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691회 작성일 2003-07-22 10:41
♡♥♡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 요6:66-71

*** 들어가는 말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로마 황제 네로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대대적으로 자행되던 때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화형으로 또는 굶주린 사자들에게 찢겨 죽어갔습니다. 성도들은 베드로에게 자신들은 죽어도 되지만 선생님은 남아서 더 많은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며 로마를 떠나 피신할 것을 강권했습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의 권유에 못 이겨 어린 소년과 함께 로마를 떠났습니다.
숲길을 가고 있을 때, 저만치서 베드로를 마주하여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굴을 알아 볼 정도가 되었을 때, 베드로는 놀랐습니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니(Quo Vadis O Domine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그러자 예수님은 “로마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네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로마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순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라며 발걸음을 돌이킵니다. 로마로 되돌아가는 베드로에게 소년이 묻습니다. “Quo Vadis O Domine?”
결국 베드로는 로마로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 곁에 가까이 다가 왔다가 멀어져 갔을 것입니다. 주님 곁을 떠나간 이유도 많겠지요. 많은 이유 중에서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것”이 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경우만 해도 거의 대부분이 자신의 환경, 자신이 추구하는 뜻과 달라서 떠나갔습니다.

영화에서의 베드로는 성도의 권유에 못 이겨 떠났지만, 실상은 박해를 피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사도 바울에게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를 들은 성도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진 말도록 만류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고 단호하게 자신의 결심을 밝히고는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오늘에도 이런 경우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어떤 경우에고 단호하게 결단하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저울질 하다가 세상으로 기울어서 주님을 떠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지만 마음은 세상으로 기울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후자의 두 경우 즉 몸이 떠나든 마음이 떠나든 모두 주님을 떠난 경우입니다. 성경에는 확신하는 사람에 대하여, 그리고 주님을 떠나는 사람에 대하여 모두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의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결심은 어떠한지를 생각해 봅시다.

먼저, 본문을 이해할 전체 내용을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벳세다 들녘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놀라운 이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중들은 이적을 직접 체험하고서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산으로 피하셨고, 제자들을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서 바람과 파도로 고생하는 제자들에게 오시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찾아 호수 건너편 가버나움까지 따라왔습니다.

집요하게 따르는 군중들을 향하여 주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군중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많은 사람을 살리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심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만이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 둘 주님 곁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물음은 지금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성도의 고백은 분명하고 확실해야 합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물음은 간단명료했습니다. 이 물음에는 ‘너희들의 생각도 저들과 같으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물음에 성질 급한 베드로가 즉각 나섰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너무도 명확하게 답변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체험으로 알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베드로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고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고백을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이 고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고백이 마태복음16:16절에서 나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에, 역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고백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님을 간절하게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 전부가 이런 고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을 지목하셨고, 그가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다른 제자들의 형편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들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었지만, 속으로는 주님을 떠나간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왕이 되시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마가복음10:37절에서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고, 나머지 제자들은 선수를 빼앗긴 마음에 분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남은 제자들이 떠나간 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룟사람 유다는 주님을 떠나간 무리들보다 더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쯤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오늘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다가 세상적인 욕망에 굴복했듯이, 오늘의 교인들 중에도 세상의 요구나 환경적인 압력에 굴복하여 형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아예 주님을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질적인 욕망이나 정치적, 사회적인 환경의 압력에 타협하고 굴복하는 사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끊어지게 됩니다. 야고보서4:4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욕망대로 살고 있습니다. 영화 속의 베드로가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박해를 피해 도망가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명분은 그럴듯합니다. 살아남아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명분이었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처럼 오늘의 성도들도 나름대로의 명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명분을 가지고는 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고백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 고백은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말씀에 순종하는 실천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처럼 많은 실수도, 위기 속에서의 배반도, 좌절과 낙심도, 회개하고 돌이킬 때에 주님은 용서하시고 용납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계속 거듭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까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는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내가 주님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라는, 주님을 향하는 확실한 고백을 가지고 그 고백대로 행하며 삽시다. 그리하면 우리의 생명이시고 힘이시고 능력이신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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