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으로 삽시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775회
작성일
2003-08-09 13:27
♡♥♡ 적극적으로 삽시다. / 요10:7-18
*** 들어가는 말
사람마다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지시를 받고 인도함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도 있고, 적당히 대충 하는 사람도 있고, 감시 감독이 없어도 자신의 일을 알고 적극적으로 실현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선교사로 사역한 ‘크리스티 윌슨’이라는 미국인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카불의 주산업은 ‘목양업’인데, 양을 칠 때의 문제점은 양들이 달팽이를 먹으면 질병에 걸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양들이 풀을 뜯어 먹다가 풀에 붙은 달팽이를 먹게 되어 양들이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윌슨 선교사는 이 문제에 생각을 집중했습니다.
오리는 달팽이를 잘 먹는데, 선교사는 아프가니스탄에 오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고향에 있는 친구에게 ‘오리 알을 좀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의 친구는 24개의 오리 알을 보내면서 일정한 기간을 온도를 조절해주면 부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착한 오리 알의 일부는 깨어지고 일부는 부패해 있었습니다. 윌슨 선교사는,
“이 알들 가운데서 최소한 암수 한 놈씩이라도 나오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처럼 2개의 알에서 암수 한 쌍만 부화했습니다. 결국 그 2마리가 많은 오리를 번식시켜, 그들이 달팽이를 모두 잡아먹었기 때문에 목양업이 크게 번창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윌슨 선교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알았고, 그 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문제를 풀어갔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는 비유적인 표현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의 보호자가 되시며, 양의 풍성한 생명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로서의 예수님의 적극적인 사역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이 의미하는 예수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자 함이 아니라, 그 사역을 실행하시는 예수님의 적극적인 삶의 모습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것은 어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오랜 옛날에 황금을 찾아 나선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황금을 찾아 헤매다가 페르시아 사막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사막의 열기와 갈증으로 지친 몸을 겨우겨우 이끌고 가는데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가 북쪽으로 2km만 참고 가면 오아시스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조약돌이 있을 것인데, 그 조약돌을 네 마음대로 주머니 속에 넣고 하룻밤만 자거라. 아침에 깨어나면 너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후회를 동시에 맛볼 것이다.”
나그네는 있는 힘을 다하여 북쪽으로 2km쯤 가니 과연 오아시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실컷 물을 마시고는 물속의 조약돌을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조약돌을 너무 많이 넣었는지 불편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다시 빼내고서 적당히 편한 대로 넣고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조약돌들을 꺼냈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돌들이 모두 황금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는 황금을 보면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몇 개 되지 않는 황금 돌을 보면서 마음이 슬퍼졌고, “아, 조금 불편하더라도 좀 더 많이 넣고 잘 것을… ”이라는 후회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한갓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젊은이처럼 자신의 평안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일이 지나고 나면 “이렇게 할껄!”, “저렇게 할껄!”하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주님의 생애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항상 최선의 삶을 사셨으며, 성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적극적인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의 삶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1. 적극적인 삶을 위해서는 자기 인식이 있어야합니다.
적극적인 삶이란, 자신의 생애에 대하여 긍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부정적이거나 관심이 적게 되면 적극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관심은 자기 정체성이 확실할 때에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즉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자신의 생활에 관심이 생기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게 되는 것입니다. 혹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자신의 생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늘 자신의 영적이고 육신적인 인격과 소속감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 등. 예수님 자신에 대한 너무나 분명한 인식이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자신에 대한 바르고 명확한 인식으로부터 적극적이고 확신에 찬 생활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13: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넘치는 확신과 담대함으로 살았던 사람 중에는 바울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일꾼임을 누누이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는 자신도 사도 중 한 사람임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24-5년 후에는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15:9)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후에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3:8)라고 했으며, 순교 직전인 80여 세가 되었을 때에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자신을 깊이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자신을 깊이 알아가면서 겸손해짐과 동시에 생활은 당당하고, 담대하고, 확신에 찬 적극적인 모습으로 바뀌어갔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소유된 자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며 백성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교회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 자신은 이런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너무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자신에 대한 이런 인식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2. 적극적인 삶을 위해서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목적의식이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것이며, 자신이 추구하고 나아가는 푯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명확하게 아셨습니다. 본문10절에서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10:45절에서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목적이 주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 모든 생활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직 그 목적대로만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르심을 받은 목적과 삶의 목적을 가장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시려고 부르시고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목적이 있으면 당연히 그 목적대로 살아야 합니다.
레위기11:20-21절에 보면,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 이런 곤충은 부정하니 먹지말라고 하셨을까요?
날개를 가졌으면 날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것을 아예 포기해 버리고 네 발로 엉금엉금 기는 놈은 더러운 놈이니 만지지도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리로 뛰는 곤충은 인정해 주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날개에 힘이 없어서 도무지 날 수 없으면 하다못해 나는 꿈을 안고 뛰기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뛰는 것마저 포기한 상태라면 이는 자기의 삶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존재이니 저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 생각해 보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며, 거룩한 백성이며,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완전하고, 거룩하게 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살려고 힘쓰고 노력은 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의지하면서 도움을 구하고 물결 위를 걸으려고 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비록 바다로 빠져드는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물 위로 뛰어내리는 적극적인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예 실패가 두렵고, 평안하고 안전하고 싶어서 주저앉아 있다면 하나님께서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셔서 내버리실 것입니다. 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은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요한계시록3:15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을 잘 알지 못했기에 그들은 미지근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목적이 불분명하거나 아예 잊어버리면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 미지근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극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름 받은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담대하고 적극적으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3. 적극적인 삶을 위하여 자기 헌신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으며,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입니다. 자신을 위한 희생과 헌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을 위한 희생이며 헌신입니다. 곧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No Cross No Crown.”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땀 흘리는 수고가 없이는 좋은 열매, 많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칼 메닝거’ 박사의 강연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정신건강에 관하여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답하는 순서가 되었는데,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박사님,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이 신경쇠약증에 걸린 것 같다.’고 상담해 온다면 박사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하리고 말씀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사가 “정신과 의사의 진찰을 받아 보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메닝거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집을 나서십시오. 기찻길을 따라 걸어보십시오. 그러고는 곤경에 빠진 사람을 찾아 그에게 도움을 베푸십시오.”
박사는 자신의 정신적인 건강마저도 남을 위하여 헌신함으로서 치유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자기희생이나 헌신의 결단이 없이는 적극적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결단이 없다면 결국 남을 대신 희생시키거나 다른 사람에게 헌신을 강요할 것이니까요.
여러분,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 소중한 인생을 소일거리로 허비하거나,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활로 침체되지 아니하도록 적극적인 열심을 가집시다. 주님처럼 나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로서의 목적을 알고, 나를 위하신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나 자신도 헌신하는 삶으로 결단합시다.
미국의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실패한 사람들 1만 명과 성공한 사람들 1만 명을 조사하여 분석한 자료가 있습니다. 직장, 가정, 사회, 신앙생활 등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실패의 원인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보통 환경이 나빠서, 도와주는 자가 없어서, 또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서, 기술이 없어서, 능력이 부족하여 등등. 이런 원인으로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패의 원인 중에는 이런 원인은 불과 15%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첫째는 사람 관계이며, 둘째는 부정적인 마음의 자세이며, 셋째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사람마다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지시를 받고 인도함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도 있고, 적당히 대충 하는 사람도 있고, 감시 감독이 없어도 자신의 일을 알고 적극적으로 실현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선교사로 사역한 ‘크리스티 윌슨’이라는 미국인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카불의 주산업은 ‘목양업’인데, 양을 칠 때의 문제점은 양들이 달팽이를 먹으면 질병에 걸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양들이 풀을 뜯어 먹다가 풀에 붙은 달팽이를 먹게 되어 양들이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윌슨 선교사는 이 문제에 생각을 집중했습니다.
오리는 달팽이를 잘 먹는데, 선교사는 아프가니스탄에 오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고향에 있는 친구에게 ‘오리 알을 좀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의 친구는 24개의 오리 알을 보내면서 일정한 기간을 온도를 조절해주면 부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착한 오리 알의 일부는 깨어지고 일부는 부패해 있었습니다. 윌슨 선교사는,
“이 알들 가운데서 최소한 암수 한 놈씩이라도 나오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처럼 2개의 알에서 암수 한 쌍만 부화했습니다. 결국 그 2마리가 많은 오리를 번식시켜, 그들이 달팽이를 모두 잡아먹었기 때문에 목양업이 크게 번창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윌슨 선교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알았고, 그 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문제를 풀어갔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는 비유적인 표현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의 보호자가 되시며, 양의 풍성한 생명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로서의 예수님의 적극적인 사역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이 의미하는 예수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자 함이 아니라, 그 사역을 실행하시는 예수님의 적극적인 삶의 모습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것은 어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오랜 옛날에 황금을 찾아 나선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황금을 찾아 헤매다가 페르시아 사막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사막의 열기와 갈증으로 지친 몸을 겨우겨우 이끌고 가는데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가 북쪽으로 2km만 참고 가면 오아시스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조약돌이 있을 것인데, 그 조약돌을 네 마음대로 주머니 속에 넣고 하룻밤만 자거라. 아침에 깨어나면 너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후회를 동시에 맛볼 것이다.”
나그네는 있는 힘을 다하여 북쪽으로 2km쯤 가니 과연 오아시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실컷 물을 마시고는 물속의 조약돌을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조약돌을 너무 많이 넣었는지 불편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다시 빼내고서 적당히 편한 대로 넣고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조약돌들을 꺼냈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돌들이 모두 황금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는 황금을 보면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몇 개 되지 않는 황금 돌을 보면서 마음이 슬퍼졌고, “아, 조금 불편하더라도 좀 더 많이 넣고 잘 것을… ”이라는 후회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한갓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젊은이처럼 자신의 평안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일이 지나고 나면 “이렇게 할껄!”, “저렇게 할껄!”하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주님의 생애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항상 최선의 삶을 사셨으며, 성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적극적인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의 삶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1. 적극적인 삶을 위해서는 자기 인식이 있어야합니다.
적극적인 삶이란, 자신의 생애에 대하여 긍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부정적이거나 관심이 적게 되면 적극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관심은 자기 정체성이 확실할 때에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즉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자신의 생활에 관심이 생기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게 되는 것입니다. 혹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자신의 생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늘 자신의 영적이고 육신적인 인격과 소속감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 등. 예수님 자신에 대한 너무나 분명한 인식이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자신에 대한 바르고 명확한 인식으로부터 적극적이고 확신에 찬 생활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13: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넘치는 확신과 담대함으로 살았던 사람 중에는 바울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일꾼임을 누누이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는 자신도 사도 중 한 사람임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24-5년 후에는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15:9)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후에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3:8)라고 했으며, 순교 직전인 80여 세가 되었을 때에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자신을 깊이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자신을 깊이 알아가면서 겸손해짐과 동시에 생활은 당당하고, 담대하고, 확신에 찬 적극적인 모습으로 바뀌어갔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소유된 자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며 백성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교회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 자신은 이런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너무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자신에 대한 이런 인식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2. 적극적인 삶을 위해서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목적의식이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것이며, 자신이 추구하고 나아가는 푯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명확하게 아셨습니다. 본문10절에서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10:45절에서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목적이 주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 모든 생활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직 그 목적대로만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르심을 받은 목적과 삶의 목적을 가장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시려고 부르시고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목적이 있으면 당연히 그 목적대로 살아야 합니다.
레위기11:20-21절에 보면,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 이런 곤충은 부정하니 먹지말라고 하셨을까요?
날개를 가졌으면 날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것을 아예 포기해 버리고 네 발로 엉금엉금 기는 놈은 더러운 놈이니 만지지도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리로 뛰는 곤충은 인정해 주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날개에 힘이 없어서 도무지 날 수 없으면 하다못해 나는 꿈을 안고 뛰기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뛰는 것마저 포기한 상태라면 이는 자기의 삶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존재이니 저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 생각해 보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며, 거룩한 백성이며,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완전하고, 거룩하게 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살려고 힘쓰고 노력은 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의지하면서 도움을 구하고 물결 위를 걸으려고 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비록 바다로 빠져드는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물 위로 뛰어내리는 적극적인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예 실패가 두렵고, 평안하고 안전하고 싶어서 주저앉아 있다면 하나님께서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셔서 내버리실 것입니다. 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은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요한계시록3:15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을 잘 알지 못했기에 그들은 미지근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목적이 불분명하거나 아예 잊어버리면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 미지근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극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름 받은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담대하고 적극적으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3. 적극적인 삶을 위하여 자기 헌신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으며,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입니다. 자신을 위한 희생과 헌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을 위한 희생이며 헌신입니다. 곧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No Cross No Crown.”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땀 흘리는 수고가 없이는 좋은 열매, 많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칼 메닝거’ 박사의 강연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정신건강에 관하여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답하는 순서가 되었는데,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박사님,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이 신경쇠약증에 걸린 것 같다.’고 상담해 온다면 박사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하리고 말씀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사가 “정신과 의사의 진찰을 받아 보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메닝거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집을 나서십시오. 기찻길을 따라 걸어보십시오. 그러고는 곤경에 빠진 사람을 찾아 그에게 도움을 베푸십시오.”
박사는 자신의 정신적인 건강마저도 남을 위하여 헌신함으로서 치유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자기희생이나 헌신의 결단이 없이는 적극적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결단이 없다면 결국 남을 대신 희생시키거나 다른 사람에게 헌신을 강요할 것이니까요.
여러분,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 소중한 인생을 소일거리로 허비하거나,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활로 침체되지 아니하도록 적극적인 열심을 가집시다. 주님처럼 나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로서의 목적을 알고, 나를 위하신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나 자신도 헌신하는 삶으로 결단합시다.
미국의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실패한 사람들 1만 명과 성공한 사람들 1만 명을 조사하여 분석한 자료가 있습니다. 직장, 가정, 사회, 신앙생활 등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실패의 원인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보통 환경이 나빠서, 도와주는 자가 없어서, 또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서, 기술이 없어서, 능력이 부족하여 등등. 이런 원인으로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패의 원인 중에는 이런 원인은 불과 15%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첫째는 사람 관계이며, 둘째는 부정적인 마음의 자세이며, 셋째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