐고, 사냥을 합니다. 또한 종족 번식을 위하여 싸우고 땅을 차지하려 합니다. 그들은 인류의 발전과 행복을 위하여 일한다든지 문화, 예술, 과학, 학문, 미래정보 등은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끈끈한 정이 있으며, 동족간의 관용과 이해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개인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즉 서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과 이익과 평안을 위하여 서로를 배척하고 감시하고 싸우려는 마음이 지배적입니다. 가장 관용하고 배려하고 이해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마저 밴댕이 속처럼 좁아터져 가는 것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며칠 전에 동역 자들이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으로 갔습니다. 마침 옆 테이블에 세 사람이 식사를 하면서 대화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성도인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이 술을 가장 많이 마신 듯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이 ‘교인이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면서 나름대로 주워들은 신앙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도인 것 같은 사람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 본 바로는 기독교인의 80%가 비기독교 인들보다 더 속이 좁고 비협조적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맞다. 그 말에는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라고 했습니다.
마침 식탁이 준비 되어서 친구가 대표로 기도를 했는데, 그 술 취한 성도도 ‘아멘’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구차하게 변명하면서 자신도 교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사들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다른 두 사람은 우리가 목사들인 줄 모르고 실례를 했다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면서 일찍 자리를 떴습니다.
이탈이고 탈선입니다. 오늘의 사회가 삶의 도리에서 이탈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에서 이탈했습니다. 이사야1:2-3절에서 하나님께서 탄식하셨습니다.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자식이라 기르고 키웠더니 도리어 나에게 반항하는구나.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만들어 준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철없이 구는구나.”
오랜 정치생활을 한 어느 정치인이 “무슨 나라가 이러냐?”라고 한 말이 사회에서 유행어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대통령도 어느 사석에서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해서 비난을 산적도 있었습니다. 불신자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올 정도로 지금 이 사회는 병들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현실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돌아서야 합니다. 누구부터 해야 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해야 합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시국이 어지러운 때에 사역했던 남 유다의 선지자입니다.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이자 문둥병자였던 나아만을 고쳐주고서도 그가 드리는 예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의 심부름꾼이었던 게하시가 그것을 보고는 돌아가는 나아만 일행을 따라가서 엘리사의 심부름이라 하면서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요구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었고, 게하시는 그것을 숨기고는 시치미를 떼고 엘리사에게 왔을 때입니다. 열왕기하5:26절입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라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지금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마음을 둘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국이 어지러운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이나 채우려 했던 게하시는 나아만에게 있던 문둥병이 들고 쫓겨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에서는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살지 말고, 다른 사람의 기쁨이 되며,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는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길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며,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습니까?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본문5절 이하에서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을 같이하며,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아무런 조건도 없이 받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그러했습니다. 핍박과 환난이 심했지만 교회는 한 마음이 되어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하며 아끼고 배려했습니다. 어려운 교회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당시의 마게도냐 교회는 무척 가난했으며 핍박이 극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움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기쁨으로 헌금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8:2-3절(현대어성경)입니다. “그들은 많은 어려움과 역경을 당하고 극도의 빈곤을 겪으면서도 기쁨에 넘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쓰라고 돈을 내놓았습니다. 그것도 자기네 힘이 미치는 한도 내에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자진해서 내놓았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하나가 되고 사랑으로 서로 돌아보며 아끼고 배려할 때, 세상은 교회를 칭찬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이렇게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고 기쁨이 넘치면 성도는 힘을 얻습니다. 즉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이웃들에게 선을 행하고 덕을 세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고 덕을 세울 때에 이웃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5:16절(현대어성경)에서 “너희 빛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환하게 비추어라. 모든 사람에게 착하게 행동하라. 그래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여인이 전염병에 걸려 기독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임시 간호원이 자신을 병실로 안내하고 여러 가지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임시 간호원은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간호사를 보조하는 간병인을 말합니다. 그 여인은 회진을 온 의사에게 자신이 보았던 한 임시간호원으로 자신을 간호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의사는 “자격증이 있는 다른 간호원들이 많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임시간호원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나는 그 임시 간호원에게서 따뜻한 사랑의 눈길과 주체하지 못하는 기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임시간호원에게 그 기쁨의 이유를 물었더니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대답했었습니다. 나도 임시 간호원의 기쁨과 사랑을 체험해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여인은 병이 나아서 퇴원하며 담당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이제 가족들과 함께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간병인은 기쁨과 배려하고 보살피는 자신의 생활의 모습으로 환자를 전도한 것입니다. 오늘의 사회에는 그 반대로 입으로는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거짓된 생활과 좁은 마음, 거친 말투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선한 행동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세상에서 이렇게 살려면 손해 보는 일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희생이 없이는 다른 사람의 기쁨이 될 수도 없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의 복음송 중에 “손해 보지 않으면 어떻게 형제를 사랑하나, 내 마음의 아픔이 없이도 어떻게 자매를 사랑하나, 우리의 사랑은 따지는 게 없어요. 아까운 게 있다면 사랑 않는거야…”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비록 혼란스럽고 이기적이고 복잡한 세상이지만 우리가 먼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룹시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선을 행하며 덕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