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 위의 인생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472회
작성일
2003-08-20 15:28
♡♥♡ 시험대 위의 인생 / 렘17:9-11
*** 들어가는 말
현대어성경 본문 / “여호와께서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인간의 마음보다 더 간사하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 없다. 인간의 마음은 거짓과 재앙으로 가득 차 있다. 누가 그것을 투시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자는 바로 나 여호와이다. 인간이 아무리 깊은 소원을 품더라도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행동한 것에 따라 그대로 갚아 주는 자가 바로 나 여호와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쌓는 사람은 다른 새가 낳은 알을 품었다가 새끼들이 도망가는 꼴을 보는 자고새와 같아질 것이다. 그는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에 모든 재산을 내주게 되고 말년에는 빈손으로 죽어 갈 것이다.”
우리 옛 말에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신비한 자리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에 상관없이 육신의 욕망을 따르는 또 다른 마음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마음보다 더 간사하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 없다. 인간의 마음은 거짓과 재앙으로 가득 차 있다. 누가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있겠는가? 라고 인간의 죄악 된 마음을 지적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인간의 깊은 마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꿰뚫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소원까지도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생각과 행동을 살피시고 그 행동한 것에 따라 그대로 갚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생각부터 정직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설령 마음의 생각이 바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죄악 된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4:26절에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어느 목사님이 월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시내 중심가에 있는 교회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운전기사에게 차비를 내면서도 목사님은 교회 일 생각에 골몰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리에 앉아서야 그 운전사가 거스름돈을 더 준 것을 알았습니다.
동전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얼핏 떠오른 생각은 ‘하나님께서 내게 돈을 더 주시는구나.’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 있을수록 자꾸만 불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심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드디어 교회 근처에 이르러 차에서 내리려고 문 앞으로 걸어 나온 목사님은 운전기사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까 기사 양반이 잘못해서 내게 거스름돈을 더 주었더군요.” 이때 운전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잘못 거슬러 드린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어제 목사님 교회에 가서 정직에 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시험해 보려고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목사님.”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갈등을 겪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시고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어떤 것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에 합당한 믿음이 있는지,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는지를 보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백세에 얻은 아들을 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요셉에게는 애굽의 시위대장인 보디발 부인의 유혹이 따랐습니다. 사울 왕에게도, 다윗 왕에게도 있었으며,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명예와 권력이, 가룟 유다에게는 돈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유혹이나 시련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을 달아보셨습니다. 이들 중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시험대를 통과한 사람도 있지만, 세상을 따르거나 자신의 욕심을 쫓다가 실패하고 무너져 내린 사람들도 많습니다. 신명기8: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즉 광야생활은 가나안을 주시기 전에 그곳에 합당한지의 여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라고 기도한 것들을 주시기에 합당한지를 시험하십니다. 그 시험대를 통과해야만 우리는 그것을 받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어떤 것을 요구할 때에 아이가 그것을 사용하기에 합당한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장성한 어른들에게는 칼이 유용한 도구이지만, 칼을 잘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에게는 위험한 도구입니다. 아이에게 칼을 잘 쓸 수 있을 때까지 칼을 주는 것을 유예하는 것과 같습니다.
히브리서5:12-14절(공동번역)을 봅시다. “여러분은 벌써 오래 전에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에게서 다시 배워야 할 처지입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아직도 젖을 먹어야 할 형편입니다. 젖을 먹어야 할 사람은 아직 어린아이이니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숙해지면 단단한 음식을 먹게 됩니다. 성숙한 사람은 훈련을 받아서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젖을 먹는 어린아이에게는 단단한 식물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작정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기도와 말씀과 예배와 섬김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키워가야 합니다. 부지런히 영적인 성장을 해서 영적인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단단한 음식도 주어지고, 주어진 일에 합당한 능력도 주시는 것입니다.
학교 앞 체육관에 다니는 운동선수들이 멋진 운동복을 입고 운동장을 한 줄로 뛰어가는 것을 본 동네 꼬마가 엄마를 졸라서 운동복을 샀습니다. 자기도 운동복을 입고는 학교 운동장에 가서 뛰었습니다. 그런데 한 바퀴도 체 못 뛰고는 숨이 차서 하는 말이 “엄마! 이거 입어도 선수가 안 되는구나”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아이는 좋은 운동복을 입으면 금방 선수로 변하는 줄 알았나 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모양만 갖추었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키워가야 합니다. 믿음은 누가 키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실한 예배, 매일 말씀과 기도를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행하며, 섬기고 봉사하는 일로 신앙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 영원한 생명과 보배롭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수고하고 애쓰며 눈물로 인내하는 노력 없이 주어지겠습니까? 한 생명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데에도 많은 기도와 물질과 시간과 노력과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12:1(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라고 권면합니다. 달리기 경기는 골인지점을 통과해야만 순위가 결정되고 끝이 납니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생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달려야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때까지 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9:24절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달음질을 멈추고 세상을 향하게 되면 가장 보배로운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그래서 본문11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달리지 못하고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을 자고새에 비유했습니다. 자고새는 ‘메추라기’입니다. 이 메추라기가 다른 새의 알을 품고 있다가 알이 부화하면 그 새끼 새는 떠나가 버립니다. 이것처럼 성도가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면 후에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도는 이런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모든 마음의 생각과 생활이 하나님 앞에 낱낱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심령을 살피시며 마음의 생각을 달아보시는 하나님께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과 육신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의 시험대에 있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옳다.’ 인정함을 받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현대어성경 본문 / “여호와께서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인간의 마음보다 더 간사하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 없다. 인간의 마음은 거짓과 재앙으로 가득 차 있다. 누가 그것을 투시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자는 바로 나 여호와이다. 인간이 아무리 깊은 소원을 품더라도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행동한 것에 따라 그대로 갚아 주는 자가 바로 나 여호와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쌓는 사람은 다른 새가 낳은 알을 품었다가 새끼들이 도망가는 꼴을 보는 자고새와 같아질 것이다. 그는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에 모든 재산을 내주게 되고 말년에는 빈손으로 죽어 갈 것이다.”
우리 옛 말에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신비한 자리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에 상관없이 육신의 욕망을 따르는 또 다른 마음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마음보다 더 간사하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 없다. 인간의 마음은 거짓과 재앙으로 가득 차 있다. 누가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있겠는가? 라고 인간의 죄악 된 마음을 지적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인간의 깊은 마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꿰뚫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소원까지도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생각과 행동을 살피시고 그 행동한 것에 따라 그대로 갚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생각부터 정직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설령 마음의 생각이 바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죄악 된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4:26절에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어느 목사님이 월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시내 중심가에 있는 교회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운전기사에게 차비를 내면서도 목사님은 교회 일 생각에 골몰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리에 앉아서야 그 운전사가 거스름돈을 더 준 것을 알았습니다.
동전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얼핏 떠오른 생각은 ‘하나님께서 내게 돈을 더 주시는구나.’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 있을수록 자꾸만 불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심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드디어 교회 근처에 이르러 차에서 내리려고 문 앞으로 걸어 나온 목사님은 운전기사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까 기사 양반이 잘못해서 내게 거스름돈을 더 주었더군요.” 이때 운전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잘못 거슬러 드린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어제 목사님 교회에 가서 정직에 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시험해 보려고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목사님.”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갈등을 겪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시고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어떤 것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에 합당한 믿음이 있는지,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는지를 보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백세에 얻은 아들을 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요셉에게는 애굽의 시위대장인 보디발 부인의 유혹이 따랐습니다. 사울 왕에게도, 다윗 왕에게도 있었으며,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명예와 권력이, 가룟 유다에게는 돈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유혹이나 시련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을 달아보셨습니다. 이들 중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시험대를 통과한 사람도 있지만, 세상을 따르거나 자신의 욕심을 쫓다가 실패하고 무너져 내린 사람들도 많습니다. 신명기8: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즉 광야생활은 가나안을 주시기 전에 그곳에 합당한지의 여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라고 기도한 것들을 주시기에 합당한지를 시험하십니다. 그 시험대를 통과해야만 우리는 그것을 받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어떤 것을 요구할 때에 아이가 그것을 사용하기에 합당한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장성한 어른들에게는 칼이 유용한 도구이지만, 칼을 잘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에게는 위험한 도구입니다. 아이에게 칼을 잘 쓸 수 있을 때까지 칼을 주는 것을 유예하는 것과 같습니다.
히브리서5:12-14절(공동번역)을 봅시다. “여러분은 벌써 오래 전에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에게서 다시 배워야 할 처지입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아직도 젖을 먹어야 할 형편입니다. 젖을 먹어야 할 사람은 아직 어린아이이니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숙해지면 단단한 음식을 먹게 됩니다. 성숙한 사람은 훈련을 받아서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젖을 먹는 어린아이에게는 단단한 식물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작정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기도와 말씀과 예배와 섬김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키워가야 합니다. 부지런히 영적인 성장을 해서 영적인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단단한 음식도 주어지고, 주어진 일에 합당한 능력도 주시는 것입니다.
학교 앞 체육관에 다니는 운동선수들이 멋진 운동복을 입고 운동장을 한 줄로 뛰어가는 것을 본 동네 꼬마가 엄마를 졸라서 운동복을 샀습니다. 자기도 운동복을 입고는 학교 운동장에 가서 뛰었습니다. 그런데 한 바퀴도 체 못 뛰고는 숨이 차서 하는 말이 “엄마! 이거 입어도 선수가 안 되는구나”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아이는 좋은 운동복을 입으면 금방 선수로 변하는 줄 알았나 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모양만 갖추었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키워가야 합니다. 믿음은 누가 키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실한 예배, 매일 말씀과 기도를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행하며, 섬기고 봉사하는 일로 신앙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 영원한 생명과 보배롭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수고하고 애쓰며 눈물로 인내하는 노력 없이 주어지겠습니까? 한 생명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데에도 많은 기도와 물질과 시간과 노력과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12:1(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라고 권면합니다. 달리기 경기는 골인지점을 통과해야만 순위가 결정되고 끝이 납니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생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달려야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때까지 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9:24절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달음질을 멈추고 세상을 향하게 되면 가장 보배로운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그래서 본문11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달리지 못하고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을 자고새에 비유했습니다. 자고새는 ‘메추라기’입니다. 이 메추라기가 다른 새의 알을 품고 있다가 알이 부화하면 그 새끼 새는 떠나가 버립니다. 이것처럼 성도가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면 후에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도는 이런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모든 마음의 생각과 생활이 하나님 앞에 낱낱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심령을 살피시며 마음의 생각을 달아보시는 하나님께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과 육신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의 시험대에 있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옳다.’ 인정함을 받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