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어진 길을 찾읍시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832회
작성일
2003-08-24 20:32
♡♥♡ 내게 주어진 길을 찾읍시다. / 고전15:9-10
*** 들어가는 말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하나는 물질적인 삶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인 삶입니다. 물질적인 삶이란, 물질로 이루어진 생명을 가진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삶입니다. 즉 나무나 풀 같은 식물들, 미생물이나 곤충이나 짐승과 사람까지를 포함하는 육체를 가진 동물들이 살아남고 번식하기 위한 삶을 말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아무런 생명도 없는 무생물이든지, 물질적인 생명을 가진 생명체이든지, 영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든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자신만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가 살아가는 것도 섭리하시며, 하찮은 참새 한 마리가 죽는 것조차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6:26절(현대어성경)입니다.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으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는 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28절, “또 너희는 왜 의복 때문에 걱정하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백합화는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으나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30절,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돌보아주시지 않겠느냐?” 10:29절, “참새 두 마리의 값이 얼마냐? 겨우 한 앗사리온이 아니냐? 그러나 그 중의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만물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에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주신 것입니다. 특히 영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삶의 길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길을 발견한 후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즉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삶의 길을 인도하시고 역사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갑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길을 찾아 그 길을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길을 어떻게 찾겠습니까?
1.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보시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선지자이든지, 하나님의 백성이든지,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인까지도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어느 농부가 마을 변두리에 있는 버려진 농장을 샀습니다. 잡초는 사람 키만큼 자랐고, 울타리는 무너지고, 축사도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농부가 농장을 가꾸기 시작한 첫 날, 마을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이 방문했습니다. 목사님은 여러 이야기를 나눈 후,
“하나님과 함께 멋진 농장을 가꾸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인사를 나누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목사님은 다시 농장을 찾아왔습니다. 농장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으며, 많은 소들이 있고, 곡식과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전혀 달라진 농장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놀랍군요! 하나님의 능력이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당신이 이루어낸 작품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말했습니다.
“예, 그렇고 말구요. 하지만 목사님 이걸 생각해 보십시오. 이전에 하나님 혼자 농장을 가꿀 때는 어땠는지…”
농부의 말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은 사람들의 땀 흘리는 수고와 노력으로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가꾸어집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나라와 민족과 택하신 사람들, 그리고 모든 만물을 통하여 그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에스라1:1-2절(현대어성경)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가 즉위한 그해에, 여호와께서 이미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알려 주셨던 약속을 성취해 주셨다. 여호와께서 세계의 통치권을 잡은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시자 그가 자기의 온 제국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그것을 문서로도 적어 공포하였다. 바사 왕 고레스가 공고한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내 손에 맡기셨다. 그리고 유다 나라의 예루살렘에 자신의 성전을 짓도록 분부를 내리셨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이렇게 조서를 내린다.”
고레스는 페르시아 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닌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그를 통하여 포로생활 중인 유다백성을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이루시려고 요셉을 택하셨고, 기근과 애굽의 바로 왕을 통하여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430년 후에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으며, 여호수아를 통하여 가나안 땅을 분배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나귀의 입을 열어 불순종하는 발람 선지자를 깨우치셨고, 큰 물고기와 박 넝쿨을 통하여 요나 선지자를 깨우치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를 위하여 까마귀를 통하여 먹이셨고, 사르밧 과부를 준비하셔서 긴 가뭄동안 음식을 제공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복음의 길을 여셨고, 가는 곳마다 바울을 돕는 사람들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때마다 택하시고 부르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주님의 사도로서의 길을 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세대에도 사람을 부르시고 이루십니다. 저나 여러분은 이 세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2.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에 합당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사도로 칭함을 받기에는 부족할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 부르심의 길을 가기에는 불완전한 사람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길을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렇게 사도의 일을 하게 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씀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는 고백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던 바울은 고린도전서12장과 로마서12장과 에베소서4장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은 에베소서4:12절(현대어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주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할 수 있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힘 있고 성숙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로마서12:6-8절에서는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 일, 구제하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등의 은사를 말씀하셨고, 에베소서4:11절에서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등의 은사적 직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12:8-11절(공동번역)을 봅시다.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믿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직책을, 어떤 사람은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을,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같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 주십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은사가 있습니까? 주어진 은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은사는 소멸됩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 즉 은사를 숨겨둔 사람은 그 은사를 빼앗길 뿐만 아니라 밖으로 내어쫓기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은사를 지금 잘 사용하고 있습니까? 은사는 사용할수록 더욱 큰 은사로 채워집니다. 역시 달란트 비유에서 은사를 숨겨 두었던 사람의 것을 빼앗아 은사를 잘 사용하여 많이 남긴 사람에게 준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길을 잘 알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신다면, 자신에게 있는 재능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재능, 즉 은사를 주심은 그 일을 하게 하심입니다. 음악을 잘 하는 것, 그림을 잘 그리는 것, 잘 가르치는 것, 남을 돕는 것, 남을 잘 위로하는 것 등등. 모든 것을 다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몸을 비유로 이 사실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17-18절(공동번역)입니다. “만일 온 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온 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우리의 몸에 두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주어진 길을 찾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게 하시려고 나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게 하심은 우리 자신을 위함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누리게 하시려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길을 주신 것입니다. 이 길은 우리의 열심을 다해서 가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위하여 모든 것을 예비해 두셨지만 강제로 그 길을 가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평양 감사도 제 싫으면 못한다.”고 했습니다. 즉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싫어하면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진수성찬을 차려놓아도 먹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중세 수도원 시대에 ‘성 안토니’라는 경건한 수도사가 세상을 피하여 동굴에서 오직 수도에만 전념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에게
“안토니여,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구두 수선공이 당신보다 더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안토니는 그길로 알렉산드리아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공에게 “당신은 어떻게 그런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선공은
“내가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다니요? 저는 매일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에 불과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매일 교회당에 와서 기도하고, 성경 읽고, 거룩한 생활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읽고 듣는 것과 찬양은 성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므로 뺄 수 없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열심 있고 성실하게 가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생활 속에서 실천되지 않는 경건은 껍질뿐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고 우리 마음도 흔들리게 하지 맙시다. 오직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하고 열심 있게 나아갑시다. 그 보상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자신의 길을 잃지 않고 흔들림 없이 주님을 향하여 전진하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하나는 물질적인 삶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인 삶입니다. 물질적인 삶이란, 물질로 이루어진 생명을 가진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삶입니다. 즉 나무나 풀 같은 식물들, 미생물이나 곤충이나 짐승과 사람까지를 포함하는 육체를 가진 동물들이 살아남고 번식하기 위한 삶을 말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아무런 생명도 없는 무생물이든지, 물질적인 생명을 가진 생명체이든지, 영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든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자신만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가 살아가는 것도 섭리하시며, 하찮은 참새 한 마리가 죽는 것조차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6:26절(현대어성경)입니다.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으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는 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28절, “또 너희는 왜 의복 때문에 걱정하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백합화는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으나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30절,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돌보아주시지 않겠느냐?” 10:29절, “참새 두 마리의 값이 얼마냐? 겨우 한 앗사리온이 아니냐? 그러나 그 중의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만물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에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주신 것입니다. 특히 영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삶의 길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길을 발견한 후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즉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삶의 길을 인도하시고 역사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갑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길을 찾아 그 길을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길을 어떻게 찾겠습니까?
1.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보시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선지자이든지, 하나님의 백성이든지,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인까지도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어느 농부가 마을 변두리에 있는 버려진 농장을 샀습니다. 잡초는 사람 키만큼 자랐고, 울타리는 무너지고, 축사도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농부가 농장을 가꾸기 시작한 첫 날, 마을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이 방문했습니다. 목사님은 여러 이야기를 나눈 후,
“하나님과 함께 멋진 농장을 가꾸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인사를 나누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목사님은 다시 농장을 찾아왔습니다. 농장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으며, 많은 소들이 있고, 곡식과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전혀 달라진 농장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놀랍군요! 하나님의 능력이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당신이 이루어낸 작품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말했습니다.
“예, 그렇고 말구요. 하지만 목사님 이걸 생각해 보십시오. 이전에 하나님 혼자 농장을 가꿀 때는 어땠는지…”
농부의 말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은 사람들의 땀 흘리는 수고와 노력으로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가꾸어집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나라와 민족과 택하신 사람들, 그리고 모든 만물을 통하여 그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에스라1:1-2절(현대어성경)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가 즉위한 그해에, 여호와께서 이미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알려 주셨던 약속을 성취해 주셨다. 여호와께서 세계의 통치권을 잡은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시자 그가 자기의 온 제국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그것을 문서로도 적어 공포하였다. 바사 왕 고레스가 공고한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내 손에 맡기셨다. 그리고 유다 나라의 예루살렘에 자신의 성전을 짓도록 분부를 내리셨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이렇게 조서를 내린다.”
고레스는 페르시아 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닌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그를 통하여 포로생활 중인 유다백성을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이루시려고 요셉을 택하셨고, 기근과 애굽의 바로 왕을 통하여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430년 후에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으며, 여호수아를 통하여 가나안 땅을 분배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나귀의 입을 열어 불순종하는 발람 선지자를 깨우치셨고, 큰 물고기와 박 넝쿨을 통하여 요나 선지자를 깨우치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를 위하여 까마귀를 통하여 먹이셨고, 사르밧 과부를 준비하셔서 긴 가뭄동안 음식을 제공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복음의 길을 여셨고, 가는 곳마다 바울을 돕는 사람들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때마다 택하시고 부르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주님의 사도로서의 길을 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세대에도 사람을 부르시고 이루십니다. 저나 여러분은 이 세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2.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에 합당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사도로 칭함을 받기에는 부족할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 부르심의 길을 가기에는 불완전한 사람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길을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렇게 사도의 일을 하게 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씀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는 고백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던 바울은 고린도전서12장과 로마서12장과 에베소서4장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은 에베소서4:12절(현대어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주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할 수 있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힘 있고 성숙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로마서12:6-8절에서는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 일, 구제하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등의 은사를 말씀하셨고, 에베소서4:11절에서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등의 은사적 직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12:8-11절(공동번역)을 봅시다.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믿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직책을, 어떤 사람은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을,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같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 주십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은사가 있습니까? 주어진 은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은사는 소멸됩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 즉 은사를 숨겨둔 사람은 그 은사를 빼앗길 뿐만 아니라 밖으로 내어쫓기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은사를 지금 잘 사용하고 있습니까? 은사는 사용할수록 더욱 큰 은사로 채워집니다. 역시 달란트 비유에서 은사를 숨겨 두었던 사람의 것을 빼앗아 은사를 잘 사용하여 많이 남긴 사람에게 준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길을 잘 알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신다면, 자신에게 있는 재능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재능, 즉 은사를 주심은 그 일을 하게 하심입니다. 음악을 잘 하는 것, 그림을 잘 그리는 것, 잘 가르치는 것, 남을 돕는 것, 남을 잘 위로하는 것 등등. 모든 것을 다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몸을 비유로 이 사실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17-18절(공동번역)입니다. “만일 온 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온 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우리의 몸에 두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주어진 길을 찾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게 하시려고 나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게 하심은 우리 자신을 위함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누리게 하시려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길을 주신 것입니다. 이 길은 우리의 열심을 다해서 가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위하여 모든 것을 예비해 두셨지만 강제로 그 길을 가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평양 감사도 제 싫으면 못한다.”고 했습니다. 즉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싫어하면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진수성찬을 차려놓아도 먹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중세 수도원 시대에 ‘성 안토니’라는 경건한 수도사가 세상을 피하여 동굴에서 오직 수도에만 전념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에게
“안토니여,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구두 수선공이 당신보다 더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안토니는 그길로 알렉산드리아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공에게 “당신은 어떻게 그런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선공은
“내가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다니요? 저는 매일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에 불과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매일 교회당에 와서 기도하고, 성경 읽고, 거룩한 생활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읽고 듣는 것과 찬양은 성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므로 뺄 수 없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열심 있고 성실하게 가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생활 속에서 실천되지 않는 경건은 껍질뿐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고 우리 마음도 흔들리게 하지 맙시다. 오직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하고 열심 있게 나아갑시다. 그 보상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자신의 길을 잃지 않고 흔들림 없이 주님을 향하여 전진하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